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43
헤르베르트-폰-카라얀-플라츠와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거장의 모습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지도 2009년으로 20년을 맞이한다. 세월이 유수와 같음을 다시한번 일깨워 준다. 하지만 카라얀이 아직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남긴 수많은 비디오 때문이다. 그의 전설적인 지휘 모습을 언제라도 볼수 있는 것은 현대과학기술의 덕분이다. 카랴얀이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35년간 활동했기 때문에 독일 지휘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1908년 4월 5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프란츠 요셉 황제시절에 태어났으며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어려움을 모두 겪었다. 그가 1999년 7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 타임스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 세계 최강의 지휘자”라며 애도했다. 최강이라는 것은 그의 강력한 음악적 리더쉽을 일컫는 말이다. 그가 지휘대에 올라서면 무대는 신전이 되며 그는 대제사장이 된다. 최고라는 것은 그가 지휘한 음반이 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를 기록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지금까지 2억장 이상의 카라얀 음반이 판매되었다.
지휘하고 있는 카라얀
카라얀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카라얀의 선조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 계통, 또는 아르메니아 계통이라고 한다. 카라얀의 증조할아버지는 루멜리아(Rumelia) 지방의 오토만 마을에 있는 작은 마을인 코차니(Kozani)에서 태어났다. 루멜리아는 현재 그리스의 서부 마케도니아에 해당한다. 카라얀의 증조할아버지는 1767년 더 나은 삶을 위해 고향을 떠나 비엔나로 갔다가 결국은 작소니의 헴니츠(Chemnitz)에 정착했다. 증조할아버지는 작소니에서 옷장사를 시작하여 점차 사업을 확장하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작소니의 프레데릭 아우구스투스 3세에게 봉사한 공로가 지대하여(세금을 많이 내서) 1792년(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년후) 귀족의 칭호를 받았다. 그때부터 카라얀의 집안은 폰(von)이라는 단어를 이름 앞에 사용하였다.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그리스 식으로 게오르기오스 요한네스 카라야니스(Georgios Johannes Karajannis)였으나 작소니에서 작위를 받은후 카라야니스를 카라얀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카라얀의 할아버지는 어찌된 일인지 현재의 슬로베니아인 카르니올라(Carniola)공국에서 태어났다. 카르니올라의 모이스트라나(Mojstran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가 어쩌다가 그곳까지 갔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주말농장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주말농장이라고 해도 작소니에서 카르니올라(슬로베니아)는 대단히 먼 길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또 한가지 신통한 것은 카라얀의 어머니 역시 슬로베니아 계통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카라얀의 어머니가 그리스 또는 세르비아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만 슬로베니아가 정확하다. 그리고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무튼 카라얀의 조상들은 기회만 있으면 재빨리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닌 재능이 있었던 것같다.
1938년의 폰 카라얀
카라얀은 어린 시절, 피아노의 신동이었다. 그는 불과 8세 때인 1916에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 입학하여 10년 후인 1926년에 졸업했다. 아마 1차 대전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학업을 진행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에는 1926-1929년에 비엔나에 가서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에서인지 비엔나기술대학에도 잠시 다녔다. 이공계에도 관심이 컸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음대에서는 원래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지도교수가 피아니스트보다는 지휘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자꾸 권면하는 바람에 지휘로 방향을 바꾸었다. 카라얀의 피아노 지도교수는 청년 카라얀의 놀랄만큼 뛰어난 지휘자적 재능을 보았던 것이다. 1929년 카라얀은 21세의 청년으로서 잘츠부르크의 페스트슈필하우스(Festspielhaus: 페스티벌연주회장)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Salome(살로메)를 지휘하였다. 놀랍도록 신선한 충격이었다. 카라얀은 곧이어 독일 울름(Ulm)극장으로부터 지휘자로 와 달라는 간곡한 초청을 받았다. 카라얀은 울름에서 1929년부터 1934년까지 5년 동안 활동했다. 그가 오페라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3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구노의 '파우스트' 중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의 장면을 지휘한 것이었다 (주: 발푸르기스나하트: 발푸르기스 축제일의 전날 밤, 즉 4월 30일 밤부터 5월 1일 새벽까지의 밤을 말하며 이날 밤에는 마녀들이 주로 빗자루를 타고 하르츠 산에 있는 블록스버그에 모인다고 한다). 이듬해에 카라얀은 역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비엔나 필을 지휘하여 비엔나 필과의 인연을 시작하였다. 그때 카라얀은 불과 26세의 청년이었다. 카라얀은 1934년부터 전쟁 중인 1941년까지 독일의 아헨(Aachen) 오페라극장에서 오페라와 교향곡을 지휘했다. 모두들 '하늘이 낸 천재 지휘자'라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잘츠부르크의 폰 카라얀 생가
