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그릴파르저(Franz Grillparzer)
오스트리아 최고의 드라마 시인
비엔나 폭스가르텐(Volksgarten)에 있는 그릴파르저 기념상
오스트리아 사람, 특히 비엔나 사람으로서 프란츠 그릴파르저(1791-1872)를 모른다면 곤란하다. 그릴파르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극작가 겸 시인이다. 그래서 그를 드라마 시인(Dramatic poet)이라고 부른다. 그릴파르저의 기념상은 비엔나 시내의 폭스가르텐(Volksgarten)에 웅장하게 마련되어 있다. 비엔나로서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란 의미이다. 그의 기념상 뒤편에는 벽을 둘러서 사포, 메데아 등 그의 대표적 드라마의 장면들을 부조로 만들어 놓았다. 감동적인 기념조형물이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 비엔나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릴파르저는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장남으로서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학교를 중퇴하고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돈을 벌어 겨우겨우 생활을 지탱해 나갔다.
그러다가 1813년 그는 궁정도서관(현재의 국립도서관)의 사서보조직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월급을 받지 못하는 직책이므로 정규직으로 되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몇 달후 그만두었다. 다행히 그는 괜찮은 보수를 주는 남부오스트리아 세무서의 서기로 취직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본 당시 합스부르크의 재무장관이었으며 나중에 외무장관까지 된 슈타디온(Stadion)백작이 1818년 그를 궁정극장(현재의 부르크테아터)의 시인으로 임명되도록 추천해 주었다. 이와 함께 그릴파르저는 세무서에서도 승진하여 국고관리 책임자가 되었다. 그릴파르저는 65세까지 재무성 관리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그때에 그는 궁정의회의원(Hofrat)라는 높은 타이틀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작가가 전업이 아니면서도 국가가 존경하는 최고의 작가였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공직자로서 그의 행정능력은 탁월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작가로서 사무실을 더욱 빛내주었다. 그릴파르저의 작품과 인생을 설명하기 전에 한마디 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사람이건 오스트리아사람이건 연극을 대단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하므로 오스트리아에서는 극작가가 많은 존경을 받는다. 카페에 가면 공짜 커피를 마실수 있을 정도이다.
그릴파르저를 후원한 슈타디온 백작. 풀 네임은 베르트하우젠백작 요한 필립 칼 요셉 슈타디온(Johann Philip Karl Joseph Stadion, Graf von Werthausen: 1763-1824)이다. 합스부르크의 외무장관을 지냈다.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폰 쉴러가 원작을 썼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쉴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가 나오기 전에 비엔나의 그릴파르저가 Blanca von Castilien(카스틸의 블랑카)를 발표하였다는 사실은 더구나 잘 알려지지 못했다. 쉴러는 그릴파르저의 ‘카스틸의 블랑카’를 모델로하여 ‘돈 카를로스’를 발표하였고 이를 읽은 베르디가 감동하여 오페라로 작곡한 것이다. 그릴파르저의 이름이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817년 Die Ahnfrau(할머니)라는 비극이 인기를 끌고서부터였다. 사실 Die Ahnfrau라는 연극은 이미 아돌프 뮐너(Adolf Müllner)의 작품으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전설의 고향처럼 무시무시하도록 소름이 끼치는 비극적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릴파르저의 빛나는 시적 아름다움으로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극적인 내용으로 발전하였다. Die Ahnfrau에 이어 나온 것이 유명한 Sappho(사포)이다. 1818년에 발표되었다. Die Ahnfrau와는 대단히 다른 형태의 연극이었다. 그릴파르저는 비극적 내용을 천재적인 시적 감각으로서 미화하였다. 그는 자기의 임무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믿었다.
프란츠 그릴파르저
1821년 그릴파르저는 3부작인 Das goldene Vlies(황금양털)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오다가 1819년에 한때 중단되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절망감을 느껴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3부작은 단막의 서막으로부터 시작한다. 다음은Die Argonauten(아르고 선박)이다. 제이슨(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내용이다. 마지막 파트인 Media(메데아)는 고전적인 비극이다. 메데아에 대한 스토리는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연극으로 자주 공연되었던 것이다. 그릴파르저의 메데아는 과거의 연극보다도 훨씬 규모가 컸다. 메데아의 주제는 사포(Sappho)와 거의 비슷하다. 메데아는 마음속의 욕망과 평범한 행복과의 투쟁을 표현하고 있다.
