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45
호에르 마르크트(Hoher Markt) - 하우프트 마르크트(Haupt Markt)
앙커우르
호에르 마르크트는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중의 하나이며 많은 얘기를 지닌 장소이다. 호에(Der Hohe)라는 말은 높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중요하다는 뜻이다. 호에르 마르크트는 옛날 로마군단이 주둔했던 빈도보나의 유적지에 자리 잡고 있다. 중세에는 호에르 마르크트가 비엔나 시민들의 중심거리였다. 그래서 가장 많은 시민들이 거주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생활용품과 옷감이 거래되었다. 1328년부터 1839년까지 이 광장에서는 사형집행을 했으며 광장의 한쪽에는 재판소가 있었다. 재판소의 옆에는 Zur Todesangst Christi(그리스도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작은 카펠레(예배처)가 있었다. 재판소의 테라스에서는 판사가 재판 판결을 낭독했다. 그리고 재판소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사형이오, 사형!이라고 외쳤다. 사형수는 판결에 따라 참수를 하든지 사지를 절단하여 죽이든지 했다. 재판소 앞에는 교수대와 죄수를 묶어 놓는 족쇄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튼 호에르 마르크트에는 처절한 사연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반드시 처절한 사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시대의 유적
크라머가쎄에서 나와 호에르 마르크트로 들어가는 왼쪽에 아치로 되어 있는 로트가쎄(Rotgasse)가 있고 이곳에 유명한 안커우르(Ankeruhr)라는 커다란 시계가 있다. 안커(영어로는 Anker)는 술의 양을 재는 통을 말한다. 요즘으로는 10갤런들이 통이다. 이 시계는 1911-1917년 사이에 프란츠 마츄(Franz Matsch)라는 사람이 안커보험회사를 위해 제작한 것이다. 그래서 안커우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시계의 장관을 보려면 12시 바로 직전에 그 앞에 있어야 한다. 12시 정각에 시계에 있는 인물 세트가 음악에 맞춰 행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다른 음악이 나오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다. 시계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은 1시에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sus: 121-180: 2세기의 로마제국의 16대 황제 겸 철학자로 비엔나에서 지냈음). 2시에 살레만뉴 대제(Charlemagne: 742-814: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랑크 왕). 3시에 영광왕 레오폴드(Leopold VI, The Glorious: 1176-1230: 바벤버거 왕실의 오스트리아 대공)와 그의 후궁으로 비잔틴 공주인 테오도라. 4시에 발터 폰 데어 포겔봐이데(Walter von der Vogelweide: 1170-1230: 오스트리아의 음유시인). 5시에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2세(Rudolf II: 1552-1612 )황제와 안나왕비. 6시에 대건축가 한스 푹스바움(Hans Puchsbaum: 1390-1454: 슈테판스돔 설계건축). 7시에 최후의 기사인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59-1519: 신성로마제국 황제). 8시에 터키의 비엔나 공성 때에 비엔나 시장이었던 요한 안드레아스 리벤베르크(Johann Andreas Liebenberg: 1627-1683). 9시에 위대한 정치가이며 군사 지도자인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렘베르크(Ernst Rudiger von Starhemberg: 1899-1956) 백작. 10시에 프랑스 출신이지만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위대한 군사지도자인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Prinz Eugen von Savoy: 1663-1736). 11시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여제와 부군 프란시스1세 황제. 12시에 교향곡의 아버지 요세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이다.
앙커우르의 하이든(왼쪽)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프란시스 1세 황제의 모습.
시간별로 등장하는 인물에 따라 흘러나오는 음악도 다르다. 1시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경우에는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시인인 핀다르(Pindar)의 파이티안 승전송가(Siegesode Pythian)이 나온다. 올림픽 승전가로 사용되었던 음악이다. 파이티안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봉사하는 예언 능력이 뛰어난 최고 여사제를 말한다. 2시의 샬레마뉴 대제가 등장할 때에는 힐데브란트의 노래(Hildebrandslied)가 나온다. 힐데브란트의 노래는 현존하는 독일어 문학작품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내용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음의 전투를 벌인다는 것이다. 3시의 레오폴드 6세의 경우에는 니벨룽겐리트(니벨룽의 노래)가 나온다. '니벨룽의 노래'는 13세기초 독일어로 된 대서사시이다. 4시의 발터 폰 데어 포겔봐이데가 등장할 때에는 그가 쓴 시에 의한 노래인 '팔레스티나의 노래'(Palastinalied)가 나온다. 발터 폰 데어 포겔봐이데는 괴테 이전에 가장 위대한 독일어 서정시인이다. '팔레스티나의 노래'는 십자군 전쟁 당시의 무용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5시에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황제가 등장할 때에는 음유시인의 노래인 '불굴의 사람'(The Undaunted)이 나온다. 루돌프 황제를 칭송하는 노래이다. 루돌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이었다. 6시에 거장 한스 푹스바움이 나올 때에는 '오스트리아에 한 성이 있었네'(There is a castle in Austria)가 나온다. 7시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가 나올 때에는 인스브루크의 민요인 '나는 그대를 떠나야 하네'(I must leave you)가 나온다. 8시에 요한 안드레아스 리벤버그 비엔나 시장이 나올 때에는 역병 시기의 노래인 '오 사랑하는 아우구스틴'(O du lieber Augustin)이 나온다. 9시에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렘버그 백작이 나올 때에는 오스트리아의 전쟁 노래가 나온다. 10시에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가 나올 때에는 '고귀한 기사'(The noble knight)가 나온다. 11시에 마리아 테레지아와 부군인 프란시스 1세 황제가 등장할 때에는 모차르트의 메뉴엣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12시에 요제프 하이든이 나올 때에는 그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중에서 대합창곡인 '하늘이 주의 영광을 말하고'가 나온다.
