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베토벤의 장례식

정준극 2009. 8. 24. 09:55

베토벤의 장례식

그릴파르저가 조사를 썼다. 비엔나의 3만 시민이 운집하여 애도했다.

 

 

비엔나 제9구 알저그룬트 교구교회에서 영결미사를 마치고 배링공동묘지로 떠나는 베토벤의 장례행렬. 1827년 3월 29일, 이날 이곳에는 3만명의 비엔나 시민들이 위대한 예술가의 마지막을 애도하여 운집하였다. 왼편의 교회처럼 생긴 건물이 슈봐르츠슈파이너교회이다. Franz Stober 그림.

 

베토벤의 장례식(영결미사)은 1827년 3월 29일 오후 4시경 비엔나 시내 중심가에서 가까운 알저그룬트(Alsergrund)의 교구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알저그룬트 교구교회는 비엔나대학교와 보티프키르헤의 뒤편에 있다. 구비엔나종합병원(Altes AKH)의 건너편이다. 베토벤은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 200번지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장례미사는 그 동네의 교구교회에서 치루어졌던 것이다. 현재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에는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베토벤의 장례식은 그의 시신을 그가 세상을 떠난 집으로부터 운구하여 교구교회에서 영결미사를 드리고 배링공동묘지에 안장하기까지의 일련의 절차를 말한다. 베토벤의 장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부고장)은 악보출판사인 하슬링거가 맡았다. 초청장을 가진 사람만이 알저그룬트 교구교회의 영결미사에 참여할수 있었다.

 

알저슈트라쎄 17번지에 있는 알저교회(알저키르헤)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래서 두 개의 명판이 붙어 있다. 슈베르트 명판은 1928년 슈베르트연맹이 설치했다.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부터 두어달 전에 이 교회의 종 봉헌을 위해 Glauge Liebe und Hoffnung()이라는 찬양을 작곡했다. 그것을 기념하는 명판이다. 오른쪽의 베토벤 명판은 1827년 3월 29일에 이 교회에서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역시 슈베르트연맹이 1927년에 설치했다.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된 알저키르헤 내부

                            

아래에 있는 사진이 당시의 초청장이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 앞과 장례행렬이 이동하는 연도에 운집하여 베토벤의 장례행렬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마치 이날은 국가적인 행사가 있는 날과 같았다. 최대 약 3만명의 시민이 모였다고 한다. 너무나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경찰이 동원되어 길거리를 정리해야 했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 또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어느 황제의 장례식 때에도 이처럼 많은 시민들이 모여 진심으로 애도한 일은 없었다. 비엔나의 모든 공연장들은 이날만은 연주회나 연극공연을 하지 않았다. 거리의 상점들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카페나 식당까지도 문을 닫은 집이 많았다. 알저그룬트 슈봐르츠슈파니어 슈트라쎄의 작은 아파트 방에서 세상을 떠난 고독한 작곡가를 위해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유명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오스트리아 최고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프란츠 그릴파르저(Franz Grillparzer),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칼 체르니(Carl Czerny),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등이 장례식의 만기를 들고 네필의 말이 끄는 운구마차의 앞에서 묘지를 향해 걸어갔다. 베토벤에게 하숙방을 주고 잔소리를 퍼부었던 하숙집 주인들, 그리고 베토벤의 집에서 파출부를 하면서 불평만 늘어놓았던 여인들도 베토벤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먼발치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들은 이토록 위대한 인물을 너무나 구박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인근의 배링(Währing)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베토벤 장례식 초청장. 3월 29일 오후 3시에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 200번지의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에서 시작한다고 적혀 있다. 어떤 자료에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주소가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 15번지라고 되어 있다.

