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19 데지더 프리드만(Desider Friedmann)

정준극 2009. 7. 29. 22:06

참고자료 19

 

데지더-프리드만-플라츠와

이스라엘문화동맹회장 데지더 프리드만(Desider Friedmann)

 

 

데지더 프리드만

 

데지더 프리드만은 1944년 종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시온주의자이다. 변호사인 그는 이스라엘문화동맹(IKG)의 회장이었다. 데지더-프리드만-플라츠는 그를 기념하여 붙인 지명이다. 1880년 오스트리아제국의 보스코비체(Boskovice)에 있는 평범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 비엔나에 상경하여 비엔나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고향 마을에서는 ‘축 변호사 시험합격’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그를 대대적으로 축하하였다. 그는 비엔나에서 주로 유태인들을 상대로 변호사 활동을 하여 얼마후에는 재산도 모았고 명성도 얻었다. 돈을 버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그는 가정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마침내 41세의 노총각으로서 1921년 엘라(Ella)와 결혼하여 헤드비히와 에르네스티네라는 두 딸을 두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시온주의자들의 모임인 ZLVfÖ(Zionisitischer Landesverband für Österreich)와 산하기구인 IKG의 멤버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에는 IKG의 회장이 되었다. 뛰어난 연설가였던 그는 1930년대에 들어서서 오스트리아 연방의회의원이 되었다. 1938년 안슐르쓰(합병) 직후인 3월 18일 프리드만을 비롯한 IKG 임원들은 모두 나치의 SS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프리드만의 나이는 이미 58세였다. 나치는 IKG를 수객하여 IKG의 자금 80만 쉴링을 압수하였다. 나치의 유태인 담당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은 IKG의 자금을 압수하면서 영수증까지 써 주었다.

 

예루살렘 슈티게(Jerusalem Stiege)에 있는 데지더 프리드만 플라츠

 

프리드만과 IKG의 임원들은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프리드만은 그곳에서 1년을 지낸 후 1939년 4월 석방되었다. 그러나 나치가 비엔나의 유태인 거물을 그대로 놓아 둘리가 만무했다. 1942년 가을, 프리드만은 부인 엘라와 함께 테레지엔슈타트의 유태인 게토로 이송되었다. 게토는 강제수용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대로 약간의 자유를 보장 받으며 지낼수 있었다. 프리드만은 이곳에서 유태인 원로회의 멤버로 활약하다가 11월에는 테레지엔슈타트의 유태인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유태인 자체은행을 만들어 별도의 화폐를 발행하여 사용토록 하였다. 1944년 여름, 나치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유태인들이 자율적으로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은행장인 프리드만을 내세워 기록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적십자 대표들에게 보이기 위한 허구적인 영화였다. 프리드만이 나치의 허구적인 유태인 정책에 대하여 비난조의 발언을 하자 1944년 10월 프리드만과 엘라는 자동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곧이어 가스실로 끌려갔다.

 

두 딸인 에르네스티네(Ernestine)와 헤드비히(Hedwig)는 요행으로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직후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갈수 있었다. 2002년 두 딸은 나치가 압수해간 IKG의 기금과 프리드만 개인재산에 대한 반환청구소송을 벌여 47,400 스위스 프랑을 판결에 의해 돌려받았다. 1957년 12월, 비엔나의 제2구 레오폴드슈타트는 페르디난트슈트라쎄 23번지에 아파트를 짓고 프리드만을 기념하여 ‘데지더-프리드만-호프’(Desider-Friedmann-Hof)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래 이 장소에는 유태교 회당이 있었으나 1938년 11월에 나치에 의해 완전 파괴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