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베토벤의 죽음

정준극 2011. 1. 28. 20:52

베토벤의 죽음

 

우리가 베토벤의 서거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과연 누가 베토벤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숨을 거두기 전에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무엇이고 또한 어떤 병마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는지 등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은 어떤 것이냐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1827년이면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한 프란시스1세(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프란시스 2세)의 치하였다. 프란시스1세(프란츠1세)는 1806년 오랜 역사를 지닌 신성로마제국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한 군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로서는 조선 순조 27년이 된다. 순조는 정조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사람이다. 베토벤의 임종은 두 사람이 지켜보았다고 한다. 베토벤의 동생의 부인(제수)인 요한나, 그리고 베토벤의 절친한 친구인 안젤름 휘텐브렌너(Anselm Hüttenbrenner)라고 한다. 작곡가인 안젤름 휘텐브렌너는 슈베르트와도 막역한 친구였다. 슈베르트는 안젤름 휘텐브렌너에게 교향곡을 작곡하여 증정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제2악장까지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완성하지 못한채 미완성인 교향곡을 그대로 안젤름 휘텐브렌너에게 전달하였다. 무슨 이유로 완성하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컨대 병마에 시달려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유명한 '미완성교향곡'이다. 아무튼 안젤름 휘텐브렌너는 베토벤의 임종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베토벤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한 인물이다. 휘텐브렌너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토벤의 마지막 순간을 전달하자 사람들은 그의 말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여 전적으로 믿지 못했다. 베토벤의 사인에 대하여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후 논란이 되었다.

 

비엔나의 9구 알저그룬트 교구교회에서 영결미사를 마치고 장지로 향하는 베토벤의 장례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든 비엔나의 시민들

 

[병마와의 마지막 싸움]

불과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베토벤은 생의 마지막을 병마와 투쟁하며 보냈다. 그러면서도 베토벤은 그의 '후기'에 속한 위대한 작품들을 바로 이 시기에 완성하였다.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완성할수 있었던 작품은 현악4중주 제13번의 마지막 악장을 새로 고쳐 쓰는 것이었다. 원래는 대푸가(Grosse Fuge)로 되어 있으나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기 때문에 바꿀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것이 1826년 12월이었다. 그러므로 베토벤은 1827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3개월 동안 별다른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지냈다. 1826년 12월에 베토벤은 지병이 도져서 구토를 하고 설사를 심하게 하였다. 그같은 증세가 결국 베토벤을 하늘나라로 보낸 이유였다.

 

베토벤이 건강이 너무나 악화되어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 베토벤의 모습을 마음 속에 새기고자 하였다. 베토벤를 치료했던 의사들은 1827년 초부터 그의 복부에 차 있는 복수를 제거하기 위해 무려 네번이나 어려운 수술을 하였다. 첫번째 수술에서는 감염으로 합병증이 생겼지만 나머지 세번의 수술에서는 감염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3월 24일 베토벤은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틀후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잃었으며 마침내 3월 26일 숨을 거두었다. 베토벤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임종을 보기 위해 그의 동생들과 친지들이 집에 모여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못하고 마지막 임종 때에는 요한나와 휘텐브렌너만이 병상을 지켰다.

 

화가 요셉 단하우저가 뜬 베토벤으 데스 마스크. 병마로 인하여 무척 수척해 있는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

베토벤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하늘이 캄캄해 지며 천둥소리가 무섭도록 들렸다고 한다. 휘텐브렌너는 베토벤을 팔에 안고서 어떤 출판업자가 포도주 한 상자를 선물로 가져왔다고 얘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휘텐브렌너의 팔에 안겨 있던 베토벤은 마치 전쟁에서 장군이 병사들에게 명령하듯 장엄하게 오른 손을 뻗어 저 먼 곳을 가르키며 '슬프도다, 슬프도다, 너무나 늦었도다'(Pity, pity...too late!)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선물로 받은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게 되어 슬프다고 했는지 또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세상을 떠나게 되어 슬프다고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중에 휘텐브렌너가 베토벤이 선물로 들어온 포도주를 마시지 못해서 '슬프도다'라고 말하지 않았겠느냐는 식으로 얘기하자 사람들은 '베토벤이 포도주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면서 오히려 분개하였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베토벤은 운명하기 전에 Plaudite, amici, comedia finita est(플라우디테, 아미치, 코메디아 휘니타 에스트)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말은 보통 이탈리아에서 연극이 막을 내릴 때 하는 말로서 '박수를 보내어라, 친구들이며, 코미디는 끝났도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휘텐브렌너는 1860년에 베토벤이 그런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였다. 또 다른 주장에 의하면 베토벤은 '나는 하늘 나라에서나 들을수 있을 것이다.'(I shall hear in heaven)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장도 마치 성서의 경외서처럼 신뢰성이 없다.