 

가족도 없고 재산도 별로 없는 베토벤은 비엔나의 제9구 알저그룬트의 슈봐르츠슈파니에슈트라쎄 200번지의 셋방에서 1827년 3월 26일 오후 4시 45분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 집은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전쟁 후에 복구되어 아파트로서 사용되고 있다.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의 사인을 확인하는 부검은 유명한 외과의사 요한 바그너(Johann Wagner)박사가 수행하였다. 사인은 간경변이었으며 여기에 수종이 합병되었다고 한다. 베토벤이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몇명의 친구들 중에서 화가 단하우저(Dannhauser)는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를 뜨고 죽은 모습을 스케치로 그렸다.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열렸던 슈봐르츠슈파니어교회(삼위일체교회)는 아직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교회 밖에서의 베토벤의 장례식은 친구인 브로이닝과 쉰들러가 진행을 보았다. 브로이닝(S.V. Breuning)은 베토벤이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헌정할 만큼 서로 각별한 사이였다. 그러다가 몇년간 관계가 소원했지만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에 우연히 다시 만나 베토벤이 숨을 거둘 때까지 옆에서 정성으로 돌보아 준 사람이었다. 베토벤의 장례식이 끝나자 베토벤의 머리를 가져가면 큰 재산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나돌았던 일이 있었다. 실제로 베토벤의 머리를 훔쳐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때문에 친구 브로이닝은 밤마다 배링공동묘지에서 베토벤의 묘지를 지켰다고한다.

 

1941년에 촬영한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 200번지. 베토벤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집. 2차 대전중에 파괴되어 현재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다.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 335번지. 베토벤이 그 부근에 살았던 것을 기념하여 새로 지은 보눙을 베토벤 호프라고 이름 붙였다.

                     

베토벤의 장례식을 위해 조사(弔辭)를 쓴 프란츠 그릴파르저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 겸 시인이었다. 1823년, 그릴파르저는 베토벤을 만나 오페라 작곡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릴파르저의 오페라 제안은 베토벤의 서거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만일 그릴파르저의 대본으로 베토벤이 오페라를 작곡했다면 세계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또하나의 금자탑을 세우는 걸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릴파르저의 조사는 마지막 하관할 때에 읽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관습에 따르면 하관할 때에는 종교적 내용 이외의 어떠한 내용의 연설도 할수 없었다. 그릴파르저의 조사는 베토벤의 관이 배링공동묘지의 문을 지나 들어갈 때에 잠시 멈추도록 하고 당대 최고의 배우인 하인리히 안쉬츠(Heinrich Anschütz)가 읽었다. 그가 굵고 감정에 넘친 음성으로 그릴파르저의 조사를 읽을 때 배링공동묘지에 운집한 만인은 가슴은 메어지듯 하여 눈물을 뿌리지 않을수 없었다고 한다.

     

그릴파르저는 17세 때에 베토벤이 하숙을 하고 있던 하일리겐슈타트의 집의 다른 방에 어머니와 함께 세들어 살았었다. 그릴파르저의 어머니는 음악을 무척 좋아하였다. 그래서 베토벤이 자기 방에서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할 때에는 베토벤의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조용히 걸터앉아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서 기뻐했다. 그러던 어느날, 베토벤은 같은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는 부인이 자기 방의 계단에 앉아서 자기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것을 알고 몹시 화를 냈다. 베토벤은 얼마후 그릴파르저와 그의 어머니가 비엔나로 이사갈 때까지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베토벤과 그릴파르저는 그런 인연이 있었다.

 

극작가 겸 시인인 프란츠 그릴파르저. 베토벤의 장례식을 위해 조사를 썼다.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기념상이 폭스가르텐에 장엄하게 설립되어 있다.

                                     

이날 오후 5시경, 배링공동묘지의 입구에서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는 것을 잠시 멈추게 하고 수많은 조객이 운집한 가운데 베토벤을 추모하는 조사를 읽은 하인리히 안쉬츠(1785-1865)는 1821년부터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의 배우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은 인물이다. 독일의 루카우(Luckau)에서 태어난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지성인으로서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독일의 여러 극장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주로 활슈타프, 리어왕, 봘렌슈타인, 밀러(카발레와 사랑: Kabale und Liebe)과 같은 역할을 맡아 중후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베이스 음성이어서 연기에 무게를 더하였다. 베토벤의 서거 이후 베토벤을 추모하는 음악회가 비엔나의 여러 곳에서 열렸다. 대표적인 것은 1827년 4월 3일 호푸부르크 궁전에 연결되어 있는 아우구스티너키르헤(성아우구스틴교회)에서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된 것이다. 이어 4월 5일에는 칼스키르헤(Karlskirche: 성칼교회)에서 케루비니의 미사곡이 연주되었다. 베토벤의 유품들은 그해 4월 경매되었다.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게 만든 명배우 하인리히 안쉬츠

