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32 요한 고트리브 휘히테(Johann Gottlieb Fichte)

정준극 2009. 8. 1. 22:50

참고자료 32

 

휘히테가쎄와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리브 휘히테(Johann Gottlieb Fichte)

 

요한 고틀리브 휘히테

 

휘히테가쎄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요한 고트리브 휘히테(1762-1814)를 기념하여서 붙인 이름이다. 휘히테는 독일이상주의라고 하는 철학운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독일이상주의는 임마누엘 칸트의 이론적 및 윤리적 저서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휘히테는 일반적으로 칸트의 아이디어와 독일 이상주의자인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아이디어를 연계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휘히테는 그의 선배들인 데카르트나 칸트처럼 주관과 자각의 문제는 철학적 명상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휘히테는 정치철학에 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그는 독일 국가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연설문은 Reden an die deutsche Nation(독일 국민에게 고한다)이라는 것으로 이 연설을 통하여 독일국민들은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1구의 휘히테가쎄. 슈베르트링으로부터 하우스 데어 무직(음악의 집) 방향으로 있는 길이다.

 

휘히테는 독일 상부 루사티아(Lusatia)의 라멘나우(Rammenau)에서 태어났다. 그는 예나(Jena)신학교에서 찰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학위를 마치지 않고 공부를 끝낸 그는 취리히로 가서 어느 부호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1790년에는 유명한 시인 클롭슈토크(Klopstock)의 조카인 요한나 란(Johanna Rahn)과 약혼하였다. 그해부터 그는 칸트의 작품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칸트의 철학은 휘히테의 전생애를 통하여 많은 영향을 준 것이었다. 휘히테는 마침내 쾨니히스버그에서 칸트를 만나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휘히테는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시도’(Attempt at a Critique of All Revelation: 1792)를 발표하였다. 이 저서는 칸트의 비판철학과 신의 계시의 연관성에 대한 조사연구였다. 그러나 이 저서는 초판이 휘히테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출판되었다. 휘히테의 이름도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칸트도 알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칸트의 새로운 저서인줄 알았다. 칸트가 자기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휘히테를 찬양하자 휘히테의 명성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사람들은 칸트만이 이러한 책을 쓸수 있는데 휘히테라는 청년이 썼다고 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휘히테는 51세로 장질부사에 걸려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휘히테는 베를린의 도로테어 공동묘지에 부인 요한나와 함게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인 임마누엘 허만 휘히테(Immanuel Hermann Fichte)도 독일철학에 기여하였다.

 

베를린의 도로텐슈태티셔 프리드호프(Dorotheenstadtischer Friedhof)에 있는 요한 고틀리브 휘히테(왼쪽)의 묘소와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묘소(가운데)



베를린의 도로테르 공동묘지에 있는 휘히테 부부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