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naz Moscheles(이그나즈 모셀레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이삭) 이그나즈 모셀레스(1794-1870)는 오스트리아제국의 보헤미아 출신인 작곡가 겸 피아노의 거장(Virtuoso)이었다. 그는 주로 런던에서 활동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의 뒤를 이어 라이프치히음악원장으로 활동했다. 멘델스존은 모셀레스의 친구 겸 피아노 제자였다. 모셀레스의 생애와 경력에 대하여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모셀레스와 멘델스존이 주고받은 편지에 당시의 여러 상황이나 개인적은 얘기가 들어 있어서 귀중한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리드(Leeds)대학교에 보존되어 있는 모셀레스와 멘델스존의 서한들은 1888년 모셀레스의 아들인 펠릭스가 정리하여 출판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펠릭스 모셀레스의 대부였다.
모셀레스는 프라하에서 유태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삭 모셀레스였다. 모셀레스의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의 아들 중에서 한 사람 정도는 음악가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던차에 어린 이그나즈 모셀레스가 음악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프라하음악원에 들어간 모셀레스는 지도교수가 모차르트와 바흐, 또는 무치오 클레멘티에 집중할것을 지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베토벤의 피아노곡과 같은 열정적이고 혁명적인 작품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모셀레스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홀로 비엔나로 와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비엔나에서 그는 알브레헤츠버거로부터 음악이론을, 살리에리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이때에 그는 이삭이라는 첫이름을 이그나즈로 바꾸었다. 모셀레스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마침 1814-15년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비엔나회의(Congress of Vienna)가 열리고 있었다. 모셀레스는 회의 참석자들을 위한 모임에 초청을 받아 피아노를 연주했다. 모셀레스는 비엔나에서 가장 뛰어난 피아노의 거장(비르투오소)로 인정을 받았다. 이때에 모셀레스가 작곡한 작품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알렉산더 변주곡’이었다. 나중에 모셀레스는 이 곡을 가지고 유럽 전역을 순회연주하였다. 마이에르베르와 친하게 된것도 프랑스 순회연주 때문이었다. 마이에르베르와 모셀레스가 피아노 듀엣을 연주하는 것은 대단한 화제였다. 모셀레스는 당대의 비르투오소(거장)들인 훔멜, 칼크브렌너, 크라머(Cramer), 헤르츠(Herz), 베버(Weber)와 알고 지냈지만 이들은 사실상 모셀레스의 라이벌들이었다.
비엔나에 돌아와서 지낼 때에 모셀레스는 그의 우상인 베토벤을 만날 수 있었다. 베토벤은 젊은 모셀레스의 피아노 재능에 대하여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모셀레스에게 오페라 휘델리오의 피아노 스코어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모셀레스로서는 일생일대의 영광이었다. 피아노 스코어를 완성한 모셀레스는 베토벤에게 악보를 전달하기 전에 악보의 말미에 Fine mit gottes Hülfe(하나님의 도움으로 완성하였다)라고 썼다. 베토벤은 모셀레스의 피아노 스코어를 흡족하게 받아 들였다. 다만, 악보의 끝부분에 O Mensch, hilf dir selber(이 사람아, 자네 스스로 하게나)라고 토를 달았다. 모셀레스는 유태교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그는 비엔나의 유태인 콤뮤니티를 위해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도 했다. 그는 전생애를 통하여 유태계 음악가들과 깊은 친분을 쌓으며 살았다. 예를 들면 펠릭스 멘델스존, 안톤 루빈슈타인, 요셉 요아힘(Joseph Joachim),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 등이다.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도 주로 유태인이었따. 비엔나의 에스켈레스(Eskeles)가족, 파리의 레오(Leo)가족, 영국의 로트쉴트(Rothschild) 은행가 가족등이었다. 모셀레스는 1825년 유태인 은행가의 딸이며 하인리히 하이네와 친척인 샬로테 엠덴(Charlotte Emden)과 프랑크푸르트 시나노그(유태교 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영국에 살면서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것을 인식하여 1832년 부인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이들도 모두 태어나자마자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렇지만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정통 유태교를 신봉하는 프라하의 친척들을 자주 방문하여 유태인으로서의 긍지를 잊지 않도록 했다.
모셀레스는 런던에서 1825-46년동안 살았다. 그러면서 유럽의 곳곳에서 연주회를 가져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어느때 칼스바드(Carlsbad)에서의 연주회 때에는 어린 슈만이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아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모셀레스는 베토벤을 숭모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하거나 지휘했다. 1832년에는 베토벤의 장엄미사곡(Missa Solemnis)의 런던 초연을 지휘했고 이어 쉰들러가 쓴 베토벤 자서전을 영어로 번역했다. 1870년 모셀레스는 라이프치히 게봔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콘서트를 위해 라이프치히에 있었다. 그는 연주회를 9일 남겨두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870년 3월 10일이었다. 그는 생전에 142곡의 작품을 남겼다. 대부분 교향곡이었다. 피아노 작품으로는 8개의 피아노협주곡이 있으며 나머지는 민속음악을 변주곡과 환상곡으로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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