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48 유덴플라츠(Judenpltz)

정준극 2009. 8. 6. 09:57

참고자료 48

 

유덴플라츠(Judenpltz) - 유태인광장

  

 

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 조형물 아래의 기단에는 맥주캔, 음료수병, 휴지등이 버려져 있다. 누가 이 거룩한 조형물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일까? 지나가는 노인(분명히 유태인)이 무심코 덤덤히 바라보고 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는 듯.

 

비엔나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유덴플라츠(유태인광장)는 중세 때에 비엔나 유태인사회의 중심지였다. 유덴플라츠는 암 호프(Am Hof) 광장과 슐호프(Schulhof), 그리고 뷔플링거슈트라쎄(Wipplingerstrasse)와 연결되어 있다. 유덴플라츠는 비엔나의 역사에서 유태인들이 경험한 고난과 핍박의 현장이다. 유덴플라츠가 비엔나에서도 오래된 지역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적을 보면 알수 있다. 광자의 한쪽에 있는 미스라히-하우스(Misrachi-Haus)에는 유태박물관이 들어서 있으며 이곳에서 중세 때의 시나노그(회당)의 유적을 볼수 있다. 유덴플라츠에는 두 개의 특별한 조각작품이 있다. 하나는 레싱(Lessing)의 기념상이며 또 하나는 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이다. 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은 시온주의자인 시몬 뷔젠탈(Simon Wiesenthal)의 아이디어에 의해 2000년 제막된 것이다. 영국의 조각가인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작품으로 강화콘크리트 큐브들을 마치 도서관 서가에 서적을 쌓아 놓은 것처럼 배열했다. 독일의 시인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은 유태인들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사상가이다. 유태인들은 그를 진정한 지식인으로 간주하여 그의 기념상을 유덴플라츠에 세웠다. 이렇듯 유덴플라츠는 유태인에 대한 기억의 장소이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이기도 하다. 유덴플라츠는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와 행정재판소가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유덴플라츠 주소판. 이것도 하나의 예술이다. 예전에는 Juden Platz라고 띠어서 썼는데 지금은 Judenplatz라고 붙여서 쓴다. 귀찮아서? 아니면 '대문자 종아하네'라며 얕잡아 보아서?

 

[유덴플라츠의 역사]

유태인들이 비엔나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1150년경이다. 옛 로마시대의 빈도보나에 해당하는 지역 중에서도 현재의 유덴플라츠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바벤버그 왕조도 비엔나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처음으로 유태인들이 거주지역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1294년 슐호프(Schulhof)라는 명칭으로였다. 이 명칭은 1421년 유태인에 대한 공개적인 박해 때까지 유지되었다. 1400년경에 이곳에는 약 8백명의 유태인들이 살았다. 대부분 상인이거나 금융업자였고 학자들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태인들의 거주지역은 확장되지 않을수 없었다. 북쪽으로는 마리아 암 게슈타데(Maria am Gestade)까지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티퍼 그라벤(Tiefer Graben)거리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투흐라우벤(Tuchlaubern)과 경계를 이루었고 남쪽으로는 암 호프(Am Hof)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당국은 유태인 지역이 점차 확장되자 제한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국은 슐호프를 중심으로한 유태인 지역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도록 사방을 담으로 둘러 격리하였다. 게토(Ghetto)의 시작이었다. 게토에는 담장을 따라 4개의 출입문을 만들었지만 주로 뷔플링거슈트라쎄(Wipplingerstrasse) 쪽에 있는 문을 사용토록 했다. 유태인에 대한 핍박의 전조였다. 유덴플라츠에는 유태인 병원, 시나노그(회당), 목욕탕, 랍비 주택, 유태인 학교등이 있었다. 아마 독일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유태인 거주지역으로서는 가장 체계적이고 정리된 곳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물인 시나노그는 현재의 요르단가쎄(Jordangasse)와 쿠렌트가쎄(Kurentgasse)의 사이에 위치했었다. 슐호프라는 말은 이곳에 유태인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비롯된 거리 이름이었다. 그러나 유태교 회당에서 기도하는 곳을 슐(Shul)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나중에 슐호프는 조그만 광장의 이름으로 변천되었다.

