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이며 과학자인(Most Beautiful Woman By Day, Inventor by Night)
헤디 라마르(Hedy Lamarr)
비엔나가 낳은 세기의 미녀 헤디 라마르
헤디 라마르(1914-2000)는 비엔나 출신의 영화배우이다. 아마 비엔나 출신의 영화배우 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세기의 미인이었다. 그러면서 과학자였다. 헤디 라마르는 오늘날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핸드폰의 중요한 요소인 스펙트럼 분산 통신기술(WiFi)을 미국의 작곡가인 조지 앤틸(George Antheil: 1900-1959)과 공동으로 개발하였다. 라마르는 1914년, 1차 대전이 시작되던 해에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한 해였다. 헤디 라마르의 원래 이름은 헤드비히 에바 마리아 키슬러(Hedwig Eva Maria Kiesler)였다. 아버지 에밀 키슬러(Emil Kiesler)는 성공한 은행가였으며 어머니 거트루트(Gertrud)는 부다페스트 출신의 피아니스트였다. 라마르의 부모는 모두 유태계통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도 설명하겠지만 라마르는 그가 출연했던 가장 성공적인 영화인 '삼손과 델릴라'에서 유태여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블레셋 여인으로 나온다. 라마르는 어린 시절에 피아노와 발레를 공부했다. 한때는 베를린에서 연극인인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라인하르트는 라마르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불렀다. 얼마후 아직도 10대 소녀인 라마르는 독일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상대역은 정상급 배우들인 하인츠 뤼만(Heinz Rühmann)이나 한스 모저(Hans Moser)였다.
'삼손과 델릴라' 촬영 당시
1933년초, 라마르는 구스타브 마하티(Gustav Machaty)의 악명 높은 영화인 '엑스타시'(Ecstasy)에 출연하였다. 프라하에서 제작한 체코슬로바키아 영화였다. 영화에서 라마르는 나이많은 남편의 무관심으로 사랑에 굶주려 몸부림치는 젊은 부인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가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1930년라는 아직도 보수적인 시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인인 라마르가 오르가즘의 무아경에 도달한 얼굴모습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었으며 또한 누드의 그가 숲속에서 달려가는 장면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인하여 영화 엑스타시는 악명이 높았고 무한한 논란에 휩싸였지만 반면에 라마르에 대한 인기는 높이 치솟았다. 그해 8월, 라마르는 비엔나에 본부를 둔 무기제조업자인 프리드리히 만들(Friedrich Mandl)과 결혼하였다. 나중에도 설명이 나오지만 라마르는 평생동안 여섯 번이나 결혼했다. 기왕에 요약하여 보면 프리드리히 만들(1933-1937), 진 마키(Gene Markey: 1939-1941), 존 로더(John Loder: 1943-1947), 테디 슈타우퍼(Teddy Stauffer: 1951-1952), 하워드 리(Howard Lee: 1953-1960), 루이 부아(Lewis J. Boies: 1963-1965)가 남편들이었다. 라마르는 1965년 여섯 번째 남편인 루이 부아와 이혼한 이후 20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5년동안 혼자 살았다. 다시 첫 번째 남편인 만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영화 '공모자'의 한 장면
첫번째 남편인 프리드리히 만들은 라마르보다 13년 연상이었다. 나중에 라마르가 쓴 자서전인 ‘영화 엑스타시와 나’(Ecstasy and Me)에서 라마르는 만들을 ‘너무나 권위를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마치 파시스트와 같았다. 그러면서 대단히 완고했다. 내가 외출하지 못하도록 집안에 가두어 놓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만들은 자기의 부인(라마르)이 외설적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영화 ‘엑스타시’의 필름을 할수 있는 대로 모두 사들였다. 특히 오르가즘 얼굴 표정이 나오는 장면과 누드로 숲속을 달리는 장면은 모두 삭제하였다. 나중에 라마르는 오르가즘 장면에서 감독이 옷핀으로 발바닥을 살살 찌르는 바람에 그런 모습을 표현할수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만들은 라마르가 더 이상 영화에 출연하지 않도록 수단을 강구했다. 대신에 그는 라마르를 과학자들이나 기업가들의 모임에 데리고 다녔다. 라마르는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과학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시계를 분해하고 다시 맞추는 놀이를 좋아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었다. 라마르는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수학을 척척 푸니 모임의 내노라하는 과학자들은 그저 라마르를 경이의 눈으로 쳐다볼수 밖에 없었다. 라마르는 남편 만들이 과학자들과의 모임을 주선해 준데 대하여 고맙게 생각할 정도였다. 라마르는 과학자들과의 모임을 통해서 군사기술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런 모임이 없을 때에는 남편의 저택인 슈봐르체나우(Schwarzenau)성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만들 역시 유태인의 혈통이었지만 나치의 방위산업에 적극 관여하였다. 라마르는 남편이 나치에 협조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라마르의 자서전에 의하면 만들은 두명의 악명높은 지도자인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동시에 자기 저택에 초청하여 파티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라마르는 잔혹한 나치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싫어서 남편 만들로부터 탈출키로 결심했다. 1937년의 어느날 밤, 라마르는 하녀로 변장하고 슈봐르체나우성을 빠져나와 파리로 도피하였다. 