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63 슈타츠오퍼(Staatsoper) - 국립오페라극장

정준극 2009. 8. 10. 12:23

참고자료 63

오페른가쎄-오페른링과

슈타츠오퍼(Staatsoper) - 국립오페라극장

 

슈타츠오퍼

                                 

거듭 말하지만 슈타츠오퍼는 비엔나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슈테판성당을 비엔나의 영혼이라고 한다면 슈타츠오퍼는 비엔나의 심장이라는 말이 있다. 슈타츠오퍼는 그만큼 비엔나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이다. 비엔나 슈타츠오퍼는 비엔나에 있는 국립오페라극장을 말하기도 하고 이 극장에 속하여 있는 비엔나 국립오페라단을 말하기도 한다.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은 전통적으로 비엔나 필하모니커 단원들로 구성된다. 슈타츠오퍼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 여러번의 설명이 있지만 슈타츠오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해 다시 정리해 보았다.   

 

1860년대 초반, 대대적인 비엔나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현재의 제1구 인네레 슈타트를 둘러싸는 링슈트라쎄 대로가 만들어졌고 대로를 따라서 제국의 위용을 나타낼수 있는 건물들이 들어섰다. 가장 먼저 건설에 들어간 것이 슈타츠오퍼(당시에는 호프오퍼)였다. 무엇보다고 절실했던 것이 오페라극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의 귀족들은 밥은 못 먹어도 오페라는 보아야 했던 모양이었다. 슈타츠오퍼는 186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8년만인 1869년에 완공되었다. 링슈트라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에 건설했다. 젊은 건축가인 아우구스트 지카르트 폰 지카르즈부르크(August Sicard von Sicardsburg)와 에두아르트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이 공동으로 설계했다. 슈타츠오퍼의 건물은 네오-르네상스 스타일이었다. 슈타츠오퍼는 비엔나에 세워진 최초의 오페라전용극장이었다.

 

슈타츠오퍼에서의 모차르트 연주회

 

그러나 신축된 슈타츠오퍼 건물은 사람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사람들은 파리의 오페라극장처럼 화려한 건물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커다란 상자와 같은 밋밋한 건물이었다. 슈타츠오퍼의 바로 건너편에는 하인리히스호프(Heinrichshof)라고 하는 대규모 개인저택이 있었다. 슈타츠오퍼는 명색이 국립오페라극장인데 맥주장사로 돈을 번 하인리히 드라셰(Heinrich Drasche)의 개인 저택인 하인리히스호프보다도 볼품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인리히스호프는 2차대전중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1955년에 오페른링호프(Opernringhof)로 바뀌었다. 1980년대에는 이 오페른링호프에 대한항공 사무소가 있었으며 현재는 한국인 면세품 가게인 손(孫) 샵이 들어있다. 슈타츠어퍼에 대한 문제는 또 있었다. 슈타츠오퍼의 건설이 시작된 이후 그 앞의 링슈트라쎄(오페른링)의 길이 약 1m 정도 높아졌다. 나중에 슈타츠오퍼가 완공되고나서 보니 슈타츠오퍼는 마치 땅 속으로 푹 꺼져 들어간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침몰한 상자’라는 별명을 들었다. 슈타츠오퍼에 대한 또 다른 별명도 있다. ‘건축의 쾨니히그래츠(Königgrätz)’이었다. 슈타츠오퍼가 한창 공사 중이던 1866년에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와 쾨니히그래츠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의 완전패배로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이를 보고 쾨니히그래츠의 재앙이라고 말했다. 슈타츠오퍼가 바로 그러한 재앙이었다는 것이다.

 

슈타츠오퍼에서 음악회와 연극 티켓을 팔고 있는 청년들

 

프란츠 요셉 황제는 건축중인 슈타츠오퍼에 대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도 있고 하여서 지나가는 말로 ‘무슨 건물이 이래?’라고 말했다고 한다. 건축가인 에두아르드 반 데어 뉠은 황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나 충격을 받아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자살했다. 비엔나 사람들은 자살도 잘한다. 그로부터 10주 후에 또 다른 건축가인 지카르즈부르크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두 사람 모두 슈타츠오퍼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1869년 5월 25일 역사적인 슈타츠오퍼 오프닝이 있었다. 개관기념 공연은 모차르트의 Don Giovanni(돈 조반니)이었다. 합스부르크 기간 중에 슈타츠오퍼는 K.K. 호프오퍼(Hofoper)라고 불렀다. K.K.는 카이저(Kaiser: 오스트리아제국 황제)와 쾨니히(König: 헝가리 왕)를 의미하여 호프오퍼는 ‘궁정오페라’라는 뜻이다. 현재의 비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차 대전후 합스부르크 제국이 종말을 고한지 2년후인 1920년부터였다.

