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Sigismond Thalberg(지기스몬트 탈버그)

정준극 2009. 6. 10. 23:33

Sigismond Thalberg(지기스몬트 탈버그)

리스트의 라이벌

 

14세 때의 탈버그 

                      

작곡가 지기스몬트 탈버그(1812-1871)는 19세기에 가장 뛰어난 피아노의 명인이었다. 탈버그는 스위스 제네바 인근의 파퀴(Paquis)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던 해였고 비엔나에서는 비엔나악우회가 창설된 해였다. 탈버그에 대한 출생기록부를 보면 아버지는 요셉 탈버그이며 어머니는 포르투네 슈타인(Fortunée Stein)이라고 되어 있다. 두 사람 모두 프랑크푸르트 출신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출생기록부의 이름들이 모두 가명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탈버그는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사생아의 부모는 그들의 이름을 출생기록부에 가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렇게 태어난 아이에 대하여는 일생동안 부모의 진짜 이름을 밝혀지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탈버그에 대하여 연구한 프랑소아-조셉 페티스(Francois-Joseph Fetis)라는 사람은 탈버그의 아버지가 M. D라는 이니셜을 쓰는 공자(왕족)이며 어머니는 W라고 하는 남작부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탈버그가 거의 60세기 되던 때인 1871년에 탈버그의 어머니는 Wetzlar(베츨라) 남작부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츨라 남작부인은 탈버그가 자기 아들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남작부인은 그가 끼고 있던 반지를 사람들에게 보이며 이 반지는 탈버그가 태어나자 탈버그의 아버지가 기념으로 준 것이라고 말했다. 헝가리의 귀족집안 출신인 남작부인은 1820년 바론 폰 베츨라(Baron von Wetzlar)와 결혼하여 베츨라 남작부인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

 

24세 때의 탈버그

                   

탈버그의 아버지와 관련하여 당시 사람들은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Franz Josepf von Dietrichstein) 공자(Prince)이거나 또는 그의 동생 모리츠 디트리히슈타인(Moritz Dietrichstein)백작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1838년 비엔나에서 문제의 두 사람을 모두 만났던 프란츠 리스트는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가 탈버그의 아버지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는 평소에 다른 호칭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프라이헤르 폰 탈버그(Freiherr von Thalberg)로서 공자가 아니라 남작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탈버그의 아버지는 남작이라는 소문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가 탈버그의 아버지일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더구나 탈버그는 비엔나에 머무는 동안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의 저택에서 체류한 일이 있다. 탈버그의 친부(親父)가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하슈타인인지 또는 프란츠 요셉 폰 탈버그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명 폰 탈버그인 폰 디트리히슈타인은 지기스몬트 탈버그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폰 디트리히슈타인은 친구들에게 탈버그를 자기의 저택에서 함께 지내게 되어 ‘행복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탈버그의 출생기록부에 적혀 있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인 포르투네(Fortunée)는 ‘행복’이라는 의미이다. 폰 디트리히슈타인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포르투네를 뜻함)과 결혼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1797년에 알렉산드리네 슈봐로브 백작부인(Alsexandrine Grafin Schuwalow)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3년후인 1812년에 탈버그가 태어났다.

 

40대의 탈버그

                        

탈버그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탈버그 연구자들에 따르면 탈버그는 10세 때에 어머니와 함께 제네바에서 비엔나로 왔다는 것이다. 프란츠 리스트도 10세 때에 칼 체르니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위해 부모와 함께 헝가리의 라이딩이라는 마을에서 비엔나로 왔다. 한편, 다른 기록에 의하면 탈버그는 1824년(12세 때)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에서 열린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의 초연에 참석했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탈버그가 12세부터는 비엔나에 살았다는 것이다. 탈버그는 체르니 또는 요한 네포무크 훔멜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 역시 근거는 없다. 더구나 체르니의 회고록에는 탈버그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탈버그 자신도 나중에 자기가 체르니 또는 훔멜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일은 없다고 말했다. 대신에 탈버그는 비엔나 궁정오페라의 제1 바쑨주자인 아우구스트 미타그(August Mittag)로부터 피아노를 배웠다고 말했다는데 이는 농담일 가능성이 많다. 바쑨 주자가 나중에 피아노의 거장인 된 탈버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탈버그의 어머니라고 하는 베츨라 남작부인은 탈버그의 어린 시절을 거의 함께 보냈다. 그런데 베츨라 남작부인은 아마추어이지만 대단한 실력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러므로 탈버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뭐 그다지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적어 보았다.

