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고 베타우어(Hugo Bettauer)
나치에 희생당한 작가 겸 저널리스트
1920년대 오스트리아의 최고 작가였던 휴고 베타우어(1872-1925)는 나치 핵심분자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어줍잖게 나치에게 추종하는 어떤 녀석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작품이 유태인을 비호하는 내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휴고 베타우어의 원래 이름은 막시밀리안 휴고 베타우어였으나 작가로서 활동하고부터 간단히 휴고 베타우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내놓았으며 그중에서 영화로 제작된 것도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매춘부 이야기를 다룬 Die freudlose Gasse(기쁨이 없는 거리: 1925), 반유태주의에 대한 풍자소설인 Die Stadt ohne Juden(유태인이 없는 도시: 1924) 등이다. ‘기쁨이 없는 도시’는 그레타 가르보의 국제무대 데뷔 영화였다.
'기쁨 없는 거리'의 한장면. 그레타 가르보, 베르너 크라우쓰 주연
휴고 베타우어는 1872년 8월 18일 비엔나 근교의 유명한 온천장인 바덴(Baden)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르비브(Lviv)에서 살다가 비엔나로 왔으며 주식중개인이었다. 아버지는 유태계로서 이름은 아놀트 사무엘 아론 베타우어(Arnold Samuel Aron Bettauer)였다. 문학에 뜻을 둔 베타우어는 이미 소년시절부터 문학인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베타우어는 15세 때인 1887년 비엔나의 슈투벤바스타이(Stubenbaitei)에 있는 프란츠 요셉 고등학교에 다녔다. 나중에 유명한 문학평론가가 된 칼 크라우스(Karl Kraus)와 함께 입학하였다. 훗날 크라우스는 베타우어의 작품을 가장 신랄하게 비평한 인물이 되어 베타우어를 평생 괴롭혔다. 베타우어는 학교에 들어간 이듬해인 1888년 무작정 학교를 빠지고 가출하여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왜 하필이면 알렉산드리아로 갔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알렉산드리아의 오스트리아 영사는 16세의 베타우어를 당장 체포하여 비엔나로 돌려보냈다. 바로 얼마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상심해서 가출을 했던것 같았다.
'기쁨 없는 거리' DVD 표지. 그레타 가르보, 베르너 크라우스 주연.
1890년 베타우어는 유태인 신앙을 버리고 복음주의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그해에 그는 황제의 산악보병부대(Kaiserjäger)에 입대하였다. 그가 개신교로 개종한 것은 당시 유태인으로서는 군대에서 진급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베타우어는 기왕에 개종d다면 로마 가톨릭보다는 복음주의 개신교가 더 좋아보였다고 한다. 입대한지 5개월후 그는 티롤에서 또 다시 부대를 탈영하였다. 상관이 못되게 굴어서였다. 얼마후 그의 어머니는 베타우어를 데리고 취리히로 도망가다시피 떠났다. 베타우어는 취리히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손에 쥐고 있었다. 베타우어는 소년시절부터 고향 바덴에서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 올가 슈타이너(Olga Steiner)였다. 베타우어는 올가를 취리히로 오도록 하여 취리히에서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얼마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베타우어는 올가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의 길을 떠났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도중, 그는 카드놀이에 빠져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었다. 뉴욕에 도착한 젊은 부부는 당장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다. 올가가 배우로서 극장에 출연하여 겨우 입에 풀칠하였다. 2년후인 1899년 베타우어는 비록 미국시민권을 얻었지만 도저히 장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여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베를린에서도 직장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는 중에 아들 하인리리 구스타브 헬무트 베타우어(Heinrich Gustav Helmut Bettauer)가 태어났다.
'유태인 없는 도시' 초판 표지
베타우어는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할수 있었다. 그러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내용은 주로 그가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었던 스캔들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21년 발간된 Bobbie(보비)라는 소설은 어떤 권세 있고 돈 많은 부자집 아이를 유괴하는 내용으로 베타우어가 범행에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되었던 사건이라고 한다. 1901년 베타우어는 갑자기 무슨 의협심이 생겼는지 당시 베를린 궁정극장의 권세 있는 극장 감독을 부패공무원이라고 공공연히 비난했다. 이 때문에 베타우어는 프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베타우어는 뮌헨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다시 함부르크로 옮겼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Küche und Keller(부엌과 포도주 저장고)라는 잡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나마 몇 년을 함께 살았던 올가와는 결혼생활은 결국 이혼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베타우어는 함부르크에서 장차 재혼할 헬레네 뮐러(Helene Mueller)를 만났다. 당시 베타우어는 29세였고 헬레네는 16세였다. 만난지 3년후인 1904년, 베타우어와 헬레네는 보따리를 싸서 미국으로 야간도주하였다. 두 사람은 대서양을 배로 건너면서 배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국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헬레네는 아들 레기날트 파르커 베타우어(Reginald Parker Bettauer)을 낳았다. 속도위반! 베타우어는 뉴욕에서 신문기자로 일했고 곧이어 신문에 연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베타우어의 아버지의 고향인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르비브(Lviv: Lwow). 르비브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아름답고 유서깊은 도시이다.
