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24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Dr Ignaz Seipel)

정준극 2009. 7. 30. 16:06

참고자료 24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와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Dr Ignaz Seipel)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은 20세기 초반 비엔나의 유명한 설교가 겸 신학자 겸 정치가였다. 그를 기리는 광장이 슈투베링(Stubenring)에서 시내중심 방향으로 있는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Dr.-Ignaz-Seipel-Platz)이다. 이그나즈 자이펠 박사는 1876년 비엔나에서 태어나 1932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얼마전에 페르니츠(Pernitz)라는 마을에서 세상을 떠난T다. 그는 오스트리아 가톨릭교회의 감독이라는 높은 지위의 성직자였으며 위대한 신학자였고 또한 오스트리아공화국의 연방수상을 지낸 정치가였다.

 

자이펠은 7구 마이들링에 있는 제국김나지움(K.K. Staatsgymnasium)을 졸업한후 비엔나대학교에서 가톨릭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23세에 신부로서 서품을 받았다. 그는 대학시절, 도이치마이스터 빈(Deutschmeister Wien) 등을 통한 가톨릭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08년에는 비엔나대학교 교수로 발탁이 되었으며 1909년부터 1917까지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윤리신학교수로 활약했다. 그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동안 ‘나라와 국가’(Nation und Staat)라는 논물을 발표했다. 자이펠은 유명한 설교가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었다. 비엔나대학교에는 자이펠을 기념하는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비엔나대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이그나즈 자이펠 박사의 흉상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에는 오랜 역사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마침내 막을 내리고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자이펠은 하인리히 람마슈(Heinrich Lammasch)내각에 입각하여 노동-사회사업장관의 직분을 맡았다. 그후 공화국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21-1930년에는 기독교사회당(Christlichsozialen Partei: CS)의 당수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정치권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을 완전히 제거하자는 주장이 나오자 이를 반대하는 과정에서 기사당의 분당이 이루어졌고 결국 기사당은 사민당(Sozialdemokraten)과 연합전선을 펼치게 되어TDmau 나아가 대독일국민당(Gorssdeutschen Volkspartei)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이펠은 1922-24년간 연방정부 수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의 극심한 경제난이 기승을 부려 인플레는 심화되고 실업자는 늘어나게 되었다. 자이펠은 쉴링화의 평가절상을 위해 노력했지만 홍수처럼 밀려오는 경제난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자이펠은 수상직을 사임하고 오로지 기사당의장으로만 재직하였다.

 

설교하는 이그나즈 자이펠 박사. 그의 설교를 들으러 일부러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1926-29년간 자이펠은 다시 연방수상이 되었다. 그는 맑스주의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펼쳤으며 국민당(나중에 나치)과 협동하여 유태주의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히틀러와 같은 극단적인 반유태운동을 주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후인 1941년 비엔나에는 다시한번 금융위기를 맞게 되었다. 보험회사들이 파산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자이펠에게 다시 수상직을 맡아 금융위기를 가라 앉히고 사회를 안정시켜 줄것을 요청하였으나 자이펠은 이같은 제안을 사양하였다. 자이펠은 언제나 나라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정치라는 생각이었다. 나라가 없는데 무슨 정치를 할수 있겠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는 정치에서 손을 떼고 성직자로서 평생의 꿈인 성지순례를 위해 길을 떠났다. 자이펠은 팔레스타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32년 8월 2일 페르닛츠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는듯 숨을 거두었다. 그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14C구역 7번)에 안치되었다.

 

휴고 베타우어스(Hugo Bettauers)가 1922년에 쓴 Die Stadt ohne Juden(유태인 없는 도시)라는 소설의 주인공인 슈베르트페거(Schwerdtfeger) 연방수상은 실은 자이펠 수상을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슈베르트페거 수상은 모든 유태인들을 오스트리아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자이펠도 반유태주의적인 성향을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주었다.

 

힐데가르트 페스티벌에서의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앉아 있는 사람중 안경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