 

탈버그는 14세 때인 1826년 런던에서 이그나스 모셀레스(Ignaz Moscheles)라는 사람으로부터 피아노를 잠시 배웠다는 기록은 있다. 멘델스존의 친구인 모셀레스는 나중에 멘델스존에게 보낸 편지에서 ‘탈버그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가르침이 필요 없다’라고 썼다. 탈버그는 이듬해인 1827년, 15세의 소년으로 비엔나에서 첫 공식 연주회를 가졌다. 훔멜의 협주곡 B 단조였다. 너무나 훌륭한 연주였기 때문에 이후 탈버그는 여러 콘서트에 초청을 받았다. 탈버그는 주로 훔멜과 베토벤의 협주곡을 연주했다. 탈버그는 16세 때에 첫 작품을 출판했다. 베버의 ‘오이리안테 멜로디에 의한 환상곡’이었다.

 

56세의 탈버그

                

1830년, 탈버그가 18세일 때 그는 비엔나에서 쇼팽과 멘델스존을 만났다. 두 사람은 탈버그의 피아노 연주 기술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탈버그는 실로 뛰어난 테크닉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다. 그해에 탈버그는 라이프치히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자기가 작곡한 협주곡 5번과 환상곡을 연주했다. 바로 이틀전, 탈버그는 10세의 어린 소녀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비크(Clara Wieck)와 함께 훔멜의 ‘네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했다. 클라라의 아버지는 탈버그의 연주에 대하여 Sehr fertig(매우 열심이었다는 뜻이지만 대단히 완성되었다는 의미도 있음)라고 말했다. 1835년 탈버그는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음악원 콘서트에 참가했다. 그가 작곡한 대환상곡(Grande fantaisie)을 연주했다. 콘서트에 참석한 로시니와 마이에르베르 등 여러 저명인사들은 탈버그의 훌륭한 작품과 뛰어난 테크닉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쇼팽은 감정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의 이름난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모셀레스(Moscheles), 칼크브렌너(Kalkbrenner), 쇼팽, 리스트, 헤르츠(Herz)....모두 위대한 예술가들이다. 그러나 탈버그는 새로운 예술의 창조자이다. 그러므로 그의 이전에 존재하였던 것들과 어떻게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다. 탈버그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지만 또한 대단히 훌륭한 작곡가이기도 하다.’

 

1836년, 탈버그는 24세 때에 파리에서 처음으로 독주회를 가졌다. 센세이셔널한 성공이었다. 탈버그는 1만 프랑의 수입을 기록했다. 지금까지 단 1회의 콘서트로서 이만한 수입이 있었던 피아노의 거장은 없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자기 자신이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피아노 거장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탈버그의 성공을 계속 듣자 애인인 마리 다구(Marie d'Agoult)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 자신이 마치 추방당한 나폴레옹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썼다. 이듬해인 1837년 파리의 음악평론지인 Revue et Gazette musicale는 탈버그의 연주에 대한 리스트의 평론을 게재했다. 리스트는 ‘탈버그의 모든 음악은 완전히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이로써 그는 많은 친구들을 잃었지만 대신에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 잡지의 편집장은 리스트의 평론 말미에 ‘Revue et Gazette musicale의 견해는 리스트의 견해와 다를 수 있으며 리스트의 주장에 대하여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추가하였다. 리스트의 탈버그에 대한 라이벌 의식은 두 사람의 지지자들에게까지 번졌다.

 

