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60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정준극 2009. 8. 8. 22:15

참고자료 60

 

메타스타시오가쎄와

시인 겸 극작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1698-1782). 오페라 대본가로 유명했다.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의 자비‘의 대본을 쓴 시인이다. 메타스타시오의 영묘는 비엔나의 미노리텐키르헤에 설치되어 있다. 메타스타시오가 합스부르크의 궁정 계관시인일 때에 하이든은 슈테판성당의 합창단원을 그만두고 나와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이든은 미하엘교회의 뒤편, 메타스타시오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메타스타시오는 하이든이 쳄발로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감동하여 하이든에게 레슨을 받을 제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메타스타시오와 하이든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미노리텐키르헤에 있는 메타스타시오의 기념상 하단에는 그의 임종을 그린 그림이 있다. 교황 비오 6세가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있고 그 옆으로 하이든, 살리에리, 모차르트가 서 있는 그림이다. 메타스타시오의 기념상이 미노리텐키르헤에 있는 것은 이 교회가 비엔나에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중심교회이기도 하지만 미노리텐 수도회가 아씨씨의 성프란치스코수도회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씨씨는 메타시타시오의 아버지의 고향이다. 메타스타시오는 계관시인으로서 위대한 시를 많이 남겼다. 여러 작곡가들이 메타스타시오의 시를 기본으로 음악을 작곡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차르트와 하이든, 그리고 살리에리도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뛰어난 극작가이기도 했다.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극작가로서 메타스타시오에 비견할만한 인물은 그릴파르저(Grillparzer)밖에 없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만든 '티토의 자비'의 한 장면

 

메타스타시오는 예명이며 원래 이름은 피에트로 안토니오 도메니코 트라파씨(Pietro Antonio Domenico Trapassi)이다. 그는 1698년 1월 3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씨씨가 고향인 그의 아버지 펠리체 트라파씨(Felice Trapassi)는 교황청을 수비하는 크로아티아 연대에서 복무하였다. 그러던중 로마에서 볼로냐 출신의 프란체스카 갈라스티(Francesca Galasti)를 만나 결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막내가 메타스타시오였다. 아버지는 결혼후 교항청 수비병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동네 슈퍼를 열어 생활을 꾸려나갔다. 메타스타시오는 어찌된 일인지 아직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즉흥시를 읊는 것을 좋아했다. 메타스타시오는 마치 삼행시를 지을 때처럼 사람들이 운을 떼주거나 또는 어떤 제목을 주면 즉각 시를 읊거나 스토리로 이어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너 참 용하다’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1709년의 어느날, 그날도 어린 메타스타시오는 사람들 앞에서 즉흥시를 읊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어떤 신사 한분이 어린 메타스타시오의 시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조반니 빈센조 그라비나(Giovanni Vincenzo Gravina)였다. 그는 법률가로서 당시 아르카디안 아카데미(Arcadian Academy)에도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었으며 문학평론도 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라비나는 아주 똑똑하고 귀엽게 생긴 어린 메타스타시오의 문학적 재능에 감명을 받았다. 예술을 좋아하는 그로서, 자식이 없는 그로서 메타스타시오와 같은 재주가 있는 아이의 후견인이 되는 것은 삶의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몇주후에 정말 그는 메타스타시오를 양자로 맞아 들였다. 메타스타시오의 아버지인 펠리체 트라파씨로서는 자기 아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고 또한 상류사회에도 진출할수 있게 되어 ‘경사 났네, 경사 났네’라면서 매우 기뻐했다.

 

미노리텐키르헤에 있는 메타스타시오의 영묘 하단의 부조.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침상 위의 메타스타시오 뒤편에 서있으며 애통해 하고 있다.

 

메타스타시오라는 그리스 스타일의 이름은 그라비나가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라비나는 양자로 받아들인 메타스타시오를 자기와 똑같은 수준의 지식인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우선 메타스타시오에게 라틴어와 법률 공부를 시켰다. 이와 함께 그라비나는 어린 천재인 메타스타시오의 문학적 소양을 개발하고 양성하기 위해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기 집에 손님들을 초대하여 메타스타시오의 시를 듣게 하였고 어떤 때는 로마의 문학동호모임인 코터리(Coterie)에도 데리고 가서 즉흥시를 읊게 했다. 메타스타시오의 이름은 점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메타스타시오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해야했다. 그러다가 보니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그라비나는 메타스타시오를 태양의 항구도시 나폴리 인근해안의 시골로 데리고 갔다. 그는 이곳에서 메타스타시오를 친척인 조르지오 카로프레세(Giorgio Caroprese)라는 사람에게 맡겼다. 메타스타시오는 시골에서 맑은 공기와 빛나는 햇빛으로 인하여 점차 건강을 되찾아갔다. 양아버지인 그라비나는 더 이상 어린 메타스타시오를 즉흥시 테스트에 내보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대신, 공부를 마치면 로마에 와서 당대의 위대한 시인들과 견주어 보기로 했다.

