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링슈트라쎄

제국의 영광을 재현한 대로

정준극 2009. 8. 16. 05:23

영광을 품은 환상(環狀)의 대로 링슈트라쎄(Ringstrasse)의 모든 것

2015년은 링슈트라쎄 오픈 150주년 기념하는 해

 

링슈트라쎄의 국립미술관(미술사박물관)에서 시청(라트하우스)를 바라본 거리. 마로니에 낙엽이 아름답다.

 

비엔나의 링슈트라쎄를 아는 것은 비엔나를 아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링슈트라쎄가 비엔나의 간판이기 때문이다. 링슈트라쎄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이다. 도심 중의 도심을 링처럼 둘러싼 대로가 있다는 것이 특별하다. 그리고 그 대로를 따라 양쪽에 웅장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것도 특별하다. 도심을 둘러싼 링처럼 생긴 대로를 따라 역사적인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것은 비엔나가 아니면 볼수 없는 특별풍경이다. 그래서 링슈트라쎄슈틸(Ringstrassenstil: 링스트리트 스타일)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건축스타일이라는 뜻이다. 

1870년대 부르크링 건설 현장. 전차가 한대 외롭게 지나가고 있다.

 

링슈트라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저 멀리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은 비엔나의 전신인 빈도보나에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방책(防柵)을 설치했으며 해자도 파놓았다. 그것이 링슈트라쎄의 전신이다. 세월은 흘러 12세기가 되었다. 12세기 초반에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게 된 바벤버그 왕조는 비엔나를 오스타리키(옛 오스트리아의 명칭)의 수도로 삼고 현재의 암 호프에 궁전을 지었다. 야소미어고트라고 불리는 하인리히 2세 때였다. 이와 함께 하인리히 2세는 비엔나의 도심을 둘러싸는 성곽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궁전이 있으면 궁전을 둘러싸는 방호벽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옛 로마시절에 주둔군이 설치했던 방책을 따라 성벽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막대한 돈이 들었다. 성벽공사는 재원이 부족하여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12세기에 레오폴드 5세는 십자군전쟁에 참가했던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를 간첩이라고 하여 볼모로 잡아 두고 있다가 막대한 몸값을 받고 석방하였다. 레오폴드 5세는 그렇게 마련한 돈의 상당부분으로 비엔나 성벽의 확장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때에 성벽 외부로 완만한 경사를 만드는 토목공사도 병행하였다. 경사진 언덕은 성벽으로부터 무려 5백미터에 이르는 거리였다. 그러던 중에 1529년에 터키의 1차 비엔나 공성이 있었다. 터키의 공격을 억지로 막기는 했지만 공성이 끝나자 비엔나는 더욱 공고한 성벽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느끼고 기존의 성벽을 대대적으로 보수 확장하였다. 기존의 성벽은 터키와의 전투에서 상당히 파손되었기도 했지만 또 다시 외적이 공격해 왔을 때 아무래도 성벽이 취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벽의 보강을 이루지 못한채 1683년,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이 있었고 이것도 역시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그후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변화가 없이 지냈다. 18세기 후반부터 비엔나 성벽은 별다른 효용이 없게 되었다. 비엔나가 계속 확장되는 바람에 도심과 외곽의 구분이 모호하게 되어서 성벽을 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00년 팔라멘트(국회의사당)의 모습

오늘날의 팔라멘트. 2006년에 건물을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종전에는 현재의 1구인 인네레 슈타트만이 비엔나였고 그 주변지역들은 모두 교외(Vorstädte)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850년 교외였던 레오폴드슈타트(Leopoldstadt)와 알저그룬트(Alsergrund)가 도심지역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에도 비엔나는 점점 확대되어갔다. 비엔나의 오래된 성벽은 교통의 장애물이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1857년 프란츠 요셉 황제는 저 유명한 칙령, 즉 ‘이것은 나의 뜻이니’(Es ist Mein Wille)로 시작하는 황제칙령을 공표하였다. 내용인즉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모두 허물고 해자 또는 참호를 메우라는 칙령이었다. 새로운 대로의 건설을 선포하는 칙령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칙령을 통하여 새로 만들 대로(大路)의 정확한 사이즈와 대로에 들어설 건물들의 위치와 종류까지 명시하였다. 새로 조성되는 대로(링슈트라쎄)는 합스부르크의 장엄함과 영광을 재현하는 전시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대로를 조성함에 있어서 혁명에 대한 사항도 고려하였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1848년의 혁명을 경험한 일이 있다. 물론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당시 시민과 학생들은 길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제국 경찰들의 통행을 방해함으로서 혁명 진압에 곤혹을 치룬 일이 있다. 어느날에는 프란츠 요셉 황제를 암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시내의 대로를 새롭게 조성하면서 대로를 얼마나 넓게 만들어야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치지 못한다는 점도 고려했다. 프란츠 요셉 황제도 그 점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최대로 대로의 폭을 넓게 잡도록 했다. 링슈트라쎄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칙령으로 설치토록 한 1857년으로부터 8년 후인 1865년 5월 1일에 대오프닝을 가졌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직접 오프닝에 참석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2015년은 링슈트라쎄 개설 150주년을 맞는 해이다.