1837년 탈버그가 파리에서 두 번째 콘서트를 가졌을 때 리스트 지지자들과 탈버트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다툼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리스트 지지자들 때문에 탈버그 콘서트의 티켓은 판매에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평소 리스트와 탈버그의 관계는 항상 점잖고 예의바른 것이었다. 그러한 리스트였는데 나중에는 ‘파리에는 탈버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다. 탈버그는 나보다 더 성공했다.’고 털어놓으면서 솔직히 탈버그가 자기보다 더 뛰어나다는 점을 은근히 인정하였다. 리스트는 심지어 자기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Tohuwabohu von Gefühlen(토후봐보후 폰 게휠렌: 정서의 완전한 혼돈)이었다고 말했다. 1837년 파리를 방문한 체르니는 한때 자기의 제자였던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저처럼 형편 없을수가 없다면서 놀랬다고 한다. 나중에 체르니는 리스트에게 ‘탈버그를 본받아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탈버그는 런던, 브뤼셀 등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1839년 2월, 탈버그는 생전 처음으로 리스트의 콘서트에 참석하여 그의 연주를 들었다. 연주회가 끝난후 탈버그는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이런 연주는 처음 들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이것도 연주라고 했는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평상시에는 서로 친분을 과시하며 지냈다. 어느때 탈버그는 리스트를 만찬에 초대하였다. 그 자리에는 탈버그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모리츠 디트리히슈타인(Moritz Dietrichstein)공자도 참석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리스트는 비엔나에서 탈버그의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와 모리츠 디트리히슈타인 공자(백작)를 모두 만나 교분을 가졌다. 결과, 리스트는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가 탈버그의 친부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건 그렇고 모리츠 디트리히슈타인 공자는 리스트를 초청한 탈버그의 만찬에 참석하여 ‘오늘 나는 캬스토(Castor)와 폴룩스(Pollux)를 함께 만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다’고 말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캬스토와 폴룩스’는 뜨거운 우정의 표본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장-필립 라모는 ‘캬스토와 풀룩스’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후 리스트와 탈버그는 몇차례의 마찰이 있었지만 결국 리스트는 ‘나는 탈버그에 비해 2등이다. 그래도 공동우승을 차지했으면 좋겠다’고 털어 놓아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1838년 가을, 탈버그는 슈만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슈만은 비엔나에 정착할 생각으로 비엔나를 방문했다. 슈만은 출판가인 하슬링거(Haslinger)를 만나 그가 주관하는 Neue Zeitschrift fur Musik(신음악지)의 출판을 협의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듣지 못했다. 이 때에 슈만은 탈버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탈버그는 쇼팽, 케쓸러(Kessler),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의 연습곡들을 순전히 암기하여 연주했다. 탈버그는 베토벤, 슈베르트, 뒤세크(Dussek)의 작품들과 슈만의 Kreiskeriana를 초견으로 연주했다. 탈버그는 그가 작곡한 로시니의 ‘호수의 여인(La Donna del Lago)의 주제에 의한 환상곡'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슈만은 이같은 탈버그의 연주를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슈만은 신음악지에 새로 나온 탈보그의 연습곡 26번을 소개하며 ‘탈버그는 피아노 앞에 앉으면 신과 같다.’고 썼다.

 

탈버그의 테크닉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이른바 엄지-멜로디(Thumbs-melody)라는 것으로 모든 피아니스트들의 꿈이나 마찬가지인 연주기법이다. 간단히 말하여 멜로디를 엄지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것이다. 리스트는 탈버그가 성공할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엄지-멜로디였다고 말할 정도로 탈버그의 테크닉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리스트도 그 테크닉을 마스터하였다. 1840년 4월 리스트는 파리의 살롱 에라르(Salons Erard)에서 그가 작곡한 대연습곡(Grandes Etudes)의 A 플랫장조 연습곡, 오페라 ‘람메무어의 루치아’의 피날레 안단테 변주곡,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편곡의 멜로디를 엄지손가락으로 연주하여 자기도 엄지-멜로디를 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랑스에서 탈버그의 인기는 언제나 최고였다. Revue et Gazette musicale의 평론가는 앙리 블랑샤르(Henri Blanchard)는 탈버그를 옥타비아누스 황제(가이사 아구스도) 또는 나폴레옹과 같은 인물이라고 언급하며 극찬했다. 2년후 탈버그의 두 번째 프랑스 순회연주가 끝나자 블랑샤르는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찬사를 보냈다. 그는 탈버그가 100년 이내에 성인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말하고 그때에는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성탈버그(St Talberg)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든지 간구하게 될것이라고 예언했다. 베를리오즈가 기록에 남긴 것을 보면, 두 번째 순회연주의 마지막 무대에서는 어떤 사람이 무대 위에 황금 왕관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탈버그를 피아노의 황제로 여겼던 것이다.

 

탈버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1843년 7월, 탈버그는 31세 때에 프란체스카(Francesca)라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체키나(Cecchina)라는 애칭의 프란체스카는 파리 이탈리아극장의 콘트라베이스 수석주자인 루이지 라블라슈(Luigi Lablache)의 큰 딸이었다. 당시 탈버그는 미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혼하게 되어 미국을 가는 대신에 이탈리아에 가서 이듬해 봄까지 지냈다. 탈버그는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오페라에 관심을 두어 Florinda(플로린다)와 Cristina Di Svezia(스베치아의 크리스티나)라는 두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하지만 실패였다. 탈버그는 미국행을 실현키로 했다. 그리하여 1856년 10월 3일, 뉴욕에 도착했다. 탈버그는 미국에서 처음 들어보는 완벽한 테크닉의 거장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미국에서 탈버그의 인기는 글자그대로 대단했다. 8개월동안 연주여행을 다녔다. 1주일에 5-6회의 연주회를 가졌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세번의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당시 일요일에는 종교음악만을 연주하도록 되어 있었다. 탈버그는 로시니의 오페라 ‘모세’의 아리아를 편곡한 모세환상곡, 마틴 루터가 작곡한 ‘내주는 강한 성이요’가 주제곡으로 나오는 오페라 ‘위그노’의 주제를 편곡한 위그노환상곡을 연주했다.

