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ktor Ullmann(빅토르 울만)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태인 작곡가
빅토르 울만
빅토를 울만은 1898년 1월 1일, 당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테센(Teschen)에서 태어나 1944년 종전을 얼마 앞둔 1944년 10월 18일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였다. 그가 태어난 테센은 현재 체코공화국의 체스키 테신(Cesky Tesin)과 폴란드의 치에친(Cieszyn)으로 갈라진 지역이다. 울만의 부모는 모두 유태인이었다. 그러나 울만은 태어난 후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비유태인 사회에 동화된 유태인으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군의 장교였으며 1차대전 중에 이룬 혁혁한 전공으로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귀족의 타이틀을 받았다. 어릴 때 테센에서 음악의 도시이며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옮겨온 울만은 소년시절부터 사람들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크게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10대의 소년시절에 이미 아놀트 쇤베르크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빅토르 울만의 교향곡 1, 2번과 6개의 가곡 음반
비엔나에서 김나지움(고등학교)을 마친 그는 군대에 자원입대하였다. 그는 1차대전 중에 이탈리아 전선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전선이 소강상태에 머물자 당국의 허가를 받아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울만은 작곡에 뜻을 두고 쇤베르크로부터 정식으로 대위법과 관현악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울만은 피아노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피아니스트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울만은 비엔나의 쇤베르크의 문하를 떠나 더욱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위해 프라하로 갔다. 체코 출신인 울만은 프라하에서 체코음악의 정신을 배우고자 했다. 프라하에서 공부할 때에 그를 후원해준 사람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였다. 울만은 쳄린스키의 도움으로 프라하의 신독일극장(현재의 프라하국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울만은 프라하에서 1927년까지 있다가 엘베강변의 아우씨히(Aussig)라는 도시의 오페라 단장으로 임명되어 자리를 옮겼다. 울만은 아우씨히에서 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크레네크(Krenek)의 오페라를 시도했으나 아직도 시골이어서 그런 오페라를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아 결국 아우씨히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틀란티스의 황제
울만은 1923년 Sieben Lieder mit Klavier(피아노 반주의 일곱 가곡)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드디어 작곡가로서 발돋움을 한 것이었다. 울만의 활동은 193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그는 2년동안 취리히오페라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울만은 특이하게도 인지학(Anthroposophy: 人知學)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인지학이란 일정한 자기 훈련에 의하여 정신세계가 직관적으로 관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2년동안 슈투트가르트의 어떤 서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가 득세하기 시작하자 유태인인 그는 더 이상 슈투트가르트에 머물수 없었다. 그는 1933년 중반, 프라하로 돌아와 음악교사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울만은 프라하에 머무는 동안 체코라디오방송국의 음악부서에도 근무했으며 보헤미아신문사의 음악평론 담당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음악교육협회의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여러 교육기관을 순방하며 강연을 하였으며 개인 레슨도 하며 지냈다. 그는 보헤미아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시기에 울만은 작곡가 알로이스 하바(Alois Haba)와 친분을 맺게 되어 프라하음악원에 있는 하바의 음악부서에 등록하여 2년동안 공부를 했다. 울만의 작품을 시대적으로 보면 1920년대에는 쇤베르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으나 1935년 이후의 작품은 독립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페라 '아틀란티스의 황제'의 한 장면
1942년 9월 8일 나치는 울만을 유태인 퇴폐작곡가라는 이유로 체포하여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그가 강제수용소로 보내질 때까지 그의 작품번호는 41번을 기록하였다. 그중에는 피아노 소나타, 연가곡,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등이 포함되어 있다. 피아노협주곡 작품번호 25번은 독일군이 프라하를 점령한지 9개월 후인 1939년 12월에 작곡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작품의 악보들은 기록에만 남아 있을뿐 독일군 점령하에서 실종되었다. 다행히 악보가 남아 있는 것은 13개 작품으로 울만이 개인적으로 친구에게 부탁하여 악보를 보관토록 했기 때문에 남아 있을수 있었던 것이다. 테레지안슈타트 수용소의 사정은 그다지 참혹하지는 않았다. 울만은 비록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었지만 음악활동을 계속할수 있었다. 피아노반주를 했으며 콘서트를 조직했다. 울만은 같은 수용소에 수감된 카렐 안체를(Karel Ancerl)등 여러 음악하는 사람들과 연합하여 Collegium musicum(신음악스튜디오)라는 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1944년 10월 16일 울만은 나치의 최후의 인종청소 정책에 따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로 이송되어 이틀 후인 10월 18일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 울만이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작곡한 작품들은 대체로 보관되어 전쟁이 끝나자 빛을 보게 되었다. 합창곡, 연가곡, 여러 편의 무대음악 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울만의 마지막 작품인 세편의 피아노 소나타, 현악4중주곡, 릴케의 시 Cornet에 의한 멜로드라마, ‘아틸란티스의 황제’(Der Kaiser von Atlantis 또는 Die Tod-Verweigerung: 죽음의 불복종)라는 실내오페라 등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이었다. ‘아틸란티스의 황제’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1944년 가을에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나치 친위대 사령관이 아틸란티스의 황제가 아돌프 히틀러를 비유한 것이라고 보고 공연을 금지했다. ‘아틸란티스의 황제’는 1975년 암스테르담에서 초연되었다. 이 공연은 BBC를 통해 전영국에 방송되었다. 이후 여러 나라에서 이 오페라를 공연하였으며 독일에서는 1990년에 가서야 브레멘과 슈투트가르트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아틀란티스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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