 

링슈트라쎄의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비엔나시의 재정으로 건설된 라트하우스(시청)

 

새로 조성된 링슈트라쎄는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쇼윈도 역할이었기 때문에 이와 평행하여 화물차들이 다니는 길(이를 Lastenstrasse라고 함)이 필요했다. 화물차 도로는 리니엔발(Linienwall)이라고 부르는 외곽 성벽을 따라 완만하게 조성된 경사지에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귀어텔(Gürtel: 벨트라는 뜻) 길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귀어텔을 츠봐이터 리니(2-er Linie)라고 불렀다. 당시 귀어텔을 따라 운행하던 전차노선이 2번이었기 때문이었다. 링슈트라쎄의 조성에 들어가는 모든 예산은 대단한 논란 끝에 정부가 모두 부담키로 했다. 다만, 새로 건설하는 시청만이 비엔나시가 경비를 부담키로 결정했다. 거리 확장 공사와 함께 거리의 양편에 들어서는 건물들의 공사가 박차를 가하게되었다. 주요 관공서는 정부의 계획에 따라 건설되지만 기타 건물들은 개인 부담으로 건설되었다. 당국은 링슈트라쎄의 공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성벽을 허물고 조성된 부지를 택지로서 귀족들과 부호들에게 판매하였다. 하기야 귀족들과 부호들은 링슈트라쎄를 따라 자기들의 저택을 짓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택지분양 판매는 순조로웠다.

 

노이에 호프부르크(신호프부르크궁전)의 위용.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이 있는 쪽에도 노이에 호프부르크의 대칭 건물을 세우고자 했으나 재정문제로 연기되었다. 오히려 헬덴플라츠(영웅광장)의 전망을 드높일수 있어서 잘된 일이었다고 한다.

 

귀족들과 부호들이 링슈트라쎄를 따라 건설한 저택들은 대체로 팔레(Palais)라고 불렀다. 시내궁전이란 뜻이다. 이와 함께 공공기관이 아닌 일반 건물들도 들어섰다. 가장 먼저 완성된 개인 건물은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건너편에 있었던 하인리히스호프(Heinrichshof)였다. 하인리히스호프는 맥주 사업으로 부호가 된 하인리히 드라쉐(Heinrich Drasche)의 소유였다. 이 건물은 2차 대전의 막바지에 공습으로 완전 파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전쟁 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캐른트너링호프(Kärntnerringhof)라고 부른다. 1980년대에 이 새로 지은 건물에 KAL 사무소가 있었으며 현재는 한국인 면세품 상점인 ‘손 샵’도 한 쪽에 들어 있다. 링슈트라쎄가 온전하게 완성된 모습을 보인 것은 1870년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매일 링을 따라 산책을 했다. 프로이드는 링슈트라쎄를 사랑했다.

 

링슈트라쎄의 건물들. ① 링투름(링타워) ② 우라니아(천문대) ③ 포스트슈파르카싸(은행) ④ 정부종합청사 ⑤ 팔레 슈봐르첸버그 ⑥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⑦ 노이어부르크(신호프부르크 궁전) ⑧ 미술사박물관(국립미술관) ⑨ 자연사박물관 ⑩ 팔라멘트(의사당) ⑪ 라트하우스(시청) ⑫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 ⑬ 뵈르제(증권거래소) ⑭ 비엔나대학교 ⑮ 보티프키르헤(봉헌교회) 

 

[여러번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링슈트라쎄는 쇼텐링(Schottenring), 독토르 카를 루에거 링(Dr Karl Lueger Ring: 현재는 우니페어지태트링), 독토르 렌너 링(Dr Renner Ring), 부르크 링(Burgring), 오페른링(Opernring), 캐른트너 링(Kärntner Ring), 슈베르트링(Schubertring), 파르크링(Parkring), 슈투벤링(Stubenring)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이는 물론 프란츠 요제프스 카이(Franz Josefs Kai)를 말한다. 독토르 카를 루에거 링은 2012년부터 우니페어지태트링(Universitätring: 대학로)으로 변경되었다. 우니페어지태트링에는 라트하우스, 부르크테아터, 그리고 유서 깊은 비엔나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비엔나 시장으로 다섯 번이나 선출된 독트로 카를 루에거(Dr Karl Lueger: 1844-1910)는 보수주의 정치가로서 아예 반유태주의를 내걸어 인기를 끌었다. 전쟁이 끝나자 상당수의 비엔나 시민들은 반유태주의자의 이름이 거리 이름으로 버젓히 남아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비엔나대학교 당국은 학교건물이 그런 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곤혹스럽게 생각했다. 독토르 카를 루에거 링의 이름을 바꾸자는 캠페인의 앞장에 섰던 사람은 2000년 노벨의학상을 받은 미국의 에릭 칸델(Eric Kandel)이었다. 어릴 때에 비엔나에 살았던 에릭 칸델은 1938년 독-오 합병으로 미국으로 피신해야 했고 유명한 신경과학자가 되어 노벨상까지 받았다. 에릭 칸델이 2000년에 노벨상 수상자로 확정되자 오스트리아는 자기 나라 출신이라고 하며 자랑했다. 그러자 에릭 칸델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유태계 미국인에게 주어진 상'이라고 잘라 말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무안하고 민망스런 일이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대통령인 토마스 클레스틸이 에릭 칸델과 연락하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에릭 칸델은 '우선 독토르 카를 루에거 링이라는 이름부터 바꾸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해서 비록 논란이 있었지만 2012년에 정식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독트로 카를 루에거(뤼거) 링은 2012년부터 우니페어지태트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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