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의 왕, 징슈필의 왕자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라고 하면 우선 ‘가곡(lied)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슈베르트가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하면 ‘그런게 있어? 좀 보자구!’라고 반문하게 된다. 이렇듯 슈베르트는 오페라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다. 슈베르트는 독일 오페라의 프로토 타입인 징슈필(Singspiel)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비록 31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단명 작곡가이지만 약 20편에 이르는 징슈필을 남겼다. 그는 징슈필 이외에도 연극의 부수음악인 인시덴탈 뮤직(Incidental Music)을 여러편 작곡했다. 인시덴탈 뮤직은 연극의 중간에 공연되는 발레의 반주 음악, 또는 연극의 내용을 더 흥미롭게 하기 위해 막간에 연주되는 곡을 말한다. 슈베르트의 여러 인시덴탈 음악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보통 Rosamunde(로자문데)라고 부르는 Rosamunde, Fürstin von Zypern(사이프러스의 공주 로자문데)을 위해 쓴 음악이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슈베르트 묘비
베토벤은 다만 한 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지만 불후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슈베르트의 오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왜 그런가? 슈베르트의 성격 때문인 것 같다. 무게가 있고 줄거리가 복잡한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은 슈베르트 취향이 아니었다. 슈베르트도 몇 막짜리의 오페라를 작곡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다. 작곡을 진행하다가 ‘이런 방향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중단했다. 너무나 많은 악상들이 떠올라서 어떤 것을 사용할지 모를 경우에도 주저주저하다가 단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슈베르트의 오페라는 거의 모두 단막짜리이다. 극장에서는 단막짜리 오페라만을 공연하고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러 편의 단막 오페라를 종합하여 공연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슈베르트는 14세 때에 첫 오페라(징슈필)를 작곡했다. 그 이후 17년 동안 약 20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구스타브 클림트의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슈베르트에 대하여 좀 더 그의 생애와 작품을 살펴본다. 프란츠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비엔나에서 태어나 1829년 11월 19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먼저 그의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공부했으며 그후 로베르트 홀처(Robert Holzer),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로부터 배웠다. 10세 때인 1807년 리히텐탈 합창단원의 보이스 소프라노로 들어갔으며 이듬해인 1808년 10월에는 제국합창학교(훗날 비엔나소년합창단)에 들어갔다. 슈베르트가 작곡가로서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인 제국합창학교 시절부터였다. 첫번째로 그의 재능을 보여준 작품은 피아노 2중주로서 1810년의 일이었으니 그가 13세 때였다. 이어 그는 1811-12년 사이에 여러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아울러 Salve Regina와 Kyrie를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1812년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해였다. 그해 11월 슈베르트는 합창학교를 떠나 징병을 피하기 위해 학교 교사로서 일하였다. 2년후인 1814년 7월, 슈베르트는 그의 첫 미사곡인 F 장조를 완성하였다. 이 미사곡은 홀처의 지휘로 리히텐탈 합창단이 연주하였다. 당시 이 미사곡을 들은 평론가들은 다른 어느 작곡가의 작품보다도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입을 모았으며 아마 베토벤의 C 장조 미사에 버금가는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슈베르트는 F 장조 미사의 두번째 연주를 1814년 10월 아우구스틴교회에서 직접 지휘하였다. 그의 형인 페르디난트가 오르간을 연주한 것은 기억할 만한 일이었다.
슈베르트는 1814년에 교향곡을 내놓았으며 이어 Salve Regina를, 그리고 가곡과 기악곡을 작곡하였다. 이듬해인 1815년 슈베르트는 연가곡 '마왕'을 완성하였으며 아울러 G 장조 미사를 만들었다. 당시 슈베르트는 18세의 청년이었다. 18세의 작곡가로서는 놀라운 작품들이었다. 1816년에는 Salve Regina, Stabat Mater, Tantum Ergo, Magnificat 등을 발표하였고 또한 두편의 교향곡을 완성하였으며 여러 편의 아름답고 유쾌한 가곡을 작곡하였다. '아름다운 물방앗집 아가씨'도 이 때에 완성한 것이었다. 슈베르트는 교회 성가대의 지휘자로서도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는 1820년 부활절에 알트레르헨펠더(Altlerchenfelder) 교회에서 미사곡을 지휘한 것은 사람들을 감탄케 남든 것이었다. 그 해에 슈베르트는 '부활절 칸타타'와 오페라(징슈필) 한 편을 작곡하였다. 슈베르트의 전성기는 1821년부터 1824년까지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에 작곡한 '로자문데' 음악과 A 플랫 미사곡은 영원히 기억되는 귀중한 작품이다. 슈베르트라고 하면 우선 떠 오르는 '아베 마리아'는 1825년에 완성한 것이다. 당시 그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헌신의 심정으로 넘쳐 있었다. 1826년에 만든 셰익스피어 주제에 의한 노래들도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대단히 존경하였다. 존경이라기 보다는 경외였다. 1827년 슈베르트는 죽음을 앞둔 베토벤을 방문할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베토벤은 슈베르트를 대단히 칭찬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슈베르트는 정말로 슬픔을 견디지 못하였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운구위원 중의 한 사람으로 묘지까지 따라가 베토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하였다. 베토벤의 장례식 후에 작곡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아마도 베토벤에 대한 애도의 뜻을 깊이 담고 있는 작품이 아니겠느냐는 얘기이다. 1827년 6월, 슈베르트는 비엔나음악협회의 멤버로 선출되었다. 오늘날의 비엔나악우회이다. 이듬해인 1828년 슈베르트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교향곡 C 장조를 완성하였고 이어 한 편의 오라토리오, 성령찬가, 현악4중주곡, Tantum Ergo, 그리고 사랑스러운 베네딕투스를 작곡하였다. 사람들은 베토벤을 존경하는 마음이 작품마다 스며 있다고 말했다.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던 비엔나의 슈봐르츠슈파니어 교구교회를 떠나는 베토벤의 장례행렬. 1827년 3우러 29일의 장례식에는 무려 3만명 이상의 비엔나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슈베르트는 그릴파르처, 체르니 등과 함께 운구위원으로서 만장을 들고 행진하였다.
