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33 프란치스카너키르헤(Franziskanerkirche)

정준극 2009. 8. 1. 22:51

참고자료 33

 

프란치스카너플라츠와

프란치스카너키르헤(Franziskanerkirche) - 프란치스코회 교회

 

프란치스카너키르헤와 광장의 모세 기념상

 

프란치스카너교회와 수도원이 있는 프란치스카너플라츠(프란치스코 광장)는 17세기와 18세기의 건물들로 둘러싸인 비엔나에서도 가장 중세적인 지역이다. 광장에 있는 모세의 기념상은 원래 6번지의 Zum grünen Löwen(푸른 사자 집)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요한 마르틴 피셔(Joahnn Martin Fischer)가 만든 모세 기념상은 납제품이다. 출애굽 때에 모세가 광야에서 검소하게 지낸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조각상이다. 이 광장 주변의 집들은 17세기의 고풍스러운 것들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이곳의 분위기를 고풍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다. 성제롬 교회라고도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회는 비엔나에서는 유일하게 르네상스 현관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이다. 하지만 내부는 바로크 스타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회의 중앙제단에는 1707년 안드레아 포쪼(Andrea Pozzo)가 그린 성모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원래 보헤미아의 그륀버그(Grünberg)교회에 있던 것이었으나 터키와의 전쟁 때에 오스트리아군이 수호성화로서 비엔나로 가져왔다고 한다. 교회에는 세곳의 부속 예배처(카펠레: 채플)가 있다. 첫 번째는 성카프리스탄(St Capristan) 카펠레이다. 제단에는 성카프리스탄이 순교하는 장면의 그림이 있다. 프란츠 봐겐쇤(Franz Wagenschön)의 작품이다. 두 번째 카펠레는 성프란치스코에게 봉헌된 카펠레이다. 성프란시스코에 대한 그림이 모셔져 있다. 세 번째 카펠레는 십자상의 고난 카펠레이다. 카를로 카를로네(Carlo Carlone)가 그린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가 있다. 이 교회의 오르간은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642년 거장 요한 보케를(Johann Wockerl)이 제작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오르간이다.

 

 

프란치스카너키르헤의 중앙제단 성모상

 

프란치스카너플라츠는 비엔나 시내에 있는 광장 중 그나마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최근이라는 것은 1624년을 말하는 것이므로 어느덧 4백 년이 훨씬 넘는 긴 시간을 간직한 광장이다. 예전에는 이 광장 자리에 초라하게 보이는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1603-1611년에 건축한 성제롬 수녀원이었다. 성제롬 수녀원은 ‘가난한 클레어 수녀회’(Poor Clares)가 운영했다. 이것을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인수하여 수녀원을 허물고 새로운 교회를 건축했다. 새로운 교회는 성제롬에게 봉헌되었다. 새로운 프란치스코 교회는 어찌된 일인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아서 주일이면 귀족들이 미사를 드리러 많이 찾아왔다. 아마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회며 또한 아씨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에 대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인 듯싶다. 아무튼 주일미사나 다른 행사가 있으면 마차를 타고 온 귀족들 때문에 광장일대의 교통이 여간 혼잡했던 것이 아니었다. 1621년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원장은 황제에게 특별 요청을 했다. 귀족들이 타고 온 마차가 주위에서 기다렸다가 미사가 끝나서 다시 주인들을 태우고 속히 돌아 갈 수 있도록 주변의 집들을 정리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주변 집들을 몇 채 정리하여 마차 주차장을 마련해주었다. 오늘날에는 이 광장에는 어떠한 차도 주차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도 프란치스코 교회에 가려면 멀리 주차하고 걸어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회의 옆에 프란치크코 수도원이 있다. 14세기에 이 건물은 참회를 목적으로 하는 신심수도회(信心修道會: Penitent)의 수녀원이었다. 신심수도회는 13세기에 유행했었다. 이 수녀원에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긴 여인들이 참회하기 위해 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처음에 이곳에 온 여인들은 외부와 단절한 채 은둔의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수녀들처럼 주님을 위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서약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열심히 노동하여 돈을 벌수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신심수녀원의 여인들은 아내감으로서 인기가 높았다. 일 잘하고 신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삶을 경멸했던 이들 중 수녀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여인들은 정절과 빈곤의 서약을 하며 여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성막달라 마리아수녀회라고 불렀다. 약 2백 년 동안 이 수녀원은 비엔나 시민들의 기부금을 받으며 융성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1525년에 있었던 대화재 때문에 이 수녀원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543년에 이르러서는 수녀원장을 비롯하여 단 여덟 명의 여인들만 남게 되었다.

 

프란치스카너키르헤의 정면 벽면 조각들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예전과 달리 정절과 빈곤과는 거리가 멀었다. 율리안 클리버거(Julian Klieberger)라고 하는 수녀원장은 수녀원의 남자 신부(神父)인 라우빙거(Laubinger)와 불륜관계에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에 대해 수군거리게 되자 결국 라우빙거는 자기가 직접 주례하여 율리안과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고 수녀원의 공금을 거의 모두 개인용도로 착복하기까지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엔나 시민들은 두 사람을 불쌍히 여겨 석방해달라고 청원했다. 그 후 라우빙거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으며 율리안 클리버거는 수녀원으로 돌아와 155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다. 그 후 이 신심수도회는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회생되지 못했다. 1589년 이 수녀원은 프란치스코 수도회로 넘어갔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채플을 포함한 건물의 대부분을 개축하여 그로부터 수녀원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프란치스카너플라츠의 모세 기념상

 

프란치스코 수도원에는 대단히 정교하게 조각한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오르간이 있다. 수도사 찬양대를 위한 오르간이었다. 1642년 제작되었다는 오르간이다. 오르간의 본체는 생각 외로 적다. 키보드도 일반 오르간보다 사이즈가 작다. 그러나 오르간위의 파이프 장식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려하다. 천사들이 오르간을 연주하는 그림이 무척 아름답다. 오르간의 상단에는 다윗 왕이 두 명의 천사와 함께 하프를 연주하는 조각이 있다. 수도원의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대리석으로 만든 해골 모양의 성수반이다. 왜 해골 모양의 성수반을 만들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성수반의 아래쪽에 적혀 있는 글귀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당신에게(Heute an mir morgen an dir)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수도원에는 평화로운 정적이 감돌고 있다. 더구나 벽에는 정숙해달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길거리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간혹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이다. 오르간은 제단의 뒤쪽으로 가야 볼 수 있다. 수도원의 채플에서 나와 아치 길인 바이부르그가쎄(Weihburggasse)를 가로질러 건너가면 발가쎄(Ballgasse)를 만난다.

 

 프란치스카너플라츠에서 발가쎄로 건너가는 파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