 

베토벤의 임종을 지켜본 작곡가 안젤름 휘텐브렌너

 

베토벤의 자서전을 최초로 정리하여 발표한 미국의 전기작가인 A. W. Thayer(테이어: 1817-1897)는 베토벤의 자서전에서 휘텐브렌너의 말을 인용하였다. 다만, 휘텐브렌너의 오리지널 주장에 조금 살을 붙여서 '베토벤이 하늘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는 말을 덧 붙였다. 현대의 베토벤 연구가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상황을 묘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지금까지의 여러 주장들은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이며 실제로는 이틀 동안 인사불성이던 베토벤으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묘지

 

[장례 준비]

베토벤이 숨을 거두고 난 다음날인 3월 27일 요한 바그너라는 의사가 베토벤을 부검하였다. 부검은 과연 누구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인가? 분명치 않다. 다만, 베토벤의 유서라고 할수 있는 하일리겐슈타트 테스타멘트(Heiligenstadt Testament)에 부검을 해도 좋다는 비슷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해서 부검을 했다는 추측이다. 부검 결과, 간이 대단히 손상되었고 축소되어 있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간이 손상되면 일반적인 증상으로서 복수가 생겨 복부팽창이 일어난다고 한다. 학자들은 베토벤이 술을 많이 마셨기 때문에 간이 손상되었다고는 믿지 않고 있다.

 

베토벤이 숨을 거둔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그 중에는 독일 출신의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도 있었다. 힐러는 베토벤의 머리칼 한 줌을 잘라 간직했다고 한다. 힐러가 잘라 간직한 베토벤의 머리칼은 현재 미국 산호세주립대학교의 베토벤연구센터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베토벤의 지인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베토벤의 시신으로부터 너도 나도 머리칼을 한줌씩 잘라 가져갔기 때문에 머리에 머리칼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수년간 병마와 싸우느라고 머리칼이 많이 빠져 있었으며 더구나 임종시에는 천으로 만든 두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머리칼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3월 28일에는 평소 베토벤을 존경하던 화가 겸 조각가인 요셉 단하우저(Joseph Danhauser: 1805-1845)가 베토벤으 데드 마스크(Death Mask)를 석고로 떴다. 그후 시신은 옷을 입하고 참나무로 만든 관에 누여졌다. 베토벤의 손에는 왁스로 만든 십자가와 백합 한송이가 쥐어졌으며 머리 맡에는 백장미로 만든 화환이 놓여졌다.

 

배링공동묘지의 오리지널 베토벤 묘지. 그 옆은 슈베르트의 묘지. 두 사람의 묘지는 1888년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런데 베토벤의 묘비는 페르디난트 슈베르트(Ferdinand Schubert: 1794-1859)라는 조각가가 설계했다. 페르디난트 슈베르트는 프란츠 슈베르트와 관련이 없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슈베르트도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음악교사였고 프란츠 슈베르트보다 31년이나 더 생존했다.

 

[장례식과 매장]