히칭공동묘지에 있는 그릴파르저 묘지
역사비극인 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오토카르왕의 행복과 종말)는 보헤미아의 오토가르 2세와 독일의 루돌프 1세와의 분규를 그린 것으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 한동안 공연이 금지되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릴파르저는 오토카르의 쇠퇴를 통하여 세상의 권세와 욕심은 헛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 다음으로 제작한 역사비극이 Ein treuer Diener seines Herrn(충복)이었다. 그릴파르저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거의 10년동안 시인으로서 어두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오스트리아의 검열로 인하여 간혹 그의 작품이 제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공직자로서 오스트리아 정부의 정책에 순응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감성에 따라 작품활동을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을 겪었던 10년이었다. 1826년 그는 괴테를 방문하였다. 그릴파르저는 봐이마르와 같은 작은 나라에서 계몽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비엔나에서도 지성의 분출이 있기를 희망했다. 그릴파르저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모두비극으로 싸여 많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은 간혹 생활의 어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1821년에 아름다운 아가씨인 카타리나 프뢰리히(Katharina Frohlich)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지만 서로간의 행복과 비극에 대한 견해차 때문에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카타리나는 그릴파르저가 ‘인생에는 행복이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포의 흉상
1836년 그릴파르저는 파리와 런던을 여행했다. 이어 1843년에는 아테네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방문했다. 그이후 혁명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당국은 지식인, 학생들을 족쇄로 채웠다. 그릴파르저와 그의 동료들은 지성에 대한 압제로 인하여 신음하였다. 그러나 해방과 자유는 이들에게 너무 늦게 당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년의 그릴파르저에게는 사회적인 영예가 줄을 서서 마중하였다. 그는 학술원회원으로 임명되었다. 부르크테아터는 그릴파르저의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국가원로위원이 되었다. 1871년의 그릴파르저 80회 생일은 그야말로 국가적인 축제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72년 1월 21일 그릴파르저가 세상을 떠나자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너도나도 할것 없이 모두 애도하였다. 비엔나의 제과점에는 그릴파르저토르테(Grillparzertorte)라는 케익이 있다. 그릴파르저를 기려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
비엔나에서 인기있는 그릴파르저토르테(토르테는 초콜릿을 덮은 케이크로서 주로 계란을 많이 사용하고 알몬드와 같은 견과류를 가루도 만들어 밀가루, 또는 빵가루와 섞어 만든다. 토르테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의 토르타, 즉 둥근 케익이란 단어에서 연유한 것이다.)
프란츠 그릴파르저의 작품:
- Blanca von Castilien (카스티유의 블랑카: 1807-1809)
- Spartacus (스파르타쿠스: 1809)
- Alfred der Grosse (알프레드 대왕: 1809)
- Die Ahnfrau (할머니: 1817)
- Sappho (사포: 1818)
- Das goldene Vlies (황금양털: 1821), trilogy consisting of Der Gastfreund, Die Argonauten, Medea
- 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 (오토카르왕의 행운과 쇠락: 1823)
- Ein treuer Diener seines Herrn (충복: 1826)
- Des Meeres und der Liebe Wellen (바다와 사랑의 파도: 1831)
- Der Traum, ein Leben (꿈과 삶: 1834)
- Tristia ex Ponto (폰토의 트리스티아: 1835)
- Weh dem, der lügt (불쌍히 여기라, 거짓말 장이를: 1838)
- Libussa (리부싸: 1847; 공연은 1874)
- Der arme Spielmann (가난한 연극장이: 1848)
- Ein Bruderzwist im Hause Habsburg (합스부르크가의 골육상잔: 1848; 공연은1872)
- Esther (에스터: 1848; perf.1861)
- Die Jüdin von Toledo (톨레도의 유태여인: The Jewess of Toledo, 1851; 공연은 1872. 프라하)
비엔나 제9구 알저그룬트의 교구교회인 슈봐르츠슈파니어교회에서 열린 베토벤 장례식. 그릴파르저가 조사를 썼고 당대의 연극배우 하인리히 안쉬츠가 배링공동묘지 입구에서 조사를 읽었다. 그릴파르저는 17세 때에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베토벤과 같은 집에 잠시 살았었다. 그릴파르저의 어머니는 베토벤이 피아노를 치는 것을 듣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여 언제나 베토벤이 피아노를 치면 방 앞의 계단에 조용히 앉아 들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베토벤은 그릴파르저 가족이 비엔나로 돌아갈 때까지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고 한다. 베토벤과 그릴파르저는 그러한 이상한 인연이 있었는데 그릴파르저가 베토벤의 장례식을 위해 조사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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