슈베르트가 사람들 앞에 마지막으로 나선 것은 1828년 11월 3일이었다. 그의 형인 페르디난트가 작곡한 진혼곡을 들으러 간 것이었다. 그로부터 2주일후인 11월 19일, 슈베르트는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의 장례식은 비엔나의 마르가레텐에 있는 작은 교회인 성요셉 채플에서 거행되었다. 그리고 11월 21일 배링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베토벤의 묘지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한달 후인 12월 23일, 슈베르트를 추모하기 위한 모임이 비엔나의 아우구스틴교회에서 열렸다. 이때 안젤름 휘텐브렌너(Anselm
Hüttenbrenner: 1794-1868)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그라츠 출신의 휘텐브렌너 형제(요제프와 안젤름)는 슈베르트의 친구이면서 베토벤과도 대단히 가까운 사이였다. 안젤름 휘텐브렌너는 베토벤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슈베르트가 '미완성교향곡'을 미완성인채 휘텐브렌너에게 전달했다는 것도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배링공동묘지에 있던 슈베르트의 유해는 역시 베토벤의 유해와 함께 1888년 9월 23일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로 이장되었다. 슈베르트는 중앙공동묘지에서도 베토벤과 가까운 곳에 안장되었다.
슈베르트와 휘텐브렌너 형제(왼쪽 요제프 휘텐브렌너, 가운데 안젤름 휘텐브렌너)
슈베르트는 기록적인 603편의 작품을 남겼다. 슈베르트의 작품은 사실상 슈베르트 생존시에는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리스트, 슈만, 멘델스존 등이 연주를 통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어 차츰 새로운 인식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놀랍도록 천재적인 작품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30년후 부터였다.
슈베르티아데가 처음 열린 팔라스트 호에넴스(호에넴스 궁전)
[슈베르트의 무대작품]
- Der Spigelritter(거울의 기사) 3막의 징슈필. 1811년에 서곡과 1막의 일부분만 완성. 미완성 작품을 1946년 12월 11일 라디도 베로뮌스터(Radio Beromuenster)에서 초연
- Des Teufels Lustschloss(악마의 욕망성) 3막의 마법오페라(Zauberoper). 아우구스트 폰 코체뷔(August von Kotzebue)의 '트레오가테의 요셉 마리 로아이젤'(Joseph-Marie Loaisel de Treogate)를 바탕으로 1813-14년에 작곡. 1978년에 포츠담의 한스 오터 극장에서 초연
- Die vierjahrige Posten(4년간의 직무) 1막의 징슈필. 1815년 작곡. 1896년 드레스덴 호프오퍼에서 초연
- Fernando(페르난도) 1막의 징슈필. 알베르트 슈타들러(Albert Stadler) 원작. 1907년 4월 모처에서 초연
- Die Freunde von Salamanka(살라만카의 친구) 2막의 징슈필. 요한 마이르호퍼(Johann Mayrhofer)원작. 1815년에 작곡. 1928년 5월 6일 독일 할레시립극장 초연. 1929년 비엔나에서 콘서트 형식 연주. 1928년 G Ziegler 가 대본 수정.
- Die Burgerschaft(시민) 3막의 오페라. 그러나 1막과 2막만이 남아 있음. 프리드리히 쉴러의 발라드 Die Burgerschaft를 바탕으로 함. 1816년 작곡. 1908년 비엔나에서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 2005년 야나(Jana)대학교에서 무대공연.
- Adrast(아드라스트) 2막 또는 3막의 서정적 비극(3막은 미완성). 요한 마이르호퍼 원작을 바탕으로 함. 1819-20년에 작곡. 1868년 12월 13일 비엔나 레도우텐잘(Redoutensaal)에서 초연
- Die Zauberharfe(마술 하프) 3막의 멜로드라마 또는 음악을 곁들인 동화연극(Zauberspiel). 게오르그 폰 호프만 원작. 1820년에 작곡. 1820년에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
- Sacontana(사콘타나) 3막의 오페라(그러나 1막과 2막의 스케치만 남아 있음). 요한 필립 노이만(Johann Philipp Neumann)원작. 1820-21년 작곡. 1971년 6월 모처에서 초연.