카라얀은 아헨에 있을 때 최연소자로서 독일 제3제국 정부로부터 음악총감독에 임명되어 뷰카레스티, 브뤼셀, 스톡홀름, 암스테르담, 파리 등지의 객원지휘자로 활동했다. 이로부터 카라얀은 세계적 명성의 지휘자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훗날 나치에 부역했다느니 어쩌니하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베를린 필에서의 데뷔는 1937년이었다. 베를린 국립오페라(슈타츠오퍼)에서 ‘휘델리오’를 지휘하였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던 해에 카라얀은 베를린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을 지휘하여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베를린은 카라얀에 대하여 Das Wunder Karajan(놀라운 카라얀)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베를린의 평론가들은 카라얀이 바그너의 난해하기가 이를데 없는 작품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성공적으로 훌륭하게 해석하여 지휘함으로서 푸르트뱅글러와 드 사바타(De Sabata)에 이어 가장 위대한 독일 오페라의 지휘자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그해에 카라얀은 DGG(도이치그라마폰)와 음반 취입 계약을 맺었다. 그의 첫 음반 취입은 베를린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를 지휘한 것으로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서곡이었다. 1938년 7월 26일, 카라얀은 오페레타 성악가인 엘미 홀거호프(Elmy Holgerhof)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42년 이혼하였다.
2008년에 오스트리아 정부가 발행한 5 유로 카라얀 기념 주화
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6월 2일 베를린에서 있었던 카라얀 지휘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 대하여 별로 감동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악보 없이 지휘하던 카라얀이 잠시 길을 잃어서 성악가들이 노래를 중지했고 그래서 커튼이 내려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카라얀이 앞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절대 지휘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은 카라얀을 무척 좋아했다. 괴링의 후원으로 카라얀은 베를린의 슈타츠카펠레(1941-1945)를 지휘할수 있었으며 베를린 슈타츠오퍼(Staatsoper)에서 도합 150회의 오페라공연을 지휘할수 있었다. 1942년 10월 22일,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카라얀은 안나 마리아 ‘아니타’ 자우에스트(Anna Maria 'Anita' Sauest)와 재혼하였다. 독일의 귀터만(Güttermann)에서 태어난 아니타는 재봉틀 실을 생산하여 재산을 모은 사람의 딸로서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다. 그래서 아니타는 4분의 1 유태여인으로 간주되었다. 1944년 카라얀은 전쟁이 고조되었던 때에 나치 지도부로부터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연주회 프로그램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마 부인이 유태계라는 이유가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베를린에서 지휘를 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2월 18일, 카라얀은 나치를 피하여 부인 아니타와 단 둘이서 밀라노로 피신하였다. 베를린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얼마후 지휘자인 빅토르 드 사바타의 도움으로 이탈리아에 올수 있었다. 카라얀은 1958년 아니타와 이혼하였다. 전쟁이 끝난후인 1946년 3월, 오스트리아 정부의 나치협조자조사위원회는 카라얀을 나치협조자로 인정하여 기소하였다. 하지만 위대한 음악가를 매장할수는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카라얀이 나치에 동조했다는 근거는 희박했다. 그저 음악을 위해 어쩔수 없이 나치당에 가입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카라얀은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다시 시작하였다.
손끝으로 소리를 창조하는 마술사 카라얀. 비엔나신년음악회
1946년, 카라얀은 전후 첫 지휘를 비엔나에서 가졌다. 그러나 소련 점령군은 카라얀이 나치 당원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더 이상 비엔나에서 지휘할수 없다고 제동을 걸었다. 그해 여름, 카라얀은 이름을 달리하여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하였다. 그의 오페라 지휘는 놀라운 경지였다. 오스트리아는 국보와 같은 카라얀을 잃고 싶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소련 당국과 협상하여 카라얀에 대한 제약을 철회토록 했다. 1949년, 카라얀은 비엔나 악우회(비너 무직페어라인)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이어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를 지휘했다. 그러나 전후 이 시기에 카라얀의 가장 뛰어난 활동은 신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레코딩한 것이다. 카라얀은 런던 필을 세계 최고 교향악단의 하나로 육성하였다. 또한 그해로부터 카라얀은 평생동안 루체르네(Lucerne) 페스티벌에 참가하였다. 1955년, 카라얀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957년부터 1964년까지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예술감독으로 종사했다. 잘츠부르크가 고향인 그는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과는 별도로 이스터 페스티벌(부활절 축제)을 주도하였다. 1958년 10월 22일, 카라얀은 모델인 엘리에트 무레(Eliette Mouret)와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사벨(Isabel)과 아라벨(Arabel)의 두 딸이 태어났다. 카라얀은 1989년 아니프(Anif)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베를린 필과 비엔나 필을 열정적으로 지휘하고 레코딩하였다.