1910년 그는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엔나로 돌아가 Neue Freie Presse라는 신문사에 취직을 했다. 얼마후 1차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신문사고 뭐고 때려치우고 당장 군대에 들어가려 했으나 미국시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입대하지 못했다. 베타우어는 다시 신문사로 돌아와서 전쟁중에 내내 신문기자 겸 연재소설가로 활약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1918년, 그는 신문사에서 고장난 타자기문제로 상사와 다투다가 해고당했다. 그는 소설에만 전념키로 결심했다. 그는 1920년부터 수많은 소설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년 4-5편의 소설집을 발간했다. 그는 범죄소설이 주특기였다. 여기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발표했다. 그의 소설은 대인기였다. 그의 소설이 인기를 끌게된 또 다른 이유는 배경이 뉴욕이나 베를린을 삼았기 때문이었다. 베를린은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서 모든 사람들이 동경하는 곳이었고 뉴욕은 더 동경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들을 배경으로한 범죄소설이 인기를 끌지 못한다는 법은 없었다.
베타우어의 대표작은 Die Stadt ohne Juden(유태인 없는 도시)이다. 나치가 득세하기 직전인 1922년에 발표되었다. 당시에 서서히 팽배해지고 있는 반유태인 정서를 풍자한 내용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어떤 가공의 정치인이 비엔나로부터 모든 유태인을 추방하라고 명령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대단히 예언적이 되었다. 몇 년후 나치는 이웃나라로부터 열차 30량을 빌려서 유태인을 가득 태워 동쪽으로 추방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비엔나 사람들은 처음에는 유태인 추방을 박수로서 환영했으나 나중에는 극장도 문을 닫고 식당, 호텔, 상점등도 문을 닿게 되자 공연히 추방했다고 후회하기 시작한다. 경제가 침체하자 비엔나 사람들은 추방한 유태인들을 다시 데려오라고 요구한다. 유태인을 추방한 나치는 파멸한다. 그래서 유태인들이 비엔나로 다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유태인 없는 도시’는 첫 해에 25만부나 팔렸다. 그리고 이 소설로 베타우어는 수많은 지지자와 함께 적들도 생겼다.
그는 주간지도 발간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Er und Sie(남자와 여자)는 겨우 5호가 발간되었을 뿐이었다. 그의 저널리즘은 ‘폭로주의’였다. 여기에 성해방 문제를 공개적으로 다루었다. 그리하여 수시로 공개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란은 심해져갔다. 베타우어는 공개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당국은 그가 발간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압수하였다. 극단적인 시민들은 그를 법정에 세우고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타우어의 사업은 번창하기만 했다. 그가 발간하는 주간지는 무려 6만부나 팔렸다. 그때까지 그만큼 인기 있는 주간지는 없었다. 나치는 베타우어를 ‘붉은 시인’(공산주의 사상의 시인) 또는 ‘타락한 젊은이’라면서 공격했다. 오스트리아 국회의원들은 신문기고를 통해 ‘국민들을 오염시킨 모든 자에게 린치를 가하라’고 주장했다. 1925년 3월 10일 오토 로트슈토크(Otto Rothstock)라고 하는 치과 기능공이 베타우어에게 몇발의 총을 쏘았다. 베타우어는 곧 병원으로 옮겼으나 상처가 심하여 회복하지 못하고 보름 후인 1925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베타우어가 총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엔나 시내 전체가 대단한 논쟁에 휩싸였다. 간단히 말해서 ‘잘했다’는 측과 ‘그러면 되냐’는 측으로 갈라져서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비엔나 시의회에서도 격론이 벌어졌다. 범인인 로트슈토크에 대한 심문이 있었다. 로트슈토크는 ‘베타우어는 죽어 마땅한 놈이다. 베타우어는 작가로서 도덕성이 없다. 노골적인 섹스 글로서 유명해진 형편없는 놈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로트슈토크가 베타우어를 쏘기 전에 나치 당원으로 가입한 일이 있으며 사건이 난후 즉시 탈퇴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지 변호사들이 서로 변론을 맡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변호사들도 나치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친노좌파 변호사들 처럼. 베타우어는 반유태주의를 비난하는데 앞장섰었다. 특히 ‘유태인 없는 도시’를 통해 자기의 그런 주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가 피살된 것도 ‘유태인 없는 도시’의 영향을 컸다. 그건 그렇고 법원은 로트슈토크에 대하여 정신치료를 받으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로트슈토크는 3년동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후 석방되었다.
휴고 베타우어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소설: Im Banne von New York(뉴욕으로부터의 지령: 1907), Im Kampf ums Gluck(행복을 위한 투쟁: 1907), Auf heissem Boden(뜨거운 국경: 1907), Im Schatten des Todes(죽음의 그림자: 1907), Aus den Tiefen der Welstadt(세계도시의 심층에서: 1907), Faustrecht(1919), Bobbie(Die Liebe eines Knaben: 어떤 어린이의 사랑: 1921), Die drei Ehestunden der Elisabth Lehndorff(엘리자베트 렌도르프의 결혼 수업: 1921), Der Frauenmörder(부인 살해: 1922), Der Herr auf der Galgenleiter(교수대의 신사: 1922), Das blaue Mal(푸른 그림: 1922), Die Stadt ohne Juden(유태인 없는 도시: 1922), Der Kampf um Wien(비엔나 투쟁: 1922: Ralph und Hilde), Die lustigen Weiber von Wien(비엔나의 유쾌한 아낙네들: 1924), Gekurbeltes Schicksal(돌고도는 운명: 1924), Die freudlose Gasse(기쁨 없는 거리: 1924), Das entfesselte Wien(속박에서 풀린 비엔나: 1924), Die schönste Frau der Welt(세상에서 가장 미인: 1924), Memorien eines Hochstaplers(1924)
중편소설(Novella): Der Tod einer Grete und andere Novellen(1926), Geschichten aus dem Alltag(1926)
드라마: Die Stadt ohne Juden(유태인 없는 도시: 1922), Die blaue Liebe(푸른 사랑: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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