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로마코(Anton Romako)
안톤 로마코는 1832년 비엔나의 아츠거스도르프(Atzgersdorf)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요셉 레퍼(Josef Lepper)의 아들로 태어났다. 로마코의 어머니는 하녀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로마코였다. 사생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머니의 성을 따라 안톤 로마코가 되었다. 그는 15세 때에 비엔나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였으나 그의 선생인 페르디난트 게오르그 봘트뮐러는 로마코가 미술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직업을 고려해 보라고 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코는 미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17세에 뮌헨으로 가서 빌헬름 카울바흐(Wilhelm Kaulbach)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이후 그는 런던, 베니스, 로마 등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비엔나에 돌아온 그는 또 다시 칼 랄(Carl Rahl)로부터 개인 레슨을 받았다. 칼 랄의 작품은 고전주의에 입각한 인물화와 풍경화였다. 로마코는 칼 랄의 스타일을 받아 들였다. 이후 그는 1857년 로마에 정착하여 귀족들이나 로마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엘리자베트 왕비(Kaiserin Elisabeth) - Sissi
1862년 로마코는 로마에서 건축가인 칼 쾨벨(Karl Koebel)의 딸인 조피(Sophie)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1875년 조피가 다른 애인을 따라 로마코를 떠날 때까지 다섯 자녀를 두었다. 아내가 가출한 이듬해에 그는 비엔나로 돌아왔다. 하지만 시대와 사람들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 비엔나의 미술계는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가 주도하고 있었다. 로마코는 마카르트의 스타일에 부응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는 생활을 위해 일부 귀족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근근이 살았다. 그는 헝가리, 이탈리아,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면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생활을 했다. 1887년 그의 두 딸인 마틸데와 마리아가 동반자살을 했다. 로마코는 충격으로부터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그는 비엔나 근교에서 살면서 마치 폐인처럼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두 딸이 자살한지 2년후인 1889년 빈곤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구역에 안치되었다. 1953년 아츠거스도르프의 거리 한곳을 로마코가쎄(Romakogasse)라고 이름 붙였다. 로마코가 태어난 지역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코의 작품인 ‘리사의 전투’(The Battle of Lissa)는 2004년 제작된 20유로 짜리 동전의 배경그림으로 사용되었다.
로마코는 상당히 많은 풍경화를 그렸다. 바비종학파(Barbizon School)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풍경화보다는 인물화와 역사화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비더마이어 계통이었으나 후기 작품은 표현주의 스타일이었다. 당시에 그의 표현주의 작품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0여년이 지난 후부터 새로운 평가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로마코는 링슈트라쎄 시기의 가장 훌륭한 작가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젊은 오스카 코코슈카는 로마코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로마코의 작품은 벨베데레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작품중에서 유명한 것은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린 것이다. 전통적인 초상화와는 다른 괴상한 것이어서 당시에는 배척을 받았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작품은 ‘리싸의 전투’이다. 빌헬름 폰 테게트호프(Wilhelm von Tegetthoff) 제독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제국의 ‘페르디난트 막스’전함이 이탈리아 기함과 충돌하기 직전의 절박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로마코는 폰 테게트호프 제독을 다른 경우에서처럼 영웅으로 그리지 않고 다만 전투에 열중한 평범한 군인처럼 그렸다.
리싸 해전에서의 테게트호프 제독(Admiral Tegettthof in der Seeschlacht bei Li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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