 

탈버그는 미국에서 80여개 도시를 방문하여 320여회의 정규콘서트를 가졌다. 이어 캐나다에서는 20여회의 콘서트를 가졌다. 이외에도 그는 수천명의 어린 학생들을 위한 무료콘서트를 20회 이상 가졌다. 1857년부터는 바이올리니스트 앙리 뷰땅(Henri Vieuxtemps)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다. 두 사람은 주로 베토벤의 작품과 탈버그가 작곡한 듀오를 연주했다. 탈버그는 미국 순회연주를 통해 많은 수입을 올렸다. 안톤 루빈슈타인과 이그나즈 파데레브스키를 훨씬 능가하는 수입이었다. 탈버그는 매 콘서트마다 평균 500불 이상의 연주료를 받았다. 그리하여 두 개 시즌에 약 15만불의 수입을 올렸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3백50만불에 이르며 한국 돈으로는 약 50억원이 된다.

 

1858년 6월, 탈버그는 시카고에서 3회의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었으나 급히 유럽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1회의 콘서트밖에 가질수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1회의 콘서트도 가지지 않았다. 부인 프란체스카가 갑자기 유럽에서 미국을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탈버그가 미국에서 가깝게 지내던 소프라노 엘레나 당그리(Elena d'Angri)와 불화가 생겨 그 문제 때문에 부인이 급히 왔다는 소문이었다. 실은 두 달 전인 그해 4월, 엘레나 당그리는 뉴욕에서 딸을 낳았다. 탈버그의 딸이라는 얘기였다. 딸의 이름은 차레 탈버그(Zare Thalberg)였다. 차레는 나중에 성악을 공부하여 소프라노로서 활동했다. 차레는 1875년, 17세의 나이로 런던의 왕립 이탈리아오페라극장에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체를리나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였다. 그런데 탈버그의 딸이라는 차레는 뉴욕이 아니라 영국의 더비셔에서 태어났으며 진짜 이름은 에텔 웨스턴(Ethel Western)이라는 얘기도 파다했었다. 갑자기 미국을 찾아온 탈버그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탈버그와 함께 곧바로 유럽으로 돌아갔다. 아마 프란체스카의 친정아버지인 라블라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도 있었지만 탈버그의 생부라고 하는 프란츠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가 세상을 떠났고 상속문제가 걸려 있어서 급히 유럽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가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탈버그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분명치 않지만 일반적으로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라고 믿고 있었다.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에게는 적자가 한명 있었다.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 공자였다. 공자의 호칭은 세습되는 것이었다. 1854년 아버지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이 세상을 떠나자 자연히 공자의 타이틀은 적자인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4년후에 그 역시 세상을 떠났다.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에게는 딸이 네명이나 되었지만 아들은 없었다. 한편,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에게는 두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큰 동생인 요한 칼(Johann Carl)은 이미 1852년에 아무런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둘째 동생인 모리츠(Moritz)에게 작위가 돌아가야 할 입장이었지만 이미 당시에 나이가 77세여서 곤란했다. 그리고 둘째 동생인 모리츠에게는 아들 모리츠 요한(Moritz Johann)이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Prince)의 타이틀을 만일77세의 모리츠 폰 디트리히슈타인에게 상속한다면 그럴수는 있지만 연로한 그가 더 이상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공자의 타이틀은 더 이상 상속이 되지 않고 그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우리의 위대한 피아니스트 지기스몬트 탈버그가 강력한 후보자가 될수 있었다. 물론 지기스몬트에게는 아직 아들이 없었지만 그래도 젊으므로 언젠가는 후사를 볼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탈버그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급히 미국으로 와서 남편과 함께 유럽으로 돌아간 것은 바로 이러한 상속문제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다. 탈버그가 공자라는 타이틀을 상속받는다면 많은 재산도 상속받을수 있기 때문에 이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공자의 타이틀은 결국 프란츠 요셉 폰 디트리히슈타인의 큰딸 알렉산드리네와 결혼한 알렉산더 콘스탄틴 알버트(Alexander Constantin Albert)에게 돌아갔다.

 

탈버그는 평소에 계획했던 브라질 연주를 실행키로 했다. 그는 1863년 브라질 연주를 끝으로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탈버그는 나폴리음악원의 교수를 맡아 달라는 제안이 있어서 의향이 있었지만 이탈리아인이 아니면 안된다는 규정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탈버그는 여생을 마칠 때까지 바흐의 ‘평균율’ 교본과 클레멘티의 ‘파르나쑴에 오르는 계단’(Gradus ad Parnassum) 교본을 저술했다. 그는 1871년 4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유명 작곡가들의 친필 서명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리하여 바흐, 헨델,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베르트, 심지어 리스트의 친필 서명을 수집하여 남겼다. 탈버그가 세상을 떠나자 부인이 이들 친필 서명을 모두 팔아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