 

슈타츠오퍼 공중사진. 바로 뒤가 자허호텔


[전쟁 후의 복구]

슈타츠오퍼는 2차 대전의 막바지에 폭격을 받아 크게 훼손되었다. 1945년 3월 12일의 일이었다. 미군기의 폭격을 받았다. 미군 폭격기는 원래 나치가 장악하고 있던 플로리드스도르프(Floridsdorf)의 라피네리(Raffinerie)라는 정유공장을 목표로 삼았으나 목표지점을 잘못 아는 바람에 애꿎은 슈타츠오퍼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 관중석과 무대가 불길에 휩싸였다. 창고에 있던 무대장치들과 의상들이 모두 불에 탔다. 무대장치는 120편 이상의 오페라를 공연할수 있는 장치들이었다. 의상은 15만벌이 넘었다.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정면의 현관부분과 회랑(포이어), 계단,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프레스코화는 피해를 보지 않았다. 슈타츠오퍼의 사무실은 전쟁이 끝나고 슈타츠오퍼에 대한 복구가 진행되는 기간 중에 Theater an der Wien(테어타 안 데어 빈)과 Volksoper(폭스오퍼)로 분산되었다. 슈타츠오퍼의 오페라단은 슈타츠오퍼가 폭격으로 파손된 후에 폭스오퍼에 모여 ‘우리말야,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하며 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4월에 사실상 비엔나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자 연습 장소를 테아터 안 데어 빈으로 옮기고 그해 5월 1일에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슈타츠오퍼의 해방후 첫 공연을 가졌다. 그후 슈타츠오퍼 오페라단은 슈타츠오퍼 건물의 복구공사가 진행되는 기간에 주로 해외공연을 가졌다. 외국의 주요 오페라극장에는 필요한 무대장치들과 의상들이 대개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공연이 수월했었다. 1947년 슈타츠오퍼의 런던 방문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슈타츠오퍼의 샹들리에

 

전후 슈타츠오퍼의 복구와 관련하여서는 의견이 분분했었다. 우선 그 자리에 똑 같은 건축양식으로 복구하느냐, 또는 건물을 모두 허물고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건축하느냐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었다. 또 다른 논쟁은 바로 그 자리에 복구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장소를 물색하여 새로 건축하느냐는 사항이었다. 결국, 바로 그 자리에 바로 옛날 스타일 그대로 재건하자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복구공사는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 에른스트 콜프(Ernst Kolb)가 1948년부터 1952년까지 공사 책임을 맡았으며 우도 일리히(Udo Illig)가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책임을 맡았다. 원래 오스트리아 정부는 슈타츠오퍼를 1949년까지 복구할 계획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당시 연방수상이던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은 슈타츠오퍼를 1949년까지 복구하되 전에 비하여 보다 기능적으로 개선한다는 결정을 내린바 있다. 이에 따라 슈타츠오퍼 내부 효능개선을 위한 설계공모가 있었고 에리히 볼텐슈타인(Erich Boltenstein)이 최종 선정되었다. 개선 내용으로는 우선 관중석(Auditorium)을 대대적으로 재구성한다는 사항이 들어 있었다. 볼텐슈타인은 관중석 개선에 1950년대 현대적 감각의 설계를 반영하였다. 건축자재는 최상의 음질을 보장하기 위해 철제 대신에 주로 목재를 사용하였다. 슈타츠오퍼 재건에 따라 구성된 음향위원회의 자문에 의해서였다. 그중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스 형태의 관람석도 수를 줄였다. 관객석은 입석 567개를 포함하여 2천1백석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4층 객석의간격에 좀더 여유가 있게 되었다. 갤러리에 원래 있었던 기둥들도 모두 없앴다. 이른바 슈빈트 회랑(Schwind Foyer)의 프레스코화는 오리지널 스타일로 말끔히 복원되었다.

