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루드비히 폰 쾨헬(Ludwig von Köchel)

정준극 2009. 7. 3. 06:47

루드비히 폰 쾨헬(Ludwig von Köchel)

음악학자, 작가, 작곡가, 식물학자, 출판가

 

루드비히 쾨헬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은 K 넘버로 분류된다. 예를 들어서 교향곡 41번 ‘주피터’는 K. 551번이며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는 K. 662번이다. K는 음악학자, 작가, 작곡가, 식물학자, 출판가인 루드비히 폰 쾨헬의 이름인 Köchel의 첫 글자이다. 그래서 K. 662번이라고 하면 쾨헬 662번이라고 읽는다. 루드비히 쾨헬(1800-1877)은 남부 오스트리아(니더외스터라이히)의 슈타인(Stein)에서 태어났다. 그의 풀 네임은 상당히 길다. 루드비히 알로이스 페르디난트 리터 폰 쾨헬(Ludwig Alois Ferdinand Ritter von Köchel)로서 나중에 리터(Ritter: Knight: 기사)라는 귀족의 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이름이 길어졌다.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적 영웅은 샤를르 대공(Archduke Charles)이라고 한다. 에쓸링과 아슈페른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격파한 위대한 장군이다.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은 비엔나 중심지의 영웅광장(Heldenplatz)에 우뚝 서 있다. 쾨헬은 15년 동안 샤를르 대공의 네 자녀의 가정교사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쾨헬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하고 은급을 주어 평생을 학자로서 편하게 지내도록 배려해주었다. 쾨헬은 뛰어난 식물학자이기도 했다. 당대 과학자들은 쾨헬이 수행한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 영국, 러시아 등지의 식물 연구에 대하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식물학 이외에도 그는 지질학, 지리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음악을 사랑했다. 쾨헬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의 멤버였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연주실.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의 전신은 일찍이 1841년 모차르트의 미망인 콘스탄체 베버가 설립한 Cathedral Music Association and Mozarteum이다.  

 

1862년, 그는 ‘쾨헬 카탈로그’를 출판했다. 모차르트의 모든 작품을 연대적으로 주제별로 분류한 목록이다. ‘쾨헬 카탈로그’는 그때까지 볼수 없었던 학문적이고 역사적인 것이었다. 쾨헬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모두 24개 부류로 나누었다. 이것은 1877년부터 1910년까지 브라이트코프-해르텔(Breitkopf & Härtel)출판사가 모차르트 전집을 발간했을 때 최초로 사용되었던 분류방법이었다. 쾨헬은 알브레헤트 궁전에서 모차르트 작품의 분류작업을 했다. 그는 77세에 알브레헤트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브레헤트 궁전은 오늘날 알베르티나 미술관이다. 알브레헤트 공작은 쾨헬의 제자였다. 쾨헬이 고전음악의 발전에 기여한 공적은 크다. 쾨헬은 요한 푹스(Johann Fux)의 작품들도 분류하였다.

 

쾨헬이 작업을 했던 알베르티나 (현재는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