- Sophie(조피) 오페라. 1821년 작곡. 3곡만 완성.
- Alfonso und Estrella(알폰소와 에스트렐라) 3막의 오페라. 프란츠 폰 쇼버 원작. 1821-22년 작곡. 1854년 봐이마르의 궁정극장에서 초연
- Ruediger(뤼디거) 오페라. 1곡과 2곡과 완성. 1823년에 작곡. 1868년 1월 5일 비엔나 레도우텐잘에서 공연
- Die Verschworenen(음모자) 1막의 징슈필. 이그나즈 프란츠 카스텔리(Ignaz Franz Castelli)의 원작을 바탕으로 함. 1823년 작곡. 1861년 프랑크푸르트 로쓰마르크 코메디언하우스에서 초연
- Fierrabras(피에라브라스) 3막의 역사적 로맨틱 오페라. 요셉 쿠펠뷔저(Joseph Kupelwieser)원작. 1823년 작곡. 1897년 칼스루에 대공궁정극장에서 초연
- Rosamunde(로자문제) 극음악. 헬미나 폰 셰치(Helmina von Chezy)의 연극. 1823년 작곡. 1823년 12월 20일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
- Der Graf von Gleichen(글라이헨 백작) 2막의 로맨틱 오페라(스케치만 되어 있음). 에두아르드 폰 바우에른펠트 원작. 1827-28년 작곡. 1996년 마이닝겐 국립극장에서 초연
- Der Minnesanger(음유시인) 미완성 오페라로서 그나마 분실.
피에라브라스 DVD 표지
- 슈베르트 페스티벌(Schubertiade: Schubert Festival): 오스트리아의 포아아를버그주 슈봐르첸버그/호에넴스(Schwarzenberg/Hohenems)에서 열리는 슈베르트 페스티벌은 슈베르티아데라고 부른다. 세계 제1의 슈베르트 음악제이다. 원래 슈베르티아데(슈베르트의 밤)는 슈베르트가 살아 있을 때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가난한 슈베르트를 돕기 위해 슈베르트의 연주를 듣거나 시작(詩作) 발표회를 가졌던 모임을 말한다. 슈베르트는 친구들이 주선한 이런 모임을 통하여 피아노 연주로서 자기를 돕고 있는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또한 가곡의 가사를 얻기도 했다. 그런 슈베르티아데는 1820년부터 1822년까지 3년 동안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모임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슈베르트 가곡의 뛰어난 바리톤인 헤르만 프라이(Hermann Prey)가 앞장서서 슈베르트 생전 당시의 슈베르티아데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1976년 포아아를버그주의 호에넴스(Hohenems)에서 제1회 슈베르티아데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그러다가 음악회장으로 사용하던 호에넴스의 궁전이 대대적인 수리보수에 들어가자 장소를 인근 펠트키르헤(Feldkirche)로 옮겼다. 펠트키르헤에서는 야외 연주회가 시도되었다. 대자연을 배경으로 갖는 연주회를 란트파르티엔(Landpartien)이라고 부른다. 그후 2001년부터는 슈봐르첸버그(Schwarzenberg)에 있는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fmann: 1741-1807) 기념홀이 확장되자 이곳을 슈베르트 페스티벌(슈베르티아데)의 센터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슈베르티아데는 오로지 슈베르트의 음악만을 연주한다. 매년 약 70회의 연주회가 주선되며 이를 위해 브레겐츠 숲에 있는 슈봐르첸버그에 3만명 이상의 슈베르트 음악 애호가들이 모여든다.
모릿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가 그린 슈베르티아데. 슈베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2011년에 포아아를버그주의 호에넴스에서 열리는 슈베르티아데는 1차로 5월 5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되며 2차로는 10월 2일부터 9일까지 열린다. 슈봐르첸버그에서 열리는 슈베르티아데는 1차가 6월 18일부터 7월 3일까지 열리며 2차가 8월 27일부터 9월 11일까지 개최된다. 두곳에서 열리는 슈베르티아데의 연주회는 대략 70개가 된다. 세계 정상급의 성악가, 실내악단, 피아니스트 들이 참가한다. 축제 기간중에는 저명 음악가에 의한 마스터클라스도 열린다.
슈베르트 음악제(슈베르티아데)가 주로 열리는 슈봐르첸버그의 안젤리카 카우프만 기념홀. 안젤리카 카우프만(1741-1807은 슈봐르첸버그에서 태어난 뛰어난 고전주의 화가였다.
화가 안젤리카 카우프만 자화상. 그의 고향인 슈봐르첸버그에는 그를 기념하여 연주회장을 건립하였다. 안젤리카 카우프만 기념홀로서 매년 이곳에서 슈베르트 음악제(슈베르티아데)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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