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화가와 조각가

프리드리히 폰 아메링(Friedrich von Amerling)

정준극 2009. 6. 14. 00:39

프리드리히 폰 아메링(Friedrich von Amerling)

 

프리드리히 폰 아멜링(1803-1887)은 오스트리아 제국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인물화 화가였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와 가족그림을 그렸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오스트리아제국의 초대 황제인 프란시스1세(프란시스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초상화이다. 현재 비엔나 미술사박물관 소관의 제국보물전시관(샤츠캄머)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인물화는 대체로 매우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것들이다. 물론 당시에 귀족들의 모습을 그릴 때에 약간 이상하게 생겼더라도 기왕이면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신상에 좋으므로 되도록이면 아름답게 그렸던것 같다. 그는 약 1천점의 초상화(인물화)를 남겼다. 

 

'슬픔에 젖어'(Im Traumen Versunken)

 

비엔나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프리드리히 아멜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은세공가인 프란츠 아멜링이었다. 프리드리히 아멜링은 합스부르크 왕실에 기여한 공적으로 기사(Ritter)작위를 받았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리터 폰 아멜링이 되었지만 그냥 프리드리히 폰 아멜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친숙하게 되었다. 그는 55세 때에 비엔나 근교의 굼펜도르프 성(Schloss Gumpendorf)를 획득하여 자기 취향대로 멋을 부려 장식했다. 현재의 아멜링슐뢰쓸(Amerlingschloessl)이다.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에는 그의 기념상이 있다. 1902년에 봉헌된 것이다. 1887년 세상을 떠난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저명인사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묘비는 유명한 조각가인 요한네스 벤크(Johannes Benk)가 만든 것이다. 요한네스 벤크는 슈타트파르트의 아멜링 기념상도 제작하였다. 비엔나의 아멜링슈트라쎄(Amerlingstrasse)는 그를 기려서 붙인 거리이름이다.

 

아멜링은 비엔나예술아카데미에서 미술공부를 했으며 그후에는 프라하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그는 1827-28년을 런던에서 보냈다. 그때 유명한 인물화가 토마스 로렌스 경(Sir Thomas Lawrence)를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아멜링의 스타일이 토마스 로렌스 경의 스타일을 닮은 것은 그러한 연유때문이다. 그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두루 둘러보고 돌아온 그는 1835년부터 1880년까지 궁정화가로서 임명되어 죽어라고 활동했다. 그는 페르디단트 게오르그 봘트뮐러(Ferdinand Gerog Waldmueller)와 함께 19세기 비엔나의 가장 위대한 인물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오스트리아제국 프란시스(프란츠) 1세 황제

 

아멜링은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다니면서 견문을 넓히는 한편 각국 왕족이나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1836년부터 시작된 그의 여행은 세상을 떠나기 1년전까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영국, 그리스, 노르웨이, 스웨덴, 이집트, 팔레스타인까지 였다. 그는 네번이나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 안토니 칼텐탈러는 결혼한지 12년후 세상을 떠났다. 두번째 부인 카타리나 하이쓸러와는 어렵게 이혼했다. 세번째 부인 에밀리 하인리히는 결혼후 23년을 함께 살았지만 세상을 떠났다. 네번째 부인인 마리아 네메츄케(Maria Nemetschke)는 아멜링이 78세의 고령인 1881년에 결혼한 여인으로 이번에는 아멜링이 먼저 요단강을 건너갔다. 그는 평소에 많은 인사들과 친분을 다지면 지냈다. 그의 저택(성)에는 항상 손님들이 그치지 않았다. 아멜링은 프란츠 리스트와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 1948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아멜링의 서거 6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우표를 발간했다. 2008년 3월, 오스트리아 정부는 또 다른 우표를 발간했다. 이번에는 비엔나의 리히텐슈타인 미술과을 기념하는 시리즈로서 아멜링이 그린 리히텐슈타인의 마리 프란치스카 공주의 초상화를 담았다.  

 

동양풍의 여인(Die Ori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