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구 인네레 슈타트

참고자료 65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정준극 2009. 8. 11. 08:00

참고자료 65

 

페트라르카가쎄와

인도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1304-1374)는 이탈리아의 학자 겸 시인으로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인도주의자(Humanist)였다. 그는 중세를 ‘암흑시대’(Dark Age)라고 부른 최초의 인물이다. 영국에서는 페트라르카를 페트라취(Petrarch)라고 부른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영국식의 페트라취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페트라취는 그의 인도주의 사상과 저술로 인하여 ‘인도주의의 아버지’(Father of Humanism)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그의 저서들은 단테 또는 보카치오의 작품들과 함께 현대 이탈리아어의 근간을 마련해준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소네트 시는 특별한 감동을 주는 것으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특히 영국에서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페프라취의 시작(詩作)은 현대 서정시의 모델이 되었다.


최초의 계관시인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면류관을 받고 있는 장면 (Erano i capei d’oro a l’aura sparsi)

 

페트라르카는 북부 이탈리아의 아레쪼(Arezzo)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황청과 관련한 법률 직원이었다. 1309년 교황 클레벤트 5세가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자리를 옮기자 그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아비뇽으로 가서 살기 시작했다. 페트라취는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몽플리에(Montpellier)와 볼로냐(Bologna)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작문과 라틴문학에 뜻을 두었다. 그의 첫 번째 대작은 Africa(아프리카)로서 로마시대의 유명한 장군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의 영웅적인 활동에 대한 것이다. 이 저서로 페트라취는 유럽의 명사가 되었다. 1341년 그는 최초의 계관시인이 되어 로마의 의사당 앞 광장에서 만인이 환시하는 가운데 월계수 관을 쓰는 대관식을 가졌다. 페트라취는 여행을 좋아하였다. 그는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하였다. 그는 등산도 좋아하였다. 그가 살았던 14세기의 시대에 등산을 취미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산을 정복하기 위한 등산을 하였다. 그는 1336년 4월 26일에 해발 1,909m의 몽 벵투(Mont Ventoux)의 정상에 올라갔다고 기록하였다. 그같은 일은 당시로서 매우 희귀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역사상 최초의 ‘관광객’(Tourist)라고 불렀다. 관광객(투어리스트)라는 단어는 사실상 페트라르카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페트라르카가 태어난 아레쪼(산타 마리아 델레 피아베 성당)

 

페트라취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황청에 봉사하는 입장이어서 교회의 방침에 따라 결혼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가 시인-외교관으로서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하였던 것도 교황청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친선대사처럼 시인-외교관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지만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두었다. 아들 조반니는 1337년에 태어났으며 딸 프란체스카는 1343년에 태어났다. 페트라취는 나중에 두 아이를 정식 자녀로 입적하였다. 조반니는 1361년, 24세 때에 역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딸 프란체스카는 사법서사인 프란체스쿠올로 다 브로싸노(Francescuolo da Brossano)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사위인 다 브로싸노는 페트라취가 세상을 떠난 후 유언집행자가 되었다. 페트라취는 역병을 피하여 딸 프란체스카의 가족들과 함께 베니스로 갔다가 아예 눌러 앉아 살게 되었다. 페트라취는 1374년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르쿠아(Arqua)에 있는 페트라르카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