                                                   

그릴파르저가 쓴 독일어 조사를 영문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로의 번역은 각자가 알아서 해보시기를...우둔한 필자가 보기에도 명문은 명문인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번역에 대한 재능이 약소하여 감히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웠다. 공연히 베토벤에 대한 추모의 정신만 손상시킬것 같기 때문이다. 

 

We who stand here at the grave of the deceased are in a sense the representatives of an entire nation, the whole German people, come to mourn the passing of one celebrated half of that which remained to us from the vanished brilliance of the fatherland.

 

The hero of poetry in the German language and tongue still lives -- and long may he live. But the last master of resounding song, the gracious mouth by which music spoke, the man who inherited and increased the immortal fame of Handel and Bach, of Haydn and Mozart, has ceased to be; and we stand weeping over the broken strings of an instrument now stilled.

 

Let me call him that! For he was an artist, and what he was, he was only through art. The thorns of life has wounded him deeply, and as the shipwrecked man clutches the saving shore, he flew to your arms, oh wondrous sister of the good and true, comforter in affliction, the art that comes from on high!

 

He held fast to you, and even when the gate through which you had entered was shut, you spoke through a deafened ear to him who could no longer discern you; and he carried you image in his heart, and when he died it still lay on his breast.

 

He was an artist, and who shall stand beside him? As the behemouth sweeps through the seas, he swept across the boundaries of his art. From the cooing of the dove to the thunder's roll, from the subtlest interweaving of wilful artifices to that awesome point at which the fabric presses over into the lawlessness of clashing natural forces -- he traversed all, he comprehended everything. He who follows him cannot continue; he must begin anew, for this predecessor ended where art ends.

 

Adelaide and Leonore! Commemorations of the heroes of Vittoria and humble tones of the Mass!

 

Offspring of three and four-part voices. Resounding symphony,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he swan song. Muses of song and of strings, gather at his grave and strew it with laurel!

 

He was an artist, but also a man in every sense, in the highest sense. Because he shut himself off from the world, they called him hostile; and callous, because he shunned feelings. Oh, he who knows he is hardened does not flee!

 

Excess of feeling avoids feelings. He fled the world because he did not find, in the whole compass of his loving nature, a weapon with which to resist it. He withdrew from his fellow men after he had given them everything and had received nothing in return. He remained alone because he found no second self. But until his death he preserved a human heart for all men, a father's heart for this own people, the whole world.

 

Thus he was, thus he died, thus he will live for all time!

 

And you who have followed his escort to this place, hold you sorrow in sway. You have not lost him but won him. No living man enters the halls of immortality. The body must die before the gates are opened. He whom you mourn is now among the greatest men of all time, unassailable forever. Return to you homes, then, distressed but composed. And whenever, during your lives, the power of his work overwhelms you like a coming storm; when your rapture ours out in the midst of a generation yet unborn; then remember this hour and think; we were there when they buried him, and when he died, we wept.   

 

 

배링공동묘지(현재는 슈베르트공원)의 베토벤 묘지와 그 옆의 슈베르트 묘지.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존경하여서 그의 옆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1863년 10월 13일 비엔나음악가동호회가 베토벤의 유해를 금속관에 다시 안치하였으며 1888년 6월 21일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로 이전되었다. 중앙공동묘지에의 이장에는 안톤 브루크너가 직접 절차를 주관하고 천장을 입회하였다. 현재 슈베르트 공원에는 베토벤의 옛 묘비만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