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Erich Zeisl(에리히 자이슬)

정준극 2009. 6. 10. 23:37

Erich Zeisl(에리히 자이슬)

시대에 타협하기 어려웠던 작곡가

 

 

비엔나의 유태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에리히 자이슬(1905-1959)은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불과 14세 때에 비엔나음악원의 조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그 때에 이미 첫 번째 가곡을 발표했다. 작곡가로서 그의 위치를 확실히 해준 것은 29세 때인 1934년에 발표한 진혼곡이었다. 그러나 진혼곡은 유태인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출판조차 되지 못하였다. 몇 년후인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노골적으로 확대되었다. 나치는 자이슬을 ‘금지작곡가’로 규정하였다. 자이슬은 나치의 박해를 피하여 파리로 갔다가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잠시 파리에 있을 때 오페라 Hiob(욥)의 작곡에 착수하였다. 미국에 간 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나 과중한 업무로 인하여 건강이 악화될 지경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Lassie Come Home(1943), 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1946: 우편배달부는 두 번 종을 울린다), Abbot and Costello Meet the Invisible Man(1951: 애보트와 코스텔로가 투명인간을 만나다)의 음악을 작곡했다.

 

영화 '우편배달부는 종을 두번 울린다' 포스터 

 

자이슬의 스타일을 기본적으로 음조(Tonal)음악이었지만 쇤베르크 등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작곡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비교적 보수적이었다. 그러므로 영화음악에 거의 합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느때 그는 차이코브스키의 생애를 그린 ‘무언가’(Song Without Words)라는 영화의 음악을 편곡해야 했다. 영화 ‘무언가’는 오페레타 스타일이었다. 제작자는 영화의 효과를 위해 음악을 무조건 간략하게 편곡하도록 요청했다. 자이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주문이었다. 이로부터 그는 작곡가의 역할에 대하여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나치를 피하여 미국에 온 작곡가들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요(Milhaud), 스트라빈스키, 탄스만(Tansman)과 같은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지 못한 작곡가들은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고 힘든 생활을 했다. 예를 들면 벨라 바르토크이다. 그는 뉴욕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기아에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작년에 차이코브스키에 대한 오페레타를 편곡했다. 8개월이란 기간을 소비했다. 그런데 왜 차이코브스키의 생애를 오페레타로 만들어야 하는가? 미국에서는 어떠한 작곡가도 중요하지 않다’고 썼다.

 

말년에 자이슬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수 있었으며 이로써 자기 스타일의 작곡을 할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탄생한 작품들은 실내악, 피아노협주곡, 첼로협주곡, 합창곡, 독창곡 등이었다. 에브라이코 진혼곡(Requiem Ebraico: 히브리진혼곡)은 시편 92편을 바탕으로 히브리어로 작곡한 것이다. 자이슬은 195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히브리진혼곡’은 2006년 이스라엘에서 주빈 메타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자이슬은 발레곡을 몇편 남겼다. Pierrot in der Flasche(병속의 피에로), Uranium 235(우라늄 235), Naboth's Vineyard(나봇의 포도원), Jacob und Rachel(야곱과 라헬)이다. 오페라를 단 한편을 남겼다. Leonce und Lena(레온스와 레나)이었다. 오페라 Hiob(욥)은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유태인으로서의 긍지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