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칼 크라우스(Karl Kraus)

정준극 2009. 7. 3. 23:03

칼 크라우스(Karl Kraus)

풍자가, 격언가, 극작가, 시인, 수필가, 저널리스트, 소설가

 

 

칼 크라우스(1874-1936)는 작가 겸 저널리스트로서 풍자가, 격언가, 수필가, 시인, 극작가로도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20세기에서 가장 유명한 독일어 풍자가로 인정받았다. 그가 독일문화와 독일 정치에 대하여 쓴 신문 평론은 당대 최고의 풍자문장으로 꼽히고 있다. 크라우스는 당시 보헤미아(현재의 체코공화국)의 기친(Gitschin)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유태인인 아버지 야콥 크라우스(Jacob Kraus)는 제지공장을 운영하였다. 어머니도 신실한 유태인이었다. 크라우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크라우스의 가족들은 1877년, 어린 크라우스가 3살 때에 비엔나로 모두 이전하였다. 크라우스에게 언제나 힘이 되어 주었던 어머니는 크라우스가 17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칼 크라우스가 태어난 체코의 기친(티챠인: Titschein)

 

크라우스는 1892년 비엔나대학교의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었던 크라우스는 대학교에 들어간 해부터 Wiener Literaturzeitung(비엔나 문학신문)에 기고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게재된 평론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의 소설 Die Weber(베버)에 대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는 어떤 작은 극장에서 배우로서 활동했지만 그것은 실패였다. 대학교에 들어간지 2년후, 그는 전공을 철학과 독일문학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후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들어갔다. 풍자에 있어서는 당대에 막상막하였던 페터 알텐버그와는 이 시점으로부터 친분을 쌓아 평생 친구로서 지내게 되었다. 학교를 중퇴한 그는 무대를 잊지 못하여 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도하고 무대감독도 했다. 그러다가 페터 알텐버그, 레오폴드 안드리안(Leopold Andrian), 허만 바르(Hermann Bahr), 리하르트 베르-호프만(Richard Beer-Hofmann), 펠릭스 되르만(Felix Doermann),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펠릭스 잘텐(Felix Salten)등과 함께 ‘융 빈’(Jung Wien: Young Vienna)에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1년후인 1897년, 그는 Die demolierte Literatur(파괴된 문학)이라는 대단한 풍자문을 쓰고 ‘융 빈’을 탈퇴하였다. 모두들 ‘저 친구 왜 저래?’라면서 의아해 했다. 크라우스는 브레슬라우신문(Breslauer Zeitung)의 비엔나특파원이 되었다. 얼마후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현대 시온주의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을 Eine Krone für Zion(시온을 위한 왕관)이라는 논설로서 비난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태인 동화에 타협할수 없는 옹호자라고 자처했다.

 

베를린에 있는 칼 크라우스 기념 명판. 잡지 Dei Fackel을 발간한 것을 기념함.

 

1899년 크라우스는 유대주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그해에 자기 단독의 잡지인 Die Fackel(횃불)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 떠날 때까지 이 잡지의 발간에 매달렸으며 이 잡지를 통해 공격코자 하는 대상에 대하여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그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은 타깃은 위선자와 위선적인 행동, 심리분석을 빙자한 학자들, 합스부르크 제국의 부패 관료, 국수주의자, 범독일 운동, 자유방임주의적(laissez-faire) 경제정책 등이었다. 1901년 허만 바르(Hermann Bahr)와 엠메리히 부코비츠(Emmerich Bukovics))는 크라우스가 Die Fackel을 통하여 자기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하며 고소했다. 그러자 정당들과 다른 사람들도 크라우스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Die Fackel은 크라우스가 주필 겸 발행인이기 때문에 크라우스의 의도대로 발간되었다. 물론 저명인사들의 기고도 많았다. 페터 알텐버그, 리하르트 데멜, 에곤 프리델, 오스카 코코슈카, 엘제 라스커-쉴러, 아돌프 로스, 하인리히 만, 아놀드 쇤베르크, 아우구스트 슈트린드버그, 게오르그 트라클, 프랑크 베더킨트, 프란츠 베르펠, 오스타 와일드(Oscar Wilde)등이 기고했다. 그러다가 1911년 이후부터는 잡지에 게재되는 글이 거의 전부 크라우스의 것으로 변하였다. 크라우스는 자기의 작품을 잡지를 통해 발표하는 형식을 취했다. 결과, 모두 922편의 크라우스 작품이 Die Fackel에 게재되었다.