 

유덴플라츠 발굴시 발견된 중세 시나노그 유적

 

[비엔나 게제라]

알브레헤트 5세 공작의 시대에 비엔나의 유태인들은 드디어 참혹한 핍박을 받았다. 1420년 가을에 시작한 유태인 박해는 해를 넘겨 1421년 봄에 이르러 피비린내 나는 클라이막스를 이루었다. 처음에는 유태인들을 대거 체포하였다. 영문도 모른채 체포된 유태인들은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유태인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기 시작했다. 체포되거나 처형된 유태인 부모의 아이들은 강제로 집단 수용되었다. 아이들은 짐승들이나 먹을수 있는 불결한 음식을 먹어야 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아이들은 강요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세례를 받았다. 유태인들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유태인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게토에서 추방되었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 유태인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일부 저항하던 유태인들은 오르-사루아(Or-Sarua) 시나노그로 도피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항거하였다. 그러나 사흘을 견디지 못했다. 당장 먹을 물조차 확보하지 못한 이들은 결국 사흘 후에 마치 구약시대의 마사다와 마찬가지로 집단자살을 감행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일부 기록한 자료가 최근 발견되었다. Wiener Geserah(비엔나 게제라)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를 번역하면 ‘비엔나 칙령’(Vienna Decree)이 된다. 칙령이라는 단어에는 ‘신의 뜻’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에 의하면 당국이 시나노그를 포위하고 압박하자 랍비 요나(Jonah)가 대표로 시나노그에 불을 질러 모두 순교자로서 죽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태인들로서 박해와 강제 개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을 택하는 것이었다.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헤트 5세. 유태인 박해의 선도자

 

알브레헤트 5세의 명령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박해로 8백여 명의 유태인이 2백 명도 안되는 숫자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겨우 살아남은 2백여 명도 온갖 구실로 기소되었다. 가장 큰 구실은 후스파와 무기를 암거래했다는 것이다. 보헤미아 출신의 종교개혁가인 존 후스(John Huss: 1372-1415)는 가톨릭의 모순됨을 일일이 지적하고 반가톨릭 운동의 기치를 높이 든 사람이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후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가톨릭을 버리고 후스의 신봉자가 되었다. 가톨릭으로서는 후스가 암적인 존재였다. 철저한 가톨릭인 엘브레헤트 5세와 그의 스페인 부인은 반가톨릭의 배후에 유태인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유태인 박해를 시작한 것이다. 당국은 또한 유태인들이 비밀스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거의 2백명이나 되는 유태인이 1421년 3월 12일 에르드버그(Erdberg)의 넓은 풀밭(Gänseweide)에서 산채로 장작더미에 올려져 화장을 당했다. 알브레헤트 5세는 이제로부터 단 한명의 유태인이라도 오스트리아에서 살면 안된다고 선언했다. 유덴플라츠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재산은 모두 압수되었으며 집들은 당국이 팔아치웠고 시나노그의 돌은 쪼개어 그중 대부분은 구비엔나대학교의 건설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알브레헤트 5세의 생각대로 유태인들이 비엔나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유태인들이 차츰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돈이 있어서 집을 사서 살겠다는 데 누가 뭐라고 할 형편이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서서 레오폴드 6세는 비엔나 성곽 바깥쪽, 도나우 방향에 유태인들이 집단 거주토록 배려해 주었다. 이것이 현재의 제2구 레오폴드슈타트이다. 레오폴드 6세의 이름에서 비롯한 지명이다.

 

유덴플라츠 한쪽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물. 어, 쓰레기를 누가 치웠네! 치우는 사람도 있긴 있다.

 

[홀로코스트 기념물]

유덴플라츠의 북쪽에 홀로코스트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다.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태인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다. 가로 10m, 세로 7m, 높이 3.9m의 규모이다. 미스라히-하우스의 앞에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레싱의 기념상이 서 있다. 기념조형물은 유덴플라츠의 분위기와 어울리도록 설계되었다. 마치 광자의 둘레에 있는 어떤 건물의 방 하나를 광장 한가운데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다. 기념조형물의 벽은 도서관의 서가에 책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이다. 다만, 책의 등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되어 있어서 어떤 제목의 책들인지 알수 없다. 바닥의 기단에는 유태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나치의 41개 강제수용소 명단이 적혀 있다. 이름 없는 도서관 구조물은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양쪽으로 출입문이 있다. 물론 형식상의 문일 뿐이며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념조형물은 바로 앞의 미스라히-하우스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미스라히-하우스에는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6만5천명의 유태인 명단이 정리되어 있어서 컴퓨터로 찾아볼수 있다. 기념조형물을 건립하기 위해 1995년 5월부터 1998년 11월까지 굴착작업이 진행되었다. 땅을 파다가 지하에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대단한 주의를 기울이며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비엔나에서 수행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과연, 땅속에서 집터가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중세 시나노그의 폐허였다. 시나노그를 둘러 싼 돌담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우물과 창고가 있던 터도 발견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세의 유태교 회당인 것으로 밝혀졌다. 유적은 보관되어야 했다. 홀로코스트 기념물을 원래 계획한 위치에서 1m 이동하여 설치키로 했다. 2000년 가을에 가서야 전반적인 광장의 균형에 맞는 조형물이 완성되었다.