 

12월 31일 섣달 그믐날 밤 슈타츠오퍼에서 송년기념으로 공연된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

 

슈타츠오퍼는 임시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 테어터 안 데어 빈이 지나치게 인색하게 굴고 텃세를 부리기만 하자 어서 속히 슈타츠오퍼를 복구하여 본집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슈타츠오퍼의 식구들은 서름 중에서도 집없는 서름이 가장 크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슈타츠오퍼는 복구공사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펼쳤다. 개인들도 모금함에 돈을 넣었지만 기업들이 많은 후원을 하였다. 물론 모금한 돈으로 슈타츠오퍼를 재건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이지만 적어도 커다란 발판은 되었다. 슈타츠오퍼의 재건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던 소련은 대리석 등 건축자재를 기증하였다. 공사만료기간은 1949년으로 잡았지만 1949년에는 정작 지붕이 완성되지 못하였다. 공사는 계속되었고 1955년 10월 말에야 모든 공사가 완료되었다. 마침 1955년은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하는 오스트리아조약이 체결된 해였다. 1955년 11월 5일, 슈타츠오퍼가 재개관되었다. 개관기념 공연은 베토벤의 Fidelio(휘델리오)였다. 거장 칼 뵘(Karl Böhm)이 지휘를 맡았다. 외빈으로서는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참석했다. 공영 ORF는 이날의 공연을 최초로 TV실황중계 방송을 하였다. 당시 오스트리아 전국에는 겨우 8백대의 TV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중계방송을 했다.

 

슈타츠오퍼의 밤

 

[요셉 크립스]

1945년에 비엔나 모차르트 앙상블(Wiener Mozart-Ensemble)이 결성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요셉 크립스(Joseph Krips)가 설립했다. 크립스는 유태계라는 이유로 나치의 박해를 받다가 겨우 생존한 인물이었다. 모차르트 앙상블은 나중에 세계적인 연주단체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크립스는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그의 심미적인 원칙에 의거하여 슈타츠오퍼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무조건 로맨틱한 연주로부터 탈피코자 했다. 모차르트가 내세웠던 볼륨이 있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지향하였다. 대신, 실내악 스타일의 질적 향상을 기도하였다. 청명하고 가벼운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전형적인 비엔나의 소리였다. 당시 모차르트-앙상블에 자주 출연하였던 성악가는 에리히 쿤츠(Erich Kunz), 엘리자베트 슈봐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 빌마 리프(Wilma Lipp)등이었다. 1947년에 모차르트-앙상블은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Don Giovanni(돈 조반니)이었다. 돈 오타비오 역할은 테너 리챠드 타우버(Richard Tauber)가 맡았다. 타우버 역시 나치로부터 도피하여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때의 타우버는 가장 폐활량이 풍부한 테너로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타우버는 돈 조반니를 공연한지 얼마후에 세상을 떠났다.

 

슈타츠오퍼의 화려한 계단

 

모차르트-앙상블은 객원지휘자를 초청하여 자주 연주회를 가졌다. 지휘자 칼 뵘은 그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객원지휘자들의 역할은 모차르트-앙상블의 발전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요셉 크립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197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로지 슈타츠오퍼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립스는 슈타츠오퍼의 여러 마에스티리(Maestri)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마에스트로였다.

 

슈타츠오퍼는 세계의 수많은 오페라 하우스 중에서 가장 활발한 공연을 펼치고 있는 극장이다. 1년에 거의 2백회의 공연을 가지며 50-60편의 각각 다른 레퍼토리를 공연한다. 다만, 7-8월의 여름철에는 공연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 주일의 7일 동안에 매일 거의 다른 오페라가 공연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슈타츠오퍼의 전체 직원은 1천명이 넘는다. 슈타츠오퍼의 1년 예산은 약 1억 유로이다(2008년 기준). 그중 절반 정도는 정부로부터 보조금 형태로 지원받고 있다. 2009년 현재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은 일본 출신의 오자와 세이지(Ozawa Seiji)이다.

 

중요한 공연은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건물 밖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무료관람할수 있게 한다.

 

[구스타브 말러]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는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대의 성악가들을 발굴하여 무대에 세웠다. 안나 바르-밀덴부르크(Anna Bahr-Mildenburg)와 젤마 쿠르츠(Selma Kurz)는 대표적이다. 그는 과거의 화려함 일변도의 무대장식에서 탈피하여 유겐트슈틸(아르 누보) 취향의 무대장치로서 현대화하였다. 말러는 또한 공연 도중에 객석의 조명을 어둡게 하는 것을 처음으로 시도하였다. 관객들의 불평이 많았지만 오페라에 집중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후로 공연 중에는 무조건 조명을 어둡게 하는 관례가 이루어졌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잘츠부르크 출신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56년부터 1964년까지 8년동안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카라얀은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 반드시 원어로 공연토록 했다. 그 전에는 일반적으로 독일어로 번역하여 공연했다. 그는 객원성악가 제도를 도입하여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무대에 설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라 스칼라와 협력하여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의 교류를 실현하였다. 특히 라 스칼라에서 모차르트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공연할 때에는 슈타츠오퍼의 모차르트-앙상블 멤버들이 자주 참가하였다.

