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naz Brull(이그나즈 브륄)
비엔나 음악계의 대부
모라비아의 민속춤
이그나즈 브륄(1846-1907)은 모라비아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였다. 그는 모라비아 프로스니츠(Prossnitz)마을의 유복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륄은 4세 때에 가족과 함께 고향 모라비아를 떠나 비엔나로 왔다. 이후로 비엔나는 브륄의 생활과 음악활동의 중심지였다. 브륄은 원래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아야 했다. 그러나 음악적 재능을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는 주위의 말에 따라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피아노를 당대의 피아노 교사인 율리우스 엡슈타인(Julius Epstein)에게서 받았으며 작곡은 펠릭스 오토 데소프(Felix Otto Dessoff)와 요한 루피나챠(Johann Rufinatscha)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브륄은 14세 때에 안톤 루빈슈타인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일이 있다. 루빈슈타인은 브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힘입은 브륄은 평생을 음악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1864년, 브륄은 18세의 약관으로 첫 오페라를 작곡했다. Die Bettler von Samarkand(사라므칸드에서 온 거지)였다. 뷔르템부르크 왕국의 수도인 슈투트가르트에서 2년후인 1866년 초연키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브륄은 오페라의 악보를 미리 슈투트가르트 극장에 보냈다. 그러나 그가 1866년 슈투트가르트에 가서 보니 오페라 악보가 사라졌다. 오페라 공연은 취소되었고 브륄의 첫 오페라는 타이틀만 남아 있을뿐 어떤 음악인지는 알수 없게 되었다. 브륄은 공연일에 무대에서 피아노를 대신 연주하여 갈채를 받았다. 이후 브륄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피아노연주회를 가졌다. 프라하, 베를린, 브레슬라우, 뮌헨, 프랑크푸르트,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등에서 연주회를 가졌으며 심지어 합스부르크제국의 변방도시까지 찾아가 연주회를 가졌다. 1871년 베를린의 슈테른음악원은 그에게 교수자리를 제시했다. 슈테른음악원은 당대에서 훌륭한 음악원으로 이 곳의 교수가 되는 것은 특권이었다. 그러나 브륄은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가족과 떨어져 지낼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신에 그는 1872년부터 비엔나의 호락(Horak)피아노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호락피아노학교는 비엔나에 있는 사립음악학교 중에서 가장 훌륭한 기관이다. 9년 후인 1881년 브륄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브륄의 첫 번째 오페라는 불행하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두 번째 오페라인 Das goldene Kreuz(황금십자가)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875년 12월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로서 그는 당대의 작곡가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와 함께 그는 피아니스트로서도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영국 런던에 있는 챠펠(Chappell) 출판사는 1878년에 브륄을 초청하여 두 번에 걸친 피아노 연주회를 갖기로 계약을 맺었다. 동시에 런던의 오페라 기획사는 Das goldene Kreuz의 런던 초연을 기획하고 있었다. 1878년 1월 브륄은 런던에서 Monday Popular Concert(월요 인기콘서트)라는 타이틀의 연주회로서 데뷔하였다. 그리고 3월에는 ‘황금십자가’가 아델피(Adelphi)극장의 무대에 올려졌다. 브륄의 인기는 런던의 하늘까지 올라갔다. 더구나 브륄은 리버풀, 만체스터와 같은 지방도시를 방문하여 ‘월요 인기콘서트’를 가져 놀라운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서의 피아노 순회연주 시대가 브륄 음악경력의 정상을 기록해주는 것이었다. 영국 연주 이후 브륄은 연주회를 거의 갖지 않고 작곡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결혼한 것도 그 당시였다. 브륄은 1882년 비엔나의 유력한 은행가의 딸인 마리 쇼스버그(Marie Schosberg)와 결혼하였다. 아내인 마리 역시 유태계통이었다.
생활에 여유가 있었던 브륄의 자택은 비엔나 사교모임의 중심지였다. 브륄은 여러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브람스, 칼 골드마크, 율리우스 엡슈타인, 로베르트 푹스, 안톤 도르(Anton Door), 리하르트 노이버거(Richard Neuberger), 루드비히 로텐버그, 리하르트 폰 퍼거(Richard von Perger), 유제비우스 만드체브스키(Eusebius Mandyczewski), 에두아르트 한스리크(Eduard Hanslick), 구스타브 말러, 테오도르 빌로트(Theordor Billroth), 요셉 브로이어(Joseph Breuer)등이 브륄의 집을 드나들며 교분을 가졌다. 브륄은 아터제(Attersee) 호반의 운터라흐(Unterach)에도 버그호프(Berghof)라는 여름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역시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작곡가로서 브륄의 작품은 그가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던 당시의 스타일을 고수하였으며 새로운 개발에 동조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시대의 발전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세 생일에 즈음하여 각계로부터 뜨거운 치하를 받았다. 브륄은 60세 생일을 마지한지 몇 달후인 1907년 9월 뜻밖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의 신실하고 권위 있는 작품세계와 생애에 대하여 애도를 표시했다. 오페라 ‘황금십자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몇십년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가 나치가 유태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금지함으로서 더 이상 무대에 올라가지 못했다. 2007년, 브륄 서거 1백주년을 맞이하여 브륄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의 작품들이 CD로서 출반되기 시작했다. 교향곡 31번, 세레나데 제1번, 맥베스 서곡, 바이올린 협주곡 A 단조 등은 특히 사랑을 받았다. 그의 피아노 작품들도 취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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