모델 출신의 부인 엘리에트 무레와 두 딸 이사벨과 아라벨과 즐거운 한때
카라얀이 있었기 때문에 CD 기술이 발전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카라얀은 CD 레코딩에 열정을 쏟았다. 카라얀은 종전의 LP보다는 새로 시도되는 CD 기술을 옹호하였다. 그래서 독일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DGG의 CD 레코딩을 선뜻 맡아서 지휘하였다. 1958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교향곡’이었다. 이때의 CD가 역사상 ‘알프스교향곡’을 가장 완벽하게 연주한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CD의 재생 시간은 처음에 60분이었으나 기술이 발전되어 74분까지 연장되었다. 이렇게 확장된 것은 카라얀의 주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카라얀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 한 장의 CD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카라얀은 과거 LP로 취입하였던 작품들을 CD로 재취입하는 작업에 몰두 했다. 특히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은 CD로 재취입되어 인기를 끌었다.
잘츠부르크 남쪽에 있는 아니프(Anif)마을의 봐써슐로쓰(Wasserschloss: 물의 성). 카라얀은 아니프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시 카라얀과 나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카라얀은 1933년 4월에 잘츠부르크에서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당원 번호는 1.607.525였다. 그 해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스트리아 정부는 나치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카라얀의 당원자격은 1939년까지 유효하였다. 1939년에 독일의 나치당은 구오스트리아 당원들의 자격을 재심사하였다. 카라얀의 당원자격은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나치는 카라얀이 1933년에 잘츠부르크가 아니라 울름(Ulm)에서 나치당에 가입했다고 소급하여 당원의 신분을 유지하도록 결정했다. 카라얀이 나치 당원이었으며 1933년 이후 독일에서 중요한 경력을 가졌었다는 것은 전후 그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었다. 카라얀의 변호인들은 카라얀이 나치에 가입했던 것은 음악적 경력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은 오토 클렘페러, 브루노 발터, 에리히 클라이버, 그리고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같은 저명한 지휘자들이 나치와 파치슴을 피하여 해외로 도피했음을 지적하고 카라얀이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나치에 진정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영국의 음악평론가인 리챠드 오스본(Richard Osborne)은 당시 유명한 지휘자들인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에르네스트 안세르메, 칼 슈리히트(Carl Schuricht), 칼 뵘, 한스 크나퍼츠부슈(Hans Knappertsbusch), 클레멘스 크라우스, 칼 엘멘도르프(Karl Elmendorff) 등이 나치 치하에서 활동했던 사례를 들며 당시 카라얀은 가장 경력이 없던 지휘자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카라얀, 그의 손끝에서 완벽한 음악이 창조된다.
한편, 일부는 카라얀의 나치당에 가입한 동기가 단순히 경력만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왜냐하면 카라얀은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기 훨씬 전인 1933년에 나치당에 가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발간되는 The Cultural Cold War(문화냉전)는 Who Paid the Piper?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카라얀은 1933년부터 나치당원이었으며 연주회에서는 나치의 애창곡인 Horst Wessel Lied부터 지휘한다’고 주장했다. 카라얀은 나치 점령하의 파리 연주회에서도 Horst Wessel Lied를 첫 순서에 넣어 지휘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카라얀이 되도록 음악회에서 정치적이거나 민족적인 제스추어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유태인인 아이작 슈턴(Isaac Stern),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 이착 펄만(Iszhak Perlman)등은 카라얀이 나치 당원이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연주를 할수 없다고 거부했다. 테너 리챠드 터커(Richard Tucker)는 1956년 Il Trovatore(일 트로바토레)를 취입할 때에 카라얀이 지휘한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취입을 거부하였다. 리챠드 터커는 카라얀과 함께 '아이다'를 취입하려는 마리아 칼라스에게도 강력히 얘기하여 취입을 거부토록 했다. 결국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으로 지휘자가 교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카라얀이 1942년 유태계인 아니타와 결혼하기 위해서 나치에게 충성을 서약하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을 폈다. 실제로 카라얀은 아니타와 약혼한 후 여러 사람으로부터 직장을 그만두라는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나치당에서 탈퇴할 생각까지 했었다는 것이다.