 

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 오프닝 후에 찾아온 사람들

 

[미스라히-하우스]

유덴플라츠 8번지는 미스라히-하우스이다. 중세때부터 유태교 회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1694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는 유태박물관의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스라히-하우스를 유태박물관의 일부로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는 1997년에 나온 것이다. 1995년부터 진행된 유덴플라츠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에 따라 옛 유태교 시나노그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유적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미스라히-하우스에 전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유덴플라츠의 전체적인 환경으로 보아 마시라히-하우스가 유물 전시장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중세의 유태인들의 생활에 대한 기록물들도 전시키로 했다. 특히 1421년 ‘비엔나 칙령’(Wiener Geserah) 당시의 유태인 생활에 대한 내용을 중점 전시키로 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관련해서는 오스트리아 레지스탕스로부터 지원받은 자료들도 충분히 활용키로 했다. 마스라히-하우스에서는 알브레헤트 5세에 의해 파손된 시나노그의 잔영을 볼수 있다. 크게 세파트로 나눌수 있다. 첫째는 남자들이 기도하고 가르침을 받는 ‘남자들의 슐’(Men's shul)이며 다음은 규모가 작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여자들의 기도장소이다. 그리고 토라를 읽는 육각형의 강단이 있다.

 

미스라히-하우스에 붙어 있는 기념 명판. 2001년 4월달에 오스트리아유태인협회가 설치했도다.

 

[레싱기념상]

유덴플라츠의 남쪽에는 독일의 시인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기념상이 웅장하게 서 있다. 지그프리트 샤루(Siegfried Charoux: 1896-1967)의 작품이다. 레싱기념상은 1932년에 완성되어 1935년에 제막되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지 1년후인 1939년, 나치는 레싱이 유태인에 대하여 호의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광장의 기념상을 해체하여 녹여버렸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다. 레싱은 1775-76년간 비엔나를 방문하여 지내면서 계몽주의 황제인 요셉 2세와 대화를 나누었다. 레싱은 요셉 2세에게 영향을 주어 비엔나의 계몽문화에 대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레싱의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은 계몽주의의 교과서와 같은 것이며 정치와 사상에 있어서 관용에 대한 아이디어를 형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이었다. 1962년에 지그프리트 샤루는 또다시 레싱의 기념상 제작을 의뢰받았다. 청동으로 제작된 레싱의 기념상은 1968년 루프레헤츠키르헤(루프레헤트교회)에서 제막되었다. 그후 1981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었다.

 

레싱 기념상. 레싱은 계몽주의 지성인이었다.

 

[보헤미아 호프칸츨라이](Böhmische Hofkanzlei)

호프칸츨라이는 궁정사무국을 말한다. 하지만 대사관이라는 의미도 있다. 유덴플라츠 11번지의 건물은 비엔나에서도 아름다운 건물로 알려진 보헤미아 호프칸츨라이이다. 보헤미아가 왕국으로 있을 때에 비엔나에 주재하던 대사의 관저이기도 했다. 지금은 한쪽에 오스트리아 행정재판소(Verwaltungsrerichtshofs)가 들어서 있으며 다른 한쪽은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Verfassungsgerichtshofs)가 차지하고 있다. 이 건물은 1709-1714년에 거장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어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가 완성했다. 현재의 행정재판소 건물이다. 1751-1754년에 마티아스 게를(Matthias Gerl)이 원래의 건물과 똑 같은 건물을 옆에 연결하여 지었다. 현재 헌법재판소가 들어 있는 건물이다. 현재 유덴플라츠를 향하여 있는 입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만든 것이다. 그전에는 반대 방향에 현관이 있었다. 정면 현관 위의 여신상은 네가지 덕목을 의미한다. 절제(Moderation), 정의(Justice), 현명(Wisdom), 용기(Bravery)를 말한다. 그 상단에는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문장이 걸려있다. 지붕 라인의 중간에는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는 조각이 있으며 어린 천사들이 둘러서서 함께 찬양하고 있다. 지붕 라인에 있는 두명의 남자 조각은 아마도 보헤미아 왕인 벤체슬라우스 1세와 벤체슬라우스 2세일 것이다.

 

보헤미아 호프칸츨라이. 외관도 아름답지만 내부는 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