앙커우르의 쇼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광장 중앙에 있는 ‘결혼 분수’(Vermaehlungsbrunnen)는 그 섬세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호에르 마르크트 광장을 압도하고 있다. 분수가 있는 자리는 원래 칼(죄인의 목과 양손을 끼워 사람 앞에 보이게 한 판자의 옛 형구)과 교수대가 있던 곳이었다. 당시 황제였던 레오폴드1세는 만일 황태자인 요세프(나중에 요세프1세 황제가 된 사람)가 란다우(Landau) 전투로부터 무사히 귀환하면 이곳에 있는 형틀과 교수대를 없애고 대신 아름다운 분수를 만들어 놓겠다고 약속했다. 요세프는 무사히 돌아왔다. 분수는 성요셉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다. 분수에 성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결혼식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요세프 황태자와 마리아공주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조각분수는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어라흐가 목재로 제작하였으나 그후 그의 아들인 에마누엘 폰 에어라흐가 대리석으로 다시 제작하였다.
19세기 초의 호에르마르크트 그림
광장의 아랫쪽 (도나우운하 방향), 유덴가쎄와 마르크 아우렐 슈트라쎄 사이는 전체 블록이 원래 베르그호프라는 한채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상당히 유명하여 13세기 말에는 옛 비엔나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비엔나를 확장할 때 이 건물로부터 이정표를 삼아 도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유서 깊은 이 건물은 17세기에 들어서서 철거되었다. 그후 여러 건물이 호에르 마르크트를 중심으로 들어섰다가 철거되곤 하였지만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물은 슈란네(Schranne)라고 불리는 옛 궁전으로 중세에는 법원청사였던 건물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투후라우벤(Tuchlauben)과 호에르 마르크트의 코너에 있는 이 건물은 일찍이 1440년에 세워진 것이다. 처음에는 대단한 건물로서 각광을 받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별로 찬사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현관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지나치게 넓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판사가 이 넓은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아래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죄인은 사형이요!’라고 소리치며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호에르마르크트. 팔레 프린시페
법원 건물안에는 작은 부속채플이 있었다. ‘그리스도 죽음의 고난 채플’이었다. 채플에는 ‘가난한 죄인의 종’(Armensaendergloecklein)이라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다. 죄인을 사형장으로 끌고 갈때에 이 종을 울렸다. 건물 지붕에는 오래된 시계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1855년 건물이 철거될 때 떼어냈다. 법원청사를 장식하기 위해 면류관처럼 얹어 놓았던 시계는 아니었던 같았다. 왜냐하면 떼어낸 시계의 뒷면을 보니 ‘이 시계는 행복한 자를 위해서는 울리지 않는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울렸던 시계가 영광스런 법원청사를 장식하는 왕관일수는 없었다. 법원청사였던 건물의 건너편에는 옛날에 커다란 새장과 같이 생긴 철책 유치장이 길거리에 있었다. ‘바보들의 오두막집’(Narrenkotterl)이라는 이름의 철책 유치장이었다. 미친사람, 매춘부, 마녀, 점장이, 술주정꾼들을 붙잡아 넣고 오가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록 한 유치한 유치장이었다. 1710년 이 철책 유치장은 철거되었고 대신 비교적 현대식 형틀이 들어섰다.
호에르 마르크트 광장은 비엔나의 명물인 수산시장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바다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비엔나에서 수산물은 주로 지중해에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져왔다. 아무튼 지중해의 생선과 바다가재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그런데 1516년에 공포된 수산법에 따르면 ‘비엔나 시민이 아니거나 또는 부인이 없는 총각은 이 곳에서 생선을 팔수 없다.’고 되어 있다. 총각은 왜 생선을 팔지 못하도록 했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다른 광장과 마찬가지로 호에르 마르크트 광장의 한가운데에도 분수가 있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선분수’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분수의 네 귀퉁이에서 물이 흘러 나오도록 되어있는 물은 오늘날 비엔나 외곽인 헤르날스(Hernals)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 사용했다. 생선시장에서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물을 끌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생선분수’라는 명칭이 붙었다.
결혼분수. 성요셉과 성모 마리아의 결혼
호에르 마르크트광장은 간혹 축제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 특히 이교도의 하지축제와 흡사한 요한네스포이에르(Johannesfeuer), 그리고 기독교 축제인 세례요한 축제가 열렸었다. 아주 오래 전인 1481년 이 광장에서 그런 축제가 열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축제는 대체로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우선 시의원들이 말을 타고 입장한다. 북치고 피리 부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다음엔 야한 옷차림을 한 이른바 ‘예쁜이들’(Huebschlerinnen)이 웃고 떠들면서 등장한다. 이 아가씨들은 완곡하게 표현하여 ‘자유분방한 딸들’(Freitochters)이라고도 불렀다. 실은 매춘부들이다. 마지막으로 각종 장인들이 뒤따랐다. 빵장이, 옷감장이, 구두장이, 모자장이, 장갑장이 등등…이런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면 이어 가운데 화톳불을 중심으로 둘러서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포도주가 넘쳐 흐르고 어릿광대들이 이리 저리 뛰면서 재주를 넘는다. 이러한 광란의 장면이 밤이 지새도록 계속된다. 매춘부들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 축제는 1524년 경찰에 의해 금지 되었다.
호에르마르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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