파리에서 그는 남편 만들과의 이혼에 성공하였다. 이후 런던으로 갔다가 종래에는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어떤 에피소드에 따르면 라마르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참석하는 파티에 가장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참석했다가 하녀의 도움을 받아 보석을 걸친채 그대로 파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고도 한다. 라마르의 도피를 눈치챈 남편 만들은 곧 추격을 시작했지만 라마르는 몇차례의 위기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파리로 갈수 있었다고 한다. 라마르가 파리로 도피한 이듬해에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합병되어 나라가 없어졌다.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도피한 그는 영화감독인 루이스 마이어(Louis Mayer)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이때 마이어는 헤드비히(Hedwig)라는 이름 대신에 헤디(Hedy)라는 예명을 쓰도록 했고 라스트네임은 무성영화시대의 유명한 배우였던 바바라 라마르(Barbara LaMarr)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라마르(Lamarr)라고 부르도록 했다. 아름다운 바바라 라마르는 1926년 약물과용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우상이었다. 헤디 라마르는 런던에 잠시 머물다가 곧이어 미국으로 향하였다. 라마르는 할리우드에 도착하자마자 영화촬영 계약을 맺었다. 미국에서 처음 촬영한 영화는 1938년의 '알지에'(Algiers)였다. 라마르는 관능적이고 요염한 역할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할리우드에는 세계의 미녀들이 모두 모여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르 만한 미인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영화 '알지에'를 필두로 라마르는 무척 바쁜 스케줄로 생활해야했다. 1940년에는 '붐 타운'(Boom Town), 1942년에는 '화이트 카고'(White Cargo), 역시 1942년에는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원작의 '토르틸라 플랫'(Tortilla Flat: 멕시코의 납작하게 구운 빵)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1941년에는 할리우드의 미인대표인 라나 터너(Lana Turner), 주디 갈란드(Judy Garland)와 나란히 지상최대의 호화 뮤지컬인 지그펠트 걸(Ziegfeld Girl)에 출연하기도 했다.
라마르는 1940년부터 1949년까지 18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라마르는 당시에 이미 두 아이를 기르고 있었지만 아름다움은 변치 않았다. 그는 1945년에 MGM을 떠났다. 그리고 1949년 파라마운트의 ‘삼손과 델릴라’(Samson and Delilah)에 출연하여 사상 최고의 히트를 기록했다. 빅터 마추어(Victor Mature)가 삼손을 맡았고 거장 세실 B 데밀(Cecil B DeMille)이 감독한 작품이었다. 그러다가 1951년 코메디언 밥 호프(Bob Hope)와 함께 ‘내가 좋아하는 스파이’(My Favorite Spy)에 코믹한 역할을 맡아 출연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로부터 라마르는 사양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라마르의 마지막 작품은 1957년의 다큐멘타리 영화인 ‘인류의 이야기’(The Story of Mankind)에서 잔다크로 출연했던 것이었다.
1965년 라마르는 뜻하지 아니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어떤 상점에 들어 갔다가 돈을 치루지 않고 물건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이른바 샵리프팅(Shoplifting)으로 체포된 것이다. 물론 라마르는 잠시 유치장에 있다가 보석으로 나왔지만 라마르의 명성에 손상이 간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후 앤디 워홀(Andy Warhol)이라는 짖굳은 감독이 '헤디'(Hedy)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 유명여배우가 어떻게 상점에서 물건을 슬쩍하는 수준으로 변모하였는지를 보여주었다. 라마르는 명예가 크게 훼손되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반박도 할수 없었다. 대신, 라마르는 자서전인 ‘엑스타시와 나’를 발간하여 자기에 대한 많은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다. 물건훔친 사건이 있는 직후 라마르는 '사진 속의 엄마는 (죽었어요'Picture Mommy Dead)라는 영화에 출연키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계약이 취소되었다. 라마르의 역할은 헝가리 출신의 자 자 가보(Zsa Zsa Gabor)에게 돌아갔다. 그로부터 라마르는 멀리 플로리다에 정착하여 살면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되도록이면 피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1991년, 라마르가 78세였을 때 또 다시 사건이 터졌다. 플로리다의 어떤 상점에서 라마르가 물건을 훔치려다가 발각된 것이다. 하지만 미수였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지만 또 한번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다. 고소는 기각되었지만 사건의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라마르는 1953년 미국시민으로 귀화하였다. 라마르의 이름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인 할리우드 블로바드 6247번지에 스타로 남겨져 있다. 라마르는 2000년 1월 19일 플로리다주의 올란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세였다.