카라얀의 세번째 부인인 프랑스의 패션 모델이었던 엘리에트 무레
카라얀은 천부적인 지휘자이며 천재적인 지휘자였다. 그는 거의 모든 악보를 암기하여 지휘했다. 그는 손놀림만으로 놀라운 음악을 창조해 냈다. 그의 손가락에는 마술이 걸려 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로부터 아름다움 음향을 추축해내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이른바 ‘카라얀 사운드’는 말할수 없이 심미적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카라얀은 수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 1978년에는 옥스퍼드대학교로부터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파리에서는 Medaille de Vermeil을 받았으며 런던에서는 로열 필협회의 황금메달을 받았다. 아테네에서는 오나시스재단으로부토 올림피아상을 받았으며 유네스코 음악상을 받았다. DGG로부터는 두 번에 걸쳐 그라마폰상을 받았다. 말러의 교향곡 제9번 취입과 바그너의 Parsifal(파르지팔) 전곡 취입으로 받았다. 2002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상이 신설되었다. 2003년의 첫 번째 수상자는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조피 무터(Anne-Sophie Mutter)였다. 그는 1977년 카라얀 지휘로 데뷔했었다. 2004년에는 베를린 필이 받았으며 2005년에는 러시아의 천재 피아니스트 에프게니 키씬(Evgeny Kissin), 2006년에는 러시아의 지휘자인 발레리 게르기에프(Valery Gergiev), 2007년에는 미국의 발레 댄서이며 안부가인 존 노이마이어(John Neumeier), 200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Alfred Brendel)이 받았다.
제1회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상 수상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조피 무터
2008년 카라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EMI에서 카라얀 전집이 나왔다. 1946년부터 1984년까지 카라얀이 취입한 모든 음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EMI의 카라얀 CD 전집은 두 파트로 되어 있다. 첫 파트는 오케스트라 연주로 88개의 CD로 되어 있으며 둘째 파트는 오페라와 성악으로 72개 CD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감독 스탠리 쿠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카라얀이 지휘한 요한 슈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나온다. 일반적인 사운드트랙 제작방법은 장면에 맞추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인데 카라얀 지휘의 음악의 경우에는 장면을 음악에 맞추었다. 어느날 사람들이 카라얀에게 ‘어째서 베를린 필보다 비엔나 필을 지휘하기를 더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카라얀은 ‘내가 만일 베를린 사람들에게 한발짝 앞으로 나서라고 말하면 모두 그렇게 한다. 내가 만일 비엔나 사람들에게 한발짝 앞으로 나서라고 말하면 모두 그렇게 한다. 하지만 비엔나 사람들은 왜 한발짝 앞으로 나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라고 대답했다. 카라얀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 ‘모든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목적을 너무 낮게 잡은 사람이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한때. 잘츠부르크 인근 아니프 자택에서 엘이에트와 저녁 반찬에 대한 의논중(?)
카라얀은 1989년 7월 16일 잘츠부르크주의 서쪽 끝, 독일과의 접경 지대에 있는 아니프(Anif)라는 마을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였다. 카라얀은 그 전날 음반 취입 관계로 소니사 대표인 노리오 오가라는 사람과 상당한 언쟁을 벌인 일이 있다. 사람들은 그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카라얀은 다음날 오전에 '가면무도회'의 리허설 지휘를 평소처럼 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인 노리오 오가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들도 있다. 카라얀은 어찌보면 급작히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유산에 대하여 정확하게 유언장을 만들어 놓지 못했다. 그의 재산은 현재의 가치로 약 2억 5천 6백만 유로에 해당한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천억원이 넘는다. 카라얀의 사후, 그의 재산은 상당 부분이 카라얀 기념사업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라얀이 세상을 떠난 후, 잘츠부르크는 지기문트스플라츠라는 광장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플라츠(Herbert von Karajan Platz)로 변경하여 잘츠부르크 출신의 위대한 지휘자를 기념하였다. 비엔나는 1996년에 슈타츠오퍼 옆의 자허 호텔 방향 광장을 역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플라츠라고 명명했다. 잘츠부르크 공항의 터미널 중의 하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제느럴 애비에이션 터미날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91년에 카라얀의 모습을 담은 500 쉴링의 기념 주화를 발행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화폐 단위가 쉴링에서 유로로 바뀐 후인 2008년에는 카라얀의 모습을 담은 5유로 기념주화를 발행하였다. 1999년은 카라얀 서거 10주기였다. 그의 추도일을 기념하여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잘츠부르크의 대성당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했다. 아바도는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사람이다.
비엔나 슈타츠오퍼 옆의 광장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플라츠(광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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