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프리트(Alfred Fried)
노벨평화상 수상자
알프레드 프리트(1864-1921)는 유태인으로서 1911년 법학자인 토비아스 아써(Tobias Asser)와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알프레드 프리트는 평화주의자이며 출판가이고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독일평화운동의 주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독일평화협회(Deutsche Friedensgesellschaft)의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1894년부터 1889년까지 월간 평화통신(Friedenskorrespondenz)을 발간했다. 프리트의 사업은 1905년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 von Sutner) 남작부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었다. 저명한 문필가이기도한 폰 주트너 남작부인은 일찍부터 세계평화에 관심을 기울여 1889년 Die Waffen Nieder!(무기를 내려놓자)라는 책을 출판하고 반전운동을 펼쳐왔다. 프리트는 폰 주트너 남작부인의 협조를 받아 평화운동 잡지를 발간하였다. 잡지의 명칭은 Die Waffen Nieder였다. 프리트는 평화의 기반으로서 세계경제협력과 국가간 및 정치기구간의 협력을 강조하였다. 그는 레오 톨스토이와 같은 도덕성에 기본을 둔 낭만적인 평화운동에는 크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리트는 에스페란토 운동의 핵심멤버이기도 했다. 그는 세계평화를 위해 세계제2의 공통어가 될수 있는 에스페란토의 적극적인 발전과 활용을 주장했다. 그는 1903년 Lehrbuch der Internationalen Hilfssprache Esperanto(에스페란토 국제어 교본)을 발간하였다.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 알프레드 프리트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은 토비아스 아써
프리트는 비엔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집안이 넉넉지 못했기 못했기 때문에 15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점에서 알바를 했다. 1883년 베를린으로 올라간 그는 4년후인 1887년 개인 서점을 오픈했다. 당시 베를린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정치적, 사회적으로 하나의 변혁기를 마지하게 되었다. 27세 때에 그는 신문에서 베르타 폰 주트너 남작부인이 주도하는 평화운동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프리트는 즉각 남작부인에게 서한을 보내어 평화잡지의 발간을 제안하였다. 경제적으로 도움만 준다면 자기가 편집장이 되어 잡지를 발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48세의 남작부인은 이 젊은이의 대담한 제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하여 편집자 일을 해보라고 동의하였다. 1892년 월간지 Die Waffen Nieder가 처음 발간되었다. 월간지의 제목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남작부인의 쓴 책의 제목이었다. 이어 두 사람은 독일평화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로부터 프리트와 폰 주트너 남작부인은 20여년간 진정한 친구로서 지냈다. 1914년 남작부인이 세상을 떠날 때 옆에 있었던 사람도 프리트였다. 남작부인은 190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899년 남작부인은 사정상 Die Waffen Nieder를 떠나게 되었다. 트리트도 떠났다. 프리트는 Die Friedenswarte(The Peace Watch: 평화 감시)라는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그 일을 계속하였다.
오스트리아정부가 발행한 알프레드 프리트 기념우표.
베를린에서 활동하던 프리트는 1903년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는 비엔나에서 여러 신문에 기고를 하는 한편 집필활동에 전념하였다. 이때에 나온 책이 두권으로 된 Handbuch der Friedensbewegung(평화운동 핸드북)이었다. 이 책은 과거에 나왔던 어는 책자보다도 평화문제에 대한 권위 있고 이해하기 쉬운 책이었다. 그는 많은 집필활동을 했지만 그보다도 훌륭한 활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베른평화사무국 위원이었으며 중부유럽국제화해위원회 사무총장이었고 국제평화언론연맹(Union Internationale de la Presse pour la Paix)의 사무총장도 맡아 했었다. 프리트가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은 군비축소였다. 그는 군비와 전쟁은 동의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전문기구가 있어서 국가간의 관계를 개선하게 된다면 군비축소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국제적인 전문기구로서 국제연합의 탄생을 예견한 주장이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났다. 오스트리아 경제는 추락의 길을 걸었다. 프리트가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국채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프리트는 가난한데다가 병까지 걸렸다. 프리트는 1921년 57세로 가난과 질병을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 어떤 노벨평화상수장사는 국가를 파탄에 빠트린 장본인인데 막대한 국민의 혈세를 들여 국장으로 장례를 치루어주었다. 말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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