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비엔나 왈츠

비엔나 왈츠, 넌 누구니?

정준극 2009. 7. 21. 18:15

비엔나 왈츠란?

 

비엔나 왈츠(Wiener Walzer)는 무도회 무곡의 한 장르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비엔나 왈츠’라는 용어는 여러 가지로 변형된 왈츠 중에서 하나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서 비엔나 사람들이 왈츠가 처음 등장했을 때 추던 춤이 비엔나 왈츠이다. 비엔나 왈츠는 세계의 모든 왈츠의 원조라고 말할수 있다. 하지만 비엔나 왈츠가 나오기 전에도 왈츠는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Montaigne)는 일찍이 1580년 독일의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서 열린 무도회를 보고 놀라운 심정으로 “춤추는 남녀가 너무 붙어 있어서 얼굴을 서로 맞대고 있을 정도였다.”라고 기록했다. 그 이전에는 남녀가 적당히 떨어져서 우아한 동작으로 천천히 춤을 추었을 뿐이었다. 몽테뉴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쿤츠 하스(Kunz Haas)라는 사람은 “불경하고 사악한 느낌이 드는 춤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진흙 빚은 것을 빙빙 돌리는 것과 같고 실을 빼는 사람이 물레를 빙빙 돌리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두 남녀가 너무 꼭 붙어서 빙빙 돌아가며 춤을 추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원래 농부들의 랜들러는 조금 과격한 것이었다. 발을 쾅쾅 구르기도 하고 손짓을 과장되게 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왈츠의 형태를 빌리면서 좀 더 우아하게 변형된 것이다.

 

왈츠는 빙글빙글 돌기 때문에 원무곡이라고 번역되었다.

 

17세기 말 비엔나의 궁정에서는 남자들은 홀의 가운데 서고 여인들이 2박자의 음악에 맞추어 방을 돈 후에 남자들과 함께 4분의 3박자로 마무리하는 춤을 추었다. 나중에 추는 4분의 3박자의 춤을 Nach Tanz(뒷 춤)이라고 불렀다. 이때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 손을 잡고 물레를 돌리는 것처럼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춤추는 사람들의 발놀림은 마치 물 위에서 물을 발로 차듯 내딛는 것이었다. 이것이 비엔나 왈츠의 매력이었다.

 

메뉴엣. 왈츠처럼 서로 몸을 붙이고 추는 춤이 아니었다.

 

비엔나 왈츠의 원조는 랜들러라고 했지만 실상 바바리아, 티롤, 슈티리아 지방의 농민들은 일찍부터 랜들러를 조금 변형한 춤을 만들어 추면서 이를 발처(Walzer)라고 불렀다. 독일어의 발처(영어의 왈츠)라는 단어는 빙빙 돈다는 뜻이다. 그것이 1750년경이었다. 당시 상류사회에서는 주로 점잖은 미뉴엣을 추었지만 농민들의 랜들러는 그 경쾌함과 산뜻함으로 점차 도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농민들의 랜들러 춤은 슐라이퍼(Schleifer)라고 부르기도 했다. 썰매를 타듯 미끄러지거나 또는 옷자락을 끌면서 추는 춤이라는 의미였다. 미뉴엣에 싫증이 난 귀족들은 하인들이 추는 랜들러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여 랜들러를 연주하는 장소를 몰래 찾아가는 일이 많아졌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제프 란너 기념상. 바덴 바이 빈의 쿠어파르크

 

랜들러 또는 독일의 알레만데(Allemande: 슈봐벤 지방의 무곡)의 변형인 발처(왈츠)는 두 사람이 서로 붙잡고 춤을 추면서 폴짝폴짝 뛰거나 또는 발을 탁탁 구르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그러다가 도시의 상류층 사람들도 랜들러 무도회장을 찾아오게 되자 좀 더 우아한 형태로 발전하였다. 폴짝폴짝 뛰는 것은 발로 물결을 차듯 미끌어지는 스텝으로, 발을 탁탁 구르던 것은 빙빙 도는 스텝으로 바뀌어졌다. 여인들의 드레스 자락을 끌면서 우아하게 빙빙 도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 좋았다. 그러면서도 여인들은 지칠 줄을 몰라 했다. 발처(왈츠)는 점점 인기를 끌게 되었다. 발처(왈츠)는 폴카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폴카는 두 사람이 서로 가볍게 손을 붙잡고 직선으로 앞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형태이다. 여기에 발처의 미끄러지는 듯한 스텝과 빙빙 도는 스텝이 가미되었다. 사람들은 왈츠를 추는 것이 재미있어서 죽을 지경이 되었다. 랜들러 음악을 비엔나 왈츠 스타일로 처음 시도한 사람은 요셉 란너였다. 요셉 란너와 함께 비엔나 왈츠의 기반을 닦아 놓은 사람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였다.

 

비엔나 시청(라트하우스) 공원에 있는 요셉 란너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기념상. 배경에는 란들러를 추는 장면. 