 

메타스타시오는 자기를 후원해준 그라비나와 카로프레세의 소망에 보답했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과 12세 때에 호머의 일리아드를 8행 연구(옥타브)의 스탠자(Stanza)로 다시 썼다. 놀라운 재능이었다. 2년 후에 그는 지안 조르지오 트리씨노(Gian Giorgio Trissiono)의 이탈리아 리베라타(Italia Liberata)에서 주제를 삼아 세네카의 비극을 작성했다. 이탈리아 리베라타는 그리비나가 가장 애착하는 서사시였다. 메타스타시오의 작품은 주스티노(Giustino)라고 불렀다. 1713년에 발간되었다. 42년이 지난 후에 메타스타시오는 소년시절의 작품인 주스티노가 유치해서 보기도 싫다고 말했다. 카로프레세는 171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재산 상속자는 그라비나였다. 그런데 그라비나도 1718년에 세상을 떠났다. 메타스타시오가 무려 1만 5천 스쿠디(Scudi)에 이르는 재산을 상속받았다. 메타스타시오는 로마의 아르카디안 아카데미에서 거행된 그라비나 추도모임에서 조사를 낭독했다. 그런 후에는 넉넉한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였다.

 

미노리텐키르헤에 있는 메타스타시오의 기념상 

 

메타스타시오는 이제 20세의 청년이 되었다. 자기의 진로를 결정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지난 4년동안 그는 성직자의 옷을 입고 다녔다. 혼자가 된 그는 어떤 수도회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로마에서 출세하려면 수도원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로마의 사교모임에 꽃으로 등장하였다. 메타스타시오는 입만 열면 줄줄 흘러나오는 로맨틱한 서사시, 잘 생긴 얼굴, 화려한 의상, 매력적인 맨너, 그리고 높은 수준의 지성으로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과 2년만에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물려받은 재산은 거의 바닥을 냈다. 그는 남들처럼 확실하고 안정된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폴리로 간 그는 카스타뇰라(Castagnola)라는 변호사의 사무실에 취직하였다. 카스타뇰라는 메타스타시오를 혹사하며 일을 배우게 했다. 메타스타시오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계속하여 세레나데와 같은 작품을 썼다. 어떤 때는 익명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그가 쓴 Gli orti esperidi 라는 시는 니콜라 포르포라(Nikola Porpora)가 음악을 붙여 오페라로 만들었다. 주역은 작곡가 포르포라의 제자인 카스트라토 화리넬리(Farinelli)가 맡았다. 극장에서 화리넬리의 아리아는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인하여 최대의 갈채를 받았다.

 

'티토의 자비'의 무대

 

모두들 오페라의 대본을 누가 썼는지 궁금해 했다. 오페라에서 비너스 역을 맡았던 로마의 프리마 돈나인 마리안나 불가렐리(Marianna Bulgarelli)는 오페라의 대본을 메타스타시오가 쓴 것을 알았다.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에게 변호사 사무실을 그만두고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음악극(오페라)에 투자한다면 부와 명예를 모두 쥐어잡을수 있다고 설득했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집에서 당대의 유명 작곡가들을 만나 친분을 쌓을수 있었다. 요한 아돌프 하쎄(Johann Adolph Hasse),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알레싼드로 스칼라티(Alessandro Scalatti), 레오나르도 빈치(Leonardo Vinci), 레오나르도 레오(Leonardo Leo), 프란체스카 듀란테(Francesca Durante), 베네데토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등이었다. 훗날 이들은 거의 모두 메타스타시오의 시에 멜로디를 만들어 붙인 작곡가들이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집을 방문하면서 성악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대의 카스트라토인 화리넬리와 흡사한 스타일로 노래부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메타스타시오가 시를 쓰면 당대의 성악가들이 줄을 서서 그의 시에 노래를 붙인 작품을 노래부르고자 했다. 간혹 신문은 메타스타시오의 줄거리가 상투적인 것이며 상황설정도 역사적 사실과 앞뒤가 맞지 않는 불합리한 것이고 또한 너무 지나치게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평을 보냈지만 음악이 너무 훌륭하여 그런 비평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로마의 키에사 누오바 거리(P{iazza della Chiesa Nuova)에 있는 메타스타시오 기념상

 

메타스타시오는 로마에서 불가렐리의 집에 기숙하며 지냈다. 물론 불가렐리는 결혼하여 남편이 있었고 또한 메타스타시오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불가렐리는 그라비나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메타스타시오의 후원자가 되었다. 불가렐리는 로마에서 식료품점을 하고 있던 메타스타시오의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 들을 모두 자기 집에 와서 지내도록 했다.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의 재능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했다. 물론 그 때문에 메타스타시오가 간혹 버릇없는 사람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영향으로 여러 작품을 속속 완성하였으니 예를 들면 Didone abbandonata(버림받은 디도), Catone in Utica(우티카의 카토네), Ezio(에지오), Alessandro nell'Indie(인도에 간 알렉산더 대왕), Semiramide riconosciuta(세미라미데), Siroe(시로에), Artaserse(아르타세르세) 등이다. 이들 드라마는 당대의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작곡하여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에서 공연되었다.