베토벤의 장례식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베토벤의 장례식' 편에 그나마 자세하기 설명되어 있거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베토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되새겨 보기 위해 다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베토벤의 장례식은 1827년 3월 29일 알저그룬트(Alsergrund)의 교구교회에서 거행되었고 이어 비엔나 센터로부터 서북부 쪽에 있는 배링(Waehring)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에 수많은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베토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몇명이나 참여하였는지는 기록마다 다르지만 줄잡아 1만명에서 3만명의 시민들이 연도에 나왔다고 한다. 왕후장상의 장례식에도 이만한 군중들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비추어 본다면 대단한 애도가 아닐수 없다. 이날 극장들은 모두 문을 닫고 공연을 취소하였으며 일부 상점들도 문을 닫았다고 한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 앞에는 만장과 횃불을 든 운구요원들이 걸어 갔는데 그 중에는 유명한 극작가인 프란츠 그릴파르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 역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카를 체르니, 그리고 평소에 베토벤을 숭모한 프란츠 슈베르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후 어떤 사람이 묘지기에게 돈을 주면서 베토벤의 시신을 파내어 머리를 달라고 요구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위대한 베토벤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도 천재 음악가가 될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소문이 나돌자 베토벤의 친구들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시신도난을 막기 위해 서로 조를 짜서 배링 공동묘지에서 불침번을 섰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지 36년 후인 1863년에 비엔나악우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는 경비를 내어 베토벤의 유해를 꺼내어 조사연구를 하고 다시 안장하였다. 그때 오스트리아의 외과 의사인 로메오 젤리그만(Romeo Seligmann)이라는 사람이 베토벤의 두개골 한 조각을 몰래 간직했다고 한다. 그 조각은 부검 때에 이미 잘라져 있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현재 그 두개골 조각은 미국의 산호세주립대학교 베토벤연구센터에 있다. 베토벤의 유해는 1888년 프란츠 요셉 황제 시절에 칼 루에거 비엔나 시장이 조성한 비엔나의 남쪽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Zenralfriedhof)로 이장되었다. 이 때에 배링공동묘지의 베토벤 묘지 옆에 있던 슈베르트의 묘지도 함께 이장되었다.

 

라이프치히에 있는 막스 클링거 제작의 베토벤 기념상

 

[납중독에 대한 주장]

베토벤의 사인에 대하여는 여러 주장이 있다.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경화증, 매독, 간염, 납중독, 사르코이도시시(유사육종증) 등이다. 2008년에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인 크리스티안 라이터(Christian Reiter)는 베토벤 생존시의 담당 의사였던 안드레아스 바브루흐(Andreas Wawruch)가 납성분이 들어 있는 약품을 지나치게 투여하여 결국 납중독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주치의가 잘못하여 살해했다는 주장이었다. 라이터 박사에 의하면 주치의인 바브루흐는 복수를 제거하기 위해 약을 썼는데 그 약에는 납성분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 있어서 끝내 납중독이 되어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바브루흐 박사의 처방전에 의하면 '상처 부위는 항상 물기가 없도록 했다'고 되어 있어서 복수가 차 있는 것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투여했다는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베토벤의 머리칼을 분석할 결과 납성분이 과다하게 복용되었다는 근거는 찾아 볼수 없었다고 한다.


유명한 그림이다. 온천장인 테플리츠의 거리에서 괴테는 귀족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데 베토벤은 뒷짐을 지고 무관심한 표정이다. 나중에 괴테가 '여보게 베토벤! 혹시 후원자가 될지도 모르는 귀족들에게 인사를 잘 하면 무엇이 덧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베토벤은 '아니, 자기들이 나한테 인사를 해야지, 왜 내가 그들에게 인사를 한단 말이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1887년 칼 롤링.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된 알저키르헤]

베토벤은 비엔나의 8구 알저그룬트(Alsergrund)의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Schowarzspanierstrasse) 15 번지의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슈봐르츠슈피나어하우스라는 아파트이며 베토벤은 이 건물의 2층(우리식으로는 3층)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이 8구 알저그룬트에 있기 때문에 그의 영결미사는 관례에 따라 알저그룬트 교구교회인 알저키르헤(Alserkirche)에서 거행되었고 현재 그 교회에는 벽면에 '이 교회에서 11827년 3월 29일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는 내용의 기념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알저슈트라쎄(Alser Strasse) 17번지인 이 교회는 위대한 베토벤의 장례미사가 거행된 장소이기 때문에 베토벤 숭모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 되었다. 알저키르헤를 가려면 쇼텐링 부근의 우니페어지태트(Universitat) 전차 정류장에서 43번이나 44번 전차를 타고 두어 정류장 지나서 랑에 가쎄(Lange Gasse)에서 내리면 지나온 길가에 바로 보인다. 지도에는 알저 키르헤라고 적혀 있지 않고 미노리텐 클로스터(Minoriten Kl)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있으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저 키르헤는 미노리텐 수녀원에 속한 교회이기 때문이다. 알저 키르헤의 건너편은 대학교 캠퍼스로서 한쪽에는 비엔나대학교 부설 언어연구센터가 있다. 캠퍼스는 상당히 넓은 공원과 같은 곳으로 이곳에 구비엔나종합병원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 등에는 이곳에서 아기자기한 시장이 열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알저키르헤는 행정구역상 비엔나의 8구 요제프슈타트에 속해 있다. 알저키르헤라는 이름 때문에 혹시 9구의 알저그룬트(Alsergrund)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하얀 건물에 두개의 커다란 종탑이 있는 알저키르헤(알저교회)