 

오스카 코코슈카가 그린 칼 크라우스

 

Die Fackel은 부패와 저질 저널리스트들을 우선적인 비판의 타깃으로 삼았다. Die Fackel의 주적은 막시밀리안 하르덴(Maximilian Harden), Neue Freie Presse(신자유신문)의 발행인인 모리츠 베네딕트(Moritz Benedikt), 알프레드 커르(Alfred Kerr), 허만 바르(Hermann Bahr), 임레 베케씨(Imre Bekessy), 요한네스 쇼버(Johannes Schober)등이었다. 1902년 크라우스는 Sittlichkeit und Kriminalität(도덕과 범죄정의)라는 저서를 내고 처음으로 그가 여러 글을 통하여 개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밝혔다. 범죄정의로서 성에 대한 도덕성을 방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Der Skandal fängt an, wenn die Polizei ihm ein Ende macht. 라는 말을 남겼다. 즉, 경찰이 스캔들을 금지하려고 하면 스캔들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크라우스는 이같은 사회정의 차원에서의 논설이외에도 일반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그는 1892년부터 1936년까지 무려 8년동안 다른 작가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한 독후감을 7백여회나 그의 잡지에 연재하였고 강연회도 열었다. 예를 들면 괴테, 셰익스피어, 베르톨트 브레헤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요한 네스트로이 등의 작품을 대중들이 알기 쉽게 읽을수 있도록 해설한 글들이다. 크라우스는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다.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를 자기가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여러 역할을 혼자서 노래를 불렀다.

 

30대의 칼 크라우스

 

Die Fackel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피살되었다는 사망기사를 게재한후 몇 달동안 발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선포된 후인 1914년 12월, In dieser grossen Zeit(이 중대한 시기에)라는 논설로 다시 발간되었다. 하지만 얼마후 당국의 극심한 검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크라우스의 대표작은 1차대전을 풍자한 Die letzten Tage der Menschheit(인류 최후의 날)이다. 이 저서의 형식은 ‘불평자’와 ‘낙관자’의 두 사람이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내용에는 성경의 묵시록의 환영을 보는 듯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1915년부터 일련의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9년 시리즈를 모두 묶어 특별 Fackel 집으로 발간하였다. 에필로그인 Die letzte Nacht(마지막 밤)는 1918년 2차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특별기획으로 발표되었다. 평론가 에드워드 팀스(Edward Timms)는 크라우스의 연작 희곡을 ‘단층의 걸작’이라고 말했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귀족적 보수주의 성향이었다가 마무리 할 때에는 민주적 공화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마치 지질학적으로 단층을 보는 듯하여 그렇게 평했던 것이다. 1919년에는 또한 전쟁문집인 Weltgericht(세계재판소)를 발표했으며 1920년에는 풍자작품인Literatur oder Man wird doch da sehn(문학 또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발표했다. 이는 프란츠 베르펠이 Spiegelmensch(거울인간)을 통해 자기를 공격한데 대한 답변이었다.

 

1932년 크라우스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번역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엥겔베르트 돌푸쓰(Engelbert Dolfuss)수상이 비록 독재를 하지만 나치를 방지할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나치에 반대하는 입장은 이해하겠지만 히틀러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논평을 하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이에 대하여 크라우스는 ‘히틀러를 생각하면 다른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Die Dritte Walpurgisnacht(제3의 발푸르기스나하트)는 나치를 강력히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히틀러가 앞으로 권세를 장악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논설은 1936년 2월 Die Fackel에 게재되었다. 그이후로 Die Fackel은 발간되지 않았다. 몇 달 후인 1936년 6월 12일, 크라우스는 비엔나의 중심지에서 색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기의 기포 등으로 혈관이 막히는 증세였다. 크라우스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1913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36년까지 간혹은 다투기도 하고 간혹은 용서를 빌기도 하면서 시도니 나드헤르니 폰 보루틴(Sidonie Nadherny von Borutin) 남작부인(1885-1950)과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크라우스는 대부분 작품을 나드헤르니 가문 소유의 야노비츠(Janowitz)성에서 집필했다. 크라우스는 시도니 나드헤르니에게 여러 저서와 시를 헌정했다. 1911년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923년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리바이벌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10년경 비엔나의 어느 카페에서 칼 크라우스가 어떤 부인과 앉아서 담소하고 있다. 부인의 모자가 유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