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과학자/유명 발명가

모터사이클의 카를로 아바르트(Carlo Abarth)

정준극 2009. 8. 27. 17:34

전설적인 모터사이클 레이서 겸 자동차 디자이너

카를로 아바르트(Carlo Abarth)

 

 

카를로 아바르트의 원래 이름은 칼 알베르토 아바르트(Karl Alberto Abarth)이다. 1908년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비엔나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다가 이탈리아 시민이 되었기 때문에 Karl(칼)이라는 독일어 이름이 Carlo(카를로)로 바뀌었다. 칼 아바르트라는 이름은 나이가 지긋한 비엔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름이다. 카를로 아바르트는 1930년대 유럽의 모터사이클 경주대회를 휩쓸었던 이름난 레이서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유럽 챔피언을 차지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1933년 린츠에서의 대회에 참가했다가 사고를 당하여 잠시 모터사이클 레이서로서의 활동을 접어 두고 모터사이클의 성능개선을 위한 엔지니어링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지내다가 말년에 비엔나로 돌아와 1979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비엔나 사람들은 칼(카를로) 아바르트를 위대한 모터사이클 레이서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아직도 10대의 소년시절부터 기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25-27년 이탈리아의 카스타냐(Castagna)회사에서 일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이 회사에서 모터사이클의 차축을 설계하였다. 비엔나로 돌아온 그는 모토르 툰-요셉 오파브스키(Motor Thun & Joseph Opawsky)회사에서 일하다가 1928년부터 모터사이클 레이서로 나섰다. 그는 그해에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제임스 사이클 대회에 참가하여 1등을 차지했다. 그로부터 그는 무려 다섯 번에 결처 유럽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모터사이클 대회에 출전하면서도 엔지니어링 연구를 계속하였다. 1933년 린츠 대회에서 사고를 당한후 그는 사이드카 설계에 전념하였다. 그가 설계한 사이드카가 부착된 모터사이클은 오리엔트 엑스프레스(급행열차)와 비엔나로부터 오스텐트(Ostend)까지 1,300 km의 구간을 경쟁하여 우승했다.

 

그는 1934년 이탈리아로 영구 이전하였다. 그는 로마에서 유명한 자동차 제작자 페르디난트 포르세(Ferdinand Porsche)의 사위인 안톤 피에슈(Anton Piech)라는 사람을 만나 친교를 나누게 되었다. 아바르트는 안톤 피에슈의 여비서와 결혼하였다. 아바르트는 1938년 유고슬라비에 모터사이클 경주대회에 다시 출전하였으나 이번에도 큰 부상을 당하였다. 이후 그는 더 이상 모터사이클을 탈수 없게 되었다. 아바르트는 자동차 엔지니어인 루돌프 흐루스카(Rudolf Hruska) 및 피에로 두시오(Piero Ducio)와 함께 CIS 이탈리아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스포츠 자동차 제작하는 회사였다. 아바르트와 그의 동료들은 나주엥 포르세360의 모델이 되었던 티포360을 설계하여 생산하였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아바르트는 경주용 자동차의 성능개선을 위해 더욱 노력코자 했으나 1949년 초에 사업파트너인 두시오가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바람에 모든 작업을 원점으로 돌려야 했다.

 

아바르트는 1949년 3월 말에 토리노에서 Abarth & C 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새로운 회사의 로고는 스코르피오(전갈)이었다. 점성술에 의하면 아바르트는 전갈좌에 해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바르트의 회사는 경주용 자동차를 생산했다. 고성능배기파이프는 아바르트가 개량한 것이다. 그는 1971년 자기의 회사를 피아트(Fiat)에 매각하였다. 그후 고향인 비엔나에 돌아와 요양하다가 1979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현재 아바트는 야마하와 손을 잡고 있다.

 

야마하 FZ1 아바트. 전갈은 아바트 회사의 로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