빅토르 머추어와 공연한 1949년도 '삼손과 델릴라'
아방 가르드 작곡가인 조지 앤틴은 라마르의 이웃에 살았다. 조지 앤틸은 독일 이민자의 아들이었다. 과학적 작곡에 관심이 많았던 앤틸은 주로 악기의 자동조절에 대한 실험을 하였고 그에 대한 작곡을 하였다. 예를 들면 '기계 발레'(Ballet Mecanique)라는 영화음악이었다. 여러 대의 피아노를 동시에 연주하는 작품이었다. 과학에 관심이 컸던 라마르는 앤틸과 만나면서 비밀통신시스템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1941년 6월, 라마르와 앤틸은 비밀통신시스템을 완성하고 특허를 출원하였다. 미국특허국은 앤틸과 헤디 키슬러 마키(Hedy Kiesler Markey)에게 특허를 내주었다. 당시 라마르는 진 마키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헤디 키슬러 마키였다. 이들이 개발한 주파수 호핑(Hopping)기술은 비록 초기단계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아노 공명을 이용하여 주파수를 변경하는 것이었다. 이 기술은 수중에서 발사된 무선유도의 어뢰를 적함이 주파수 혼돈을 일으켜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개발된 것으로 훗날 실제로 잠수함에서 이용되었다. 필자는 실상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서 내용을 잘 모른다. 독자제위의 양해를 구한다.
헤디 라마르가 조지 앤틸과 함께 개발한 분산스펙트럼 스케치. 오늘날 핸드폰의 와이파이를 가능케 한 발명이었다.
앤틸과 라마르의 주파수 호핑 기술은 당시로서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현대 핸드폰의 분산스펙트럼 통신기술은 라마르와 앤틸이 개발한 기술에 기본을 둔 것이다. 라마르는 국가발명가위원회에 멤버로 가입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발명가위원회에 들어오는 것보다는 전시채권 판매를 위한 범국가적 행사를 지원하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라마르는 전시채권 판매촉진모임에서무려 단 한 차례에 무려 7백만불의 전시채권을 판매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라마르는 2000년 1월 19일, 플로리다 올란도 인근의 알타몬테 스프링스(Altamonte Springs)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앤소니 로더(Anthony Loder)가 라마르의 유분(遺紛)을 비엔나로 가져가 비엔나 숲에 뿌렸다. 라마르의 유언에 의해서였다. 죽어서라도 고향인 비엔나의 숲에 쉬기를 원했던 것이다. 2005년, 독일어사용국가의 제1차 ‘발명의 날’ 기념식은 11월 9일 거행되었다. 헤디 라마르의 생일을 기념하여서였다. 마지막으로 남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조지 앤틸(조르주 앙틸)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첫 번째 남편 프리드리히 만들(1900-1977)은 그의 아버지가 설립한 무기제작회사를 인수하여 경영했다. 무기회사의 이름은 히르텐버거 파트로넨 파브릭(Hirtenberger Patronen Fabrik)이어서 마치 방직공장처럼 보인다. 만들은 유태계 혈통이지만 오스트리아 파시스트를 지원했다. 하지만 나치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둘째 남편인 진 마키(Gene Markey: 1895-1980)는 대본가이며 제작자였다. 1939년에 결혼하여 1941년에 이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는 나중에 세 번째 남편인 존 로더가 양자로 입양하여 제임스 라마르 로더라는 이름을 가졌다. 제임스 라마르 로더는 헤디 라마르의 유언장에 자기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다고 하여 소송을 제기하고 재산의 분할을 요구했다. 그러나 변호사와 협상이 되어 현금 5만불을 받고 소송을 취하하였다. 라마르와 마키는 3년간 결혼상태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나중에 이혼법정에서 라마르는 남편 마키와 전체 3년 중에 4일밖에 함께 있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판사는 라마르에게 만일 앞으로 다시 결혼한다면 장래 남편과 3주 이상 동거할 것이며 그 사실을 전남편인 마키에게 통보하도록 권고하였다. 세 번째 남편은 배우인 존 로더(1898-1988)였다. 1943-47년간 결혼했다. 두명의 자녀를 두었다. 나중에 라마르의 임종까지 지켜본 앤소니 로더와 동생 드니스 로더였다. 로더와 라마르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전남편 마키의 아들인 제임스를 입양하였다. 제임스 라마르 로더였다. 네 번째 남편은 어네스트 테드 슈타우퍼(1909-1991)로서 보통 테디(Teddy)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나이트클럽 오너이며 식당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1951-52년간 결혼했었다. 다섯 번째 남편은 하워드 리(1908-1981)였다. 텍사스의 석유부호였다. 1953-60년간 비교적 오래 결혼했었다. 하워드 리는 1960년에 라마르와 이혼하고 영화배우인 진 티어니(Gene Tierney)와 재혼하였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남편은 루이 부아(Lewis Boies)였다. 1920년생으로 라마르보다는 6세 연하였다. 라마르의 이혼담당 변호사였다. 1963-65년간 결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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