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61
모르친플라츠와
호텔 메트로폴(Hotel Metropol)
슈베덴플라츠(Schwedenplatz)에서 쇼텐링쪽으로 잠시 가다보면 도나우카날(Donaukanal: 도나우운하)을 건너는 잘츠토르브뤼케(Salztorbrücke)가 나온다. 잘츠토르브뤼케에서 시내 방향으로 루프레헤츠키르헤(Ruprechtskirche)가 우뚝 보이고 그 앞 전차길에 면하여서 별로 그럴듯하지 못한 광장이 있다. 모르친플라츠(Morzinplatz: 모르친광장)이다. 나무가 우거져 있는지도 않고 벤치도 없다. 다만, 전차길 쪽으로 커다란 돌들을 고인돌처럼 쌓아 놓은 조형물이 있다. 조형물의 가운데 부분에는 어떤 남자가 마치 좁은 문을 겨우 통과하며 들어가는 듯한 모습의 조각이 있소 여러 글들이 적혀 있다. 나치 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호텔 메트로폴에 끌려가 모진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다.
모르친플라츠. 슈베덴플라츠에서 쇼텐링쪽으로 올가가다 보면 나온다.
쇼텐토르에서 슈베덴플라츠까지의 링(Ring)거리는 비엔나에서도 비교적 한산한 지역이다. 이 거리에는 관광객들이 무조건 들릴만한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별히 슈베덴플라츠를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없다.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는 루프레헤츠키르헤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그런데 모르친광장의 옆길에 관광버스들이 여러 대 서 있는 것은 교통이 비교적 한산한 이곳이 시내를 관광하는 사람들을 내려주고 다시 태우는 만남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관광객들은 모르친광장을 그냥 지나쳐 갈뿐이다. 모르친광장은 프란츠 요셉 황제 시대에 합스부르크의 장군인 페터 프로코프 모르친(Peter Prokop Morzin: 1768-1855) 백작을 기념하여 1888년에 그의 이름을 붙인 광장이다. 보헤미아의 루카비츠(Lukawitz)에서 태어난 모르친 백작은 젊은 시절에 오스트리아제국의 육군에 입대하여 나중에는 오스트리아군 군수사령관까지 지낸 장군으로 1849년 퇴역하였다. 그는 평소에 가나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선을 행하였다. 그래서 모르친 장군은 자선가로서 더 이름이 알려져 있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모르친 백작이 슈베덴플라츠의 인근 성벽에 보루를 건축했기 때문에 모르친플라츠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876년의 프란츠-요셉스-카이 일대. 제국의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으며 말이 전차를 끌고 있다. 멀리 가운데 있는 건물이 호텔 메트로폴이다. 이 호텔은 1873년 비엔나 만국박람회를 기하여 건설되었다.
오늘날 모르친광장의 한쪽에는 모르친 백작의 저택이 있었다고 한다. 모르친 백작의 저택은 나중에 크게 보수하여 호텔 메트로폴이 되었다고 한다. 호텔 메트로폴은 2차 대전의 막바지에 포격을 받아 크게 파손되었다. 현재 호텔 메트로폴이 있던 자리에는 레오폴드 휘글 호프(Leopold Figl Hof)라는 주거건물(보눙: 아파트)이 들어서 있다. 그렇지만 비엔나의 오래된 시민들은 아직도 호텔 메트로폴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다. 1938년 3월,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마자 모르친광장에 있는 호텔 메트로폴은 나치 게슈타포의 본부(Gestapoleitstelle)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비교적 한적한 곳이기 때문에 게슈타포 본부로 정했던것 같다. 게슈타포는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반파치스트, 유태인 들을 사냥하여 이곳에 데려와 모진 고문을 감행하였다. 메트로폴에서는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기 그칠 날이 없었다. 메트로폴에 소환당해 오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이목이 있기 때문에 호텔 정문을 통하지 않고 항상 뒷문을 통해 게슈타포 사무실을 찾아왔다. 뒷문을 거쳐 들어가면 계단을 통해 지하실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다. 지하실에서는 취조와 고문이 병행된다.
모르친플라츠의 호텔 메트로폴(전쟁 전)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죽어간 사람들도 많다. 고문을 두려워하여 자살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심문이 끝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유죄판결을 받아 동부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메트로폴 후문에는 사람들을 비엔나 남쪽의 아슈페른 기차역으로 이송하는 트럭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메트로폴 호텔로 오라는 소환장을 받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메트로폴은 비엔나의 유태인들을 강제로 잡아서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사무실 역할을 했다. 아돌프 아히이만(Adolf Eichmann)이 책임자였다. 메트로폴은 전쟁 막바지인 1945년 3월에 대대적인 포격을 받아 크게 훼손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비엔나 시민들은 너도나도 악명 높았던 메트로폴로 몰려와 남아 있던 기물을 파손하며 분풀이를 했다. 얼마후 누군가 메트로폴 호텔 앞의 모르친 광장에 큰 돌을 가져다 놓았다. 유태인들은 죽은 자를 추모할 때에 무덤에 돌을 얹어 놓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또 얼마후에는 본격적인 추모조형물이 세워졌다. 조형물의 중앙 상단에는 '절대로 잊지 말자'는 글이 크게 적혀 있다. 조형물에 대한 설명은 본 블로그의 ‘비엔나의 기타 기념물’편을 참고하시기 바람.
절대로 잊지 맙시다(Niemals vergessen). 나치희생자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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