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Egon Schiele) - 2
1914년의 사진
1911년, 쉴레는 21세 때에 17세의 발레리 봘리 노이질(Valerie Wally Neuzil)을 만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발레리는 쉴레의 대담하고 놀랄만한 작품의 모델로 많이 등장하였다. 발레리가 어떤 여인인지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종전에 구스타브 클림트의 모델을 했으며 클림트의 애인 역할도 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쉴레와 발레리는 비엔나의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탈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남부 보헤미아의 크루마우(Krumau: Cesky Krumiov)라는 작은 마을로 도피하였다. 크루마우는 쉴레의 어머니가 태어난 마을이었다. 현재 이곳에는 쉴레에게 헌정된 박물관이 있다. 쉴레의 어머니의 고향이었지만 크루마우의 마을 사람들은 쉴레와 젊은 발레리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이들을 마을에서 추방하였다. 쉴레는 이 마을에서 어린 소녀들을 누드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더구나 마을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쉴레와 발레리는 비엔나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노이렝바흐(Neulengbach)라는 마을로 갔다.
소녀들(Maedchen)
쉴레는 이곳에서 작은 슈트디오를 마련하였다. 비엔나에서와 마찬가지로 쉴레의 슈트디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노이렝바흐의 비행청소년들이었다. 쉴레는 이곳에서도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1912년 4월, 쉴레는 미성년인 소녀를 유혹했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이 쉴레를 체포하기 위해 쉴레의 슈트디오를 찾아 왔을 때 경찰은 슈트디오에서 수백장에 이르는 음란화(포르노) 스타일의 그림들을 발견했다. 쉴레는 감옥에 갇혔고 며칠후 재판을 받게 되었다. 쉴레에 대한 혐의중에서 미성년자 유혹과 납치 혐의는 기각되었지만 미성년자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에 음란물을 두었다는 죄목은 유죄로 인정받았다. 쉴레는 재판 전에 이미 21일 동안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실형을 대신하였다. 쉴레는 감옥에 있는 동안 감옥에서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12장의 그림으로 그렸다.
포옹(The Embrace)
1914년 쉴레는 비엔나 근교의 히칭(Hietzing)으로 거처를 옮겼다. 히칭거하우프트슈트라쎄 101번지였다. 길건너의 집에는 에디트(Edith)와 아델레(Adele)라는 자매가 그들의 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자매의 가정은 개신교였으며 그들의 아버지는 자물쇠공으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15년, 쉴레는 자매중에서 보다 사교적인 에디트와 약혼하였다. 그동안 쉴레에게 충실하였던 발레리 봘리는 쉴레에게 차임을 당하였다. 에디트의 식구들은 쉴레와의 결혼을 반대하였지만 두 사람은 1915년 6월 결혼식을 올렸다. 쉴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히칭거하우프트슈트라쎄 101번지에는 쉴레가 살았었다는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예술가의 부인'(부인인 에디트를 모델로 삼은 것 같음)
1914년에 일어난 제1차 대전은 쉴레의 생활과 작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결혼식을 치룬지 3일후 쉴레는 군에 입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군에 입대한 쉴러는 프라하에 배치되었다. 다행하게도 어떤 장교가 쉴레의 예술적 재능을 크게 존경하는 바람에 쉴러는 편한 군대생활을 했다. 쉴러는 단 한번도 총격전이 벌어지는 전선을 구경한 일이 없었다. 그는 러시아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그림이나 그리면서 지낼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17년, 그는 비엔나로 배속되었다. 쉴레는 더 열심히 작품활동을 할수 있었다. 이때의 작품들은 쉴레가 예술가로서 대단히 성숙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18년 제49차 비엔나 제체시온 전시회는 쉴레에게 출품토록 요청하였다. 쉴레는 50점의 작품을 출품하였고 이들은 제체시온의 대전시실에 전시되었다. 쉴레는 이 전시회의 포스터도 제작하였다. ‘최후의 만찬’을 주제로 삼은 포스터로서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기의 모습을 대신 넣은 것이었다. 제체시온에서의 쉴레 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쉴레의 작품들은 높은 가격에 팔렸다. 많은 사람들이 쉴레에게 작품을 의뢰하였다.
툴린(Tullin)에 있는 에곤 쉴레 박물관
그 해에 쉴레는 프라하, 취리히, 드레스덴에서도 전시회를 가져 성공을 거두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럽을 강타하여 거의 2천만명이나 독감에 시달려야 했다. 독감은 비엔나에도 진입하였다. 임신 6개월이었던 쉴레의 부인 에디트도 독감에 걸렸다. 에디트는 10월 28일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쉴레는 그보다 사흘후인 10월 31일 역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28세였다. 쉴레는 에디트를 스케치한 작품을 몇점 남겼다.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작품이었다.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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