 

슈타츠오퍼의 화려한 계단 

 

[발레단]

2005년 시즌에 슈타츠오퍼 발레단과 폭스오퍼 발레단이 구조조정을 통하여 하나로 연합되었다. 이로써 정예소수주의로 나갈수 있었으며 또한 세계적인 발레리나를 객원초청하여 공연할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비엔나 모차르트-앙상블을 창설한 요셉 크립스 

 

[어린이 프로그램]

슈타츠오퍼는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린이들은 결국 언젠가는 슈타츠오퍼의 고정 관객 및 후원자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1995년부터 시작된 슈타츠오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위해 옥상에 텐트를 설치하여 무대를 마련하고 있다. 슈타츠오퍼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추진한 주역은 사무국장이던 이오안 홀렌더(Ioan Holender)였다. 1992년에 사무국장이 홀렌더의 임기는 2010년까지이다. 최근의 공연은 Peter Pan(피터 팬), Das Traumfresserchen(꿈의 호리병), Der 35, Mai(5월 35일), Aladdin(알라딘), Bastien and Bastienne(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등이었다. 여기에 매년 한번씩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공연된다. 주로 9-10세의 어린이들을 위해 공연이 준비된다. 이때에는 무대를 마치 ‘오페라무도회’(Opernball)처럼 꾸민다. 슈타츠오퍼는 8-14세의 청소년을 위한 오페라학교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아이들은 성악의 기본 등을 공부한다. 정규 오페라 공연에 필요한 아역들은 대부분 슈타츠오퍼 오페라학교 참가학생들 중에서 선발한다.

 

슈타츠오퍼 어린이 발레단

 

[입석]

슈타츠오퍼와 폭스오퍼 모두 입석을 판매한다. 입석 티켓은 공연이 시작되기 한두시간 전에 팔기 시작한다. 입석은 공연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커피 한잔 값 밖에 되지 않는다. 주로 학생들이 입석 티켓을 사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입석 티켓을 사기 위해 밤을 새고 줄을 서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이제는 단골 입석 관람객들도 많아졌다. 이들이 1층의 제일 뒤편이나 갤러리의 꼭대기에 서서 환호를 보내고 비난의 함성을 지르는 것은 이제는 일반적인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오페라 매니아들이기 때문에 도무지 무시할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어떤 출연자는 일부러 입석 관객들을 향해 답례를 하는 일도 있다.

 

표를 사기 위해 매표국 앞에서 밤을 지새는 오페라 애호가들

 

[노이에 메르커](Der Neue Merker)

Der Neue Merker(새로운 깃발)라는 잡지는 슈타츠오퍼의 모든 공연에 대하여 평론을 게재한다. 노이어 메르커의 글 한 줄에 따라 슈타츠오퍼 출연자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노이어 메르커는 매호 약 2천부를 발간한다. 노이어 베르커는 2007년 3월부터는 온 라인 버전을 운영하고 있다. 1주일에 1만명 정도의 오페라 애호가들이 방문한다.

 

노이에 메르커

 

[오페른발](Opernball: 오페라 무도회)

슈타츠오퍼는 지금까지 수십년 동안 비엔나 오페른발의 개최 장소였다. 매년 사순절(화싱)의 마지막 목요일에 열리는 오페른발은 이제 국제적인 행사로 사랑을 받고 있다. 오페른발에는 거물 정치인이나 기업인 또는 유명 예술가들이 참가하여 자리를 빛내주고 있다. 2008년의 오페른발에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레브코(Anna Netrebko)가 참석했다. 1968년에는 오페른발 반대 시위가 격렬했었다. 반대기구들은 오페른 발이 엘리트만을 위한 차별된 행사이며(입장권은 매우 값이 비싸다), 자만에 가득찬 행사이고(신문이나 방송에 돈 많다는 것을 자랑한다), 보수적인(구태의연한 문화 행태를 계속 개최한다) 행사라며 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오페른발의 화려한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