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22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Georg Raphael Donner)

정준극 2009. 7. 29. 22:18

참고자료 22

 

돈너가쎄와

조각가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Georg Raphael Donner)

 

 

만일 누가 ‘돈너가 누구인가?’라고 질문했을 때 ‘돈 노(Don't know)라고 대답하면 곤란하다. 돈너는 오스트리아가 한껏 자랑하는 국산 조각가이기 때문이다. 17세기로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의 문화예술계는 말많고 소리 잘 지르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럴 때에 돈너가 등장하여 ‘오스트리아에는 나같은 조각가가 수없이 많다’고 주장함으로서 전체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불어 넣어주었다. 비엔나 사람들이 돈너를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느냐 하면 노이어 마르크트(Neue Markt)의 광장에 있는 아름다운 분수가 원래는 ‘프로비덴티아(Providentia)분수’였으나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를 기려서 돈너분수(Donner Brunnen)라고 부르기로 한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처음에 돈너가 이 분수를 제작했을 때에는 납으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1873년 청동제품으로 교체되었다. 오리지널인 납으로 만든 작품은 벨베데레 궁전의 바로크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비엔나 시는 위대한 조각가 돈너를 기념하여 노이어 마르크트 앞의 길을 돈너가쎄라고 명명했다. 돈너는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조각가, 건축가, 금세공가, 메달제작자였다. 그는 18세기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고전주의 예술가였다.

 

 노이어 마르크트에 있는 돈너 분수

 

돈너는 1693년 4월 25일 남부오스트리아의 에쓸링겐(Esslingen)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비엔나 제국궁정의 금세공가인 요한 카스파르 프렌너(Johann Kaspar Prenner)로부터 조각을 배운 그는 13세 때에 조각가 조반니 줄리아니(Giovanni Giuliani)의 견습도제로 들어가 비엔나의 리히텐슈타인 궁전의 조각들을 만드는 일에 조수로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돈너는 청년시절에 주로 비엔나와 프레스부르크(현재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작업했다. 그는 주로 대리석 및 청동 조각작품을 만들었으나 납으로 주물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여 그 분야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납은 빛나면서도 재질이 유연하기 때문에 스무스하게 모델링을 할수 있을 뿐 아니라 청동보다도 더 정확한 표현을 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노이어 마르크트 한가운데에 있는 돈너 분수 

 

이제 완전한 조각가로 독립한 돈너는 1725년부터 조수들과 함께 잘츠부르크의 유명한 미라벨 궁전의 조각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만든 파리스(Paris)왕자 조각상은 걸작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동안 몇가지 금화도 제작한바 있다. 주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초상화와 문장을 넣은 주화였다. 1728년 헝가리의 엠레 에스터하지(Emre Esterhazy) 대주교가 돈너를 그의 궁전이 있는 프레스부르크로 초청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프레스부르크대성당의 성엘레모시나리우스(St Elemosynarius) 채플을 위한 제단조각을 제작하였다. 이 채플에 있는 대주교의 묘지 조각도 돈너의 작품이며 대성당의 ‘성마르틴(St Martin)과 거지’ 기마상도 그의 작품이다. 성마르틴의 조각상은 대단히 사실적인 작품으로서 고전적인 의상을 입지 않고 헝가리 기병대의 의상을 입은 것이 특징이다. 샤를르 6세의 대리석 조각상은 바로크적 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 메달리온

 

돈너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노이어 마르크트의 돈너분수이다. 1739년에 완성되었다. 분수의 네 귀퉁이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네 강을 비유한 인물상은 후기 르네상스 작품의 걸작이다. 또하나 역사에 남을 걸작은 비엔나 구시청에 있는 안드로메다(Andromeda)분수이다.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아름다운 대리석 작품이다. 돈너의 마지막 걸작은 구르크(Gurk)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Pieta)이다. 1741년에 완성하였다. 돈너는 그 해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제자들, 특히 그의 동생인 마티아스(Mathias)는 돈너의 고전주의적 스타일을 답습하여 18세기말까지 오스트리아에서 훌륭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돈너가쎄 2번지는 하이든이 잠시 머물면서 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가로 사용하고 있는 곡을 작곡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