 

그러는 한편, 불가렐리는 점점 나이가 들어 대중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가 지금까지 자기에게 보여준 호의에 대하여 점점 부담감을 갖게 되었다. 메타스타시오는 그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가 공연될 때마다 3백 스투디의 사례금을 받았다. 물론 상당한 수입이었지만 메타스타시오로서는 고정적인 수입이 아니기 때문에 불안한 감이 있었다. 메타스타시오는 고정적인 수입을 원했다. 1729년, 그는 비엔나의 극장으로부터 연봉 3천 플로린으로 궁정시인의 자리를 제안 받았다. 메타스타시오는 즉각 수락했다. 불가렐리는 그의 결정을 환영하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의 비엔나행을 축하해 주었다. 불가렐리는 로마에 남아 있는 메타스타시오의 가족들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메타스타시오는 가벼운 마음으로 비엔나로 떠났다.

 

1730년 여름, 메타스타시오는 비엔나의 미하엘러하우스라고 불리는 아파트에 정착했다. 미하엘러키르헤 뒤편에 있는 집이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예술 활동이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메타스타시오는 이때에 청년 하이든을 만나 그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메타스타시오는 1730년부터 1740년에 이르기까지 10년동안 그의 걸작들이라고 할수 있는 작품들을 완성했다. Adriano(아드리아노), Demetrio(드미트리우스), Demofoonte(데모폰테), Olimpiade(올림피아드), Clemenza Di Tito(티토의 자비) 등이다. 이들 드라마는 모두 제국극장의 무대에 올려졌다. 어떤 작품은 특별행사를 위해 급히 완성해야 했다. Achille(아킬레스)는 18일만에 완성되었고 Ipermestra(이페라메스트라)는 불과 9일만에 완성되었다. 시인, 작곡가, 악보 사보자 등이 서로 협동하여 놀랍도록 빠른 시일 안에 작품을 무대에 올릴수 있도록 했다. 메타스타시오는 과거 로마나 나폴리에서 그런 경우를 여러번 경험했기 때문에 속전속결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또한 작품을 어떻게 써야 관중들이 좋아하는지도 알았다. 클라이막스가 어느 시점이라는 것을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었다.

 

로마에서는 사교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지만 비엔나에서는 달랐다. 메타스타시오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어 귀족 사회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메타스타시오는 다른 데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로마에서 자기를 후원해 준 벨몬테 피냐텔리(Belmonte Pignatelli) 공주의 동서가 되는 알탄(Althann) 백작부인을 알게 되었다. 알탄 백작부인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 혼자 살고 있었다. 한때는 프란츠 요셉 황제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메타스타시오와 알탄 백작부인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해서 혹시 두사람이 비밀결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의심을 받을 정도였다. 한편, 로마에 있는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가 비엔나로 가버리자 마음이 몹시 허전했다.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에게 연락하여 궁정오페라에서 출연할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메타스타시오는 이제 불가렐리에 대하여 지쳐있었다. 너무나 자기에게 집착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싫어질 정도였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에게 연락하여 비엔나에 오지 않도록 설득했다. 편지를 받은 불가렐리는 너무나 당황했다. 설마 메타스타시오가 자기에게 이렇게 쌀쌀맞게 대할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편지에 쓴 어투가 마치 자기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불가렐리는 비엔나로 직접 가서 메타스타시오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길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뜻밖에도 세상을 떠났다. 불가렐리는 자기의 남은 재산을 모두 메타스타시오에게 남겼다. 메타스타시오는 착잡한 심정에서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얼마후 불가렐리의 남편은 다른 여자와 재혼하였다. 불가렐리의 집에 기숙하고 있던 메타스타시오의 가족들은 어찌할 줄 모르다가 집을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메타스타시오의 비엔나 생활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그놈의 날씨가 영 아니올시다였다. 뼈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우중충한 날씨는 그의 건강을 좀먹어 갔다. 메타스타시오는 1745년 이후 작품을 활발하게 쓰지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쓴 칸타타와 Ecco quel fiero istante라는 칸소네타는 그의 전체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타스타시오는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점점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1755년 알탄 백작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메타스타시오는 사람들을 점점 더 만나지 않게 되었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전재산을 친구인 마르티네즈(Martinez)의 여섯 자녀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유언장을 만들었다. 도합 13만 플로린이라는 거금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먹여 살렸다.

 

메타스타시오는 약 40년이나 비엔나에서 지냈다. 말년에는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인기는 유럽 전역에서 결코 시들지 않았다. 그는 비엔나에서 약 40편의 작품을 썼다. 모두 이탈리아어로 쓴 것이다. 이들 중에서 대부분은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 여러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작곡한 경우가 많았다. 오페라로 만든 메타스타시오의 작품들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정상급 성악가들이 노래로 불렀다. 유럽 여러나라의 예술원들은 메타스타시오를 명예회원으로 모셨다. 비엔나 콜마르크트에 있는 그의 집에는 낯선 나그네들이 자주 찾아온다. 위대한 시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