 

비엔나 왈츠가 다른 지역의 왈츠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굳이 설명하자면 발을 내디디면서 다음 박자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박자는 첫 번째 박자에 비하여 좀 더 빠르고 좀 더 가벼운 리듬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간혹은 소절이 끊어질 경우도 있다. 음악이 끝난것 같은데 실은 다시 이어지는 것이 비엔나 왈츠의 매력이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는 원-투-스리의 3박자 왈츠를 원-투 패턴으로 끊으면서 마지막 박자는 다른 리듬으로 발전시키는 특별한 형태의 왈츠를 만들어 냈다. 말하자면 투-스텝 왈츠였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런 패턴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곧 투-스텝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비엔나의 1780년대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새로운 왈츠 패턴에 감격한 시기였다. 비엔나 왈츠의 황금시기였다. 비엔나 왈츠는 다른 지역의 왈츠에 비하여 빠르게 진행된다. 그만큼 경쾌하고 멋들어진다. 비엔나 왈츠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주장도 있다. 프랑스 왈츠(French waltz)와 구별하기 위해 비엔나 왈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왈츠의 즐거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해협 건너의 영국에서도 인기 최고였다. 1825년의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왈츠라는 단어에 대하여 ‘분방하며(Riotous) 상스러운(Indecent)' 춤이라고 소개했지만 왈츠에 대한 인기는 시들줄을 몰랐다. 왈츠는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추는 춤이다. 랜들러를 변형한 왈츠가 처음으로 상류사회에 소개 되었을 때에는 서로 부등켜 안는 자세가 아니었다.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춤을 추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서로 마주보고 밀접하게 붙잡고 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곧이어 매력의 포인트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변형 왈츠가 개발되었다. 예를 들면 4분의 2박자의 왈츠가 개발되었는가 하면 4분의 5박자 왈츠도 등장하였다. 4분의 5박자 왈츠는 하프 앤 하프(Half and half)라고 불렀다. 1910년 경에는 이른바 ‘헤지테이션(주저하는)왈츠’가 생겨났다. 왈츠를 출 때에 발을 허공에 올려 놓은채 잠시 그대로 있는 포즈를 말한다. 그런 후에는 발을 천천히 내려놓고 다음 박자에 빠르게 움직이는 형태이다.

 

비엔나 시립공원(슈타트파르크)에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기념상. 누가 낙서를 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비엔나 왈츠가 인기추락이었다.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다른 스타일의 춤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 왈츠는 영국에서도 인기가 시들해졌다. 시인 바이론경의 기여가 컸다. 바이론경은 그의 시 The Waltz에서 왈츠를 “반사회적 성격의 것이며 왈츠를 추는 두 사람은 마치 두 개의 바늘 사이에 끼인 풍뎅이와 같다.”고 언급했다. 영국에서는 새로 나온 보스턴(Boston)이라는 춤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비엔나 왈츠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된것은 1930년대에 퇴역장교인 칼 폰 미르코비츄(Karl von Mirkowitsch)의 공적 때문이었다. 그는 비엔나 왈츠를 세태에 맞게 변형하였다. 새로운 스타일의 비엔나 왈츠는 1932년부터 비엔나의 무도회장에 등장하였다. 사람들은 옛 제국의 영화를 음미하듯 왈츠에 몰입하였다.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도 비엔나 왈츠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국 오히아오 클리블랜드 출신인 슬로베니아계의 프랭키 얀코비치. 폴카와 비엔나 왈츠의 변형인 아메리칸 스타일 왈츠를 보급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50년대에 프랭키 얀코비치 악단의 폴카와 왈츠 연주는 세계 라디오 방송국에서 나오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인기 정상이었다. 오른쪽은 역시 폴카의 귀재 조이 미스쿨린(Joey Miskulin)

                      

미국에서 비엔나 왈츠가 유행하게 된 것은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Cleveland) 때문이었다. 클리블랜드에는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많이 정착하여 살고 있다. 약 6만-8만명이나 된다. 슬로베니아는 요한 슈트라우스가 활동할 때에 오스트리아제국의 일원이었다. 오스트리아 남부의 슬로베니아에 살던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비엔나 왈츠도 함께 가지고 왔다. 클리블랜드 출신의 프랭키 얀코비치(Frankie Yankovic)는 비엔나 왈츠의 변형인 아메리칸 스타일의 왈츠를 가지고 세계를 순방하여 연주회를 가졌다. 프랭크 얀코비치의 Blue Skirt Waltz(푸른 스커트 왈츠)는 1949년에 플래티넘 판매를 기록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도 클리블랜드에서는 매주 왈츠 연주회가 열린다. 이렇게 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미국에서 비엔나 왈츠가 부활하자 비엔나 왈츠는 5종류의 국제표준 무도곡 중의 하나로 당당히 진출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부터는 유럽의 무도학교에서 비엔나 왈츠를 기본과목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왈츠의 사촌쯤 되는 폴카이다. 요한 슈트라우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곡가들이 폴카를 작곡했다. 폴카의 연원등에 대하여는 다음번에 설명키로 하고 폴카와 관련하여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미국에서 펜실베이니아에서 폴카가 인기를 끌었고 그 중심에는 로렌스 웰크(Lawrence Welk)가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폴카를 샴페인 폴카라고도 부른다.

 

스탠포드 왈츠 페스티발


 [내가 좋아하는 왈츠 10곡]

-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제2의 왈츠'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봄의 소리 왈츠'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

- 유진 도가의 '나의 감미롭고 부드러운 야수'(My Sweet and Tender Beast)

- 유진 도가의 '그라마폰'(Gramafon)

- 니노 로타의 '대부'(El Padrino)에서 왈츠

- 페터 차이코브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에서 '꽃의 왈츠'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비엔나 기질(Wiener Blut)

- 프레데릭 쇼팽의 왈츠 64번의 2번

- 프레데릭 쇼팽의 A 단조 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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