알저키르헤의 원래 명칭은 삼위일체교회(Dreifaltigkeitskirce)이다. 이탈리아 수도원의 한 지파인 미노리텐 수도회에 속한 교회이다. 사람들은 한동안 이교회를 '봐이쓰슈파니에른 집'(Zu den Weissspaniern)이라고 불렀다. 그에 대한 연유는 이 수도원이 개설되자 스페인에서 수도사들이 도착하였는데 하얀 의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봐이쓰슈파니에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미노리텐 수도회는 1198년에 프랑스에서 마사의 성요한()과 발루아의 펠릭스라는 사람이 설립한 수도회이다. 당시는 십자군 전쟁의 와중이었다. 이 수도회는 전쟁으로 과부가 된 여인들, 고아가 된 아이들, 부상당한 병사들을 구호하는 일을 내세웠지만 가장 중요한 목작은 이슬람에게 포로로 잡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유럽인들을 속전을 내고 해방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이 수도회는 여러 곳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운영하였다. 미노리텐이란 말은 '연약한 자'라는 뜻이다. 억압받고 구속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미노리텐의 활동은 십자군 전쟁 당시에도 활발했지만 터키의 두번에 걸친 유럽 침공시에도 활발하였다. 미노리텐 수도회가 처음 수도원을 개설한 곳은 프랑스의 세르프루아(Cerfroid), 비스툼 수아송(Bistum Soissons)이다. 이후로 이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미노리텐 수도회의 알저키르헤가 비에난에서 등장한 것은 1688년이다. 처음에는 미노리텐 수도원을 세웠다. 1694년부터 1704년까지 수도원에 인접하여 교회를 세우고 수도원과 교회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했듯이 수도승들이 스페인에서 왔고 하얀 수도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봐이쓰슈파니어라고 불렀던 것이다. 한편, 비엔나 1구의 미노리텐플라츠에는 미노리텐키르헤가 있는데 일찍이 1350년에 완성되었다. 주로 비엔나의 이탈리아 교우들을 위한 교회이다.


알저키르헤 오르간


알저키르헤는 주변에 종합병원이 있고 또한 형무소도 있기 때문에 이곳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혼구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알저 키르헤는 바로크 스타일이다. 전면에 두개의 종탑이 우뚝 서 있는 형식이다. 내부는 십자가 형상이다. 바로크 현관의 벽감은 비엔나에 있는 벽감 스타일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현관의 상단에는 삼위일체 부조가 찬란하게 자리잡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다. 이밖에도 설명할 사항은 다대하지만 사정상 생략하고 한가지는 다 아는 대로 이 교회가 위대한 두 음악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1827년 3월 29일에 이 교회에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이 교구에 속한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사망에 대한 기록도 이 교회의 명부에 기록되어 있다. 이 교회의 교인 명부에는 베토벤이 1827년 3월 26일에 사망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어떻게 써 있는가를 보면 Ludwig van Beethoven, lediger Tonsetzer, zu Bonn im Reich geb., 57 Jahre alt, gest. an Wassersucht, begraben am 29. Marz auf dem Gottesacker des Dorfes Wahring.


알저키르헤의 회중석과 중앙제단


다른 하나는 1828년 9월 2일에 프란츠 슈베르트가 작곡한 찬송가인 Glaube, Hoffnung und Liebe(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 D 954가 이 교회의 종 봉헌미사에서 처음 연주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이 이 교회의 외부 현관 벽면에 동판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 동판들은 1927년과 1928년에 각각 설치되었다. 베토벤 서거 1백주년과 슈베르트의 찬송 초연 1백 주년을 기념하여서이다. 그리고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2년 10월 4일에 이 교회에서 슈베르트의 Es 장조 미사곡 D 950이 처음 발표되었다. 슈베르트의 친구인 미하엘 라이터마이어가 합창지휘를 하였다.


알저키르헤 현관 상단의 삼위일체 부조. 다른 삼위일체 조각과는 달리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를 중앙에 두었고 하나님은 그의 오른편에, 왼편에는 천사가 수종하는 구조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는 비둘기가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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