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 서거 이후

정준극 2009. 9. 3. 16:22

[모차르트 서거 이후]

 

모차르트는 1782년 콘스탄체와 결혼하여 결혼생활 9년 동안 모두 여섯명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그중 넷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대단히 높았었다. 나중까지 성장한 자녀가 아들인 칼(Karl)과 프란츠(Franz)였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콘스탄체는 아이들과 함께 당장 먹고 살 일이 아득하여 옷을 차려입고 평소에 모차르트와 친분이 있던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 재정적인 도움을 청하였다. 모차르트는 죽기 전에 빚이 많았다. 콘스탄체는 우선 빚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모차르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대개 콘스탄체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서 빚을 탕감해 주었다. 누군가가 레오폴드 황제에게 도움을 청해 보라고 말해주었다. 모차르트는 그 전의 황제인 요셉 2세 때에 잠시 궁정작곡가로 일한바 있었다. 말하자면 공무원으로 잠시 봉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장례식을 치룬지 4일후인 12월 11일, 콘스탄체는 레오폴드 황제를 알현할수 있었다. 콘스탄체는 울먹이면서 황제에게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로부터 미망인연금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기운을 차린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는 일련의 콘서트를 기획하였다. 상당한 수입이 있었다. 콘스탄체는 악보 출판도 서둘렀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그의 음악에 대한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기 때문에 음악출판사마다 모차르트의 악보를 확보하여 출판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열정적인 파도가 몰려왔던 것이다. 물론 출판사들은 모차르트의 악보를 출판할 때마다 콘스탄체에게 상당한 사례를 했다. 그리하여 얼마후 콘스탄체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없게 되었고 오히려 전보다 더 부유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사도 갔다.

 

   

모차르트의 아들인 칼 토마스(Karl Thomas)과 프란츠 사버 볼프강(Franz Xaver Wolfgang). 칼은 나폴리공국에서 근무했으며 프란츠 사버 볼프강은 작곡도 하고 잘츠부르크에서 음악교사를 하였다. 두 사람 모두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후손은 없다. 막내 아들 프란츠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전에 태어났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세 종류의 자서전이 나왔다. 하나는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쓴 것으로 프리드리히 슐리히터그롤(Friedrich Schlichtergroll)이란 사람이 쓴 것이다. 그는 모차르트의 누이인 난네를로부터 많은 얘기를 듣고 자서전을 썼다. 두 번째 자서전은 프란츠 니메체크의 것이다. 주로 콘스탄체와 함께 작업을 했다. 콘스탄체와 재혼한 덴마크 출신의 폰 니쎈도 모차르트의 자서전을 썼다. 콘스탄체와 언니인 조피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1782년의 콘스탄체. 큰언니 알로이지아의 남편, 즉 콘스탄체의 형부인 요셉 랑게가 그렸다.

                            

[모차르트에 대한 추억]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많은 사람들이 모차르트와 자기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글을 썼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사에서는 평소 모차르트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여 게재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어떤 인터뷰는 1820년대에 이루어진 것도 있으므로 이런 모든 기사들의 내용이 정확하다고는 말할수 없다. 하지만 모차르트를 추모하는 마음만은 한결같았다고 말할수 있다.

 

모차르트의 가까운 친구이며 테너로서 ‘마술피리’ 초연에서 타미노역의 이미지를 창조했던 베네딕트 샤크(Benedikt Schack)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2월 4일 오후 2시 모차르트의 집에서 진혼곡을 연습했지요. 그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누워있었습니다. 모차르트는 알토 라인을 불렀고 저는 소프라노 라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처남인 호퍼(Hofer)가 전에도 그랬던 것 처럼 테너를 불렀고 나중에 만하임극장의 전속이 된 게를(Gerl)이 베이스를 맡았습니다. 라크리모사(Lacrimosa)의 첫소절을 부를 때 모차르트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는 악보를 옆으로 밀어놓고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연습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로부터 11시간후인 다음날 새벽 1에 모차르트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샤크의 얘기는 다른 사람들이 전하는 내용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인사불성의 상태였다고 했는데 샤크는 모차르트가 임종하기 하루 전날 친구들과 함께 진혼곡을 연습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샤크가 날짜를 잘못 기억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자서전을 쓴 니메체스도 거의 비슷한 내용을 기술해 놓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옆에 있던 사람에게 진혼곡의 악보를 머리맡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모차르트는 ‘내가 전에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 진혼곡은 나 자신을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이렇게 말한후 그는 악보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라고 적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즐거운 한때

                              

일반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병상에서 제자인 쥐쓰마이르를 불러 진혼곡의 마지막 소절들을 받아 적도록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차르트 연구가인 솔로몬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더구나 이런 주장이 1856년에야 나왔던 것을 상기하며 사람들이 만들어 낸 얘기라고 주장했다. 한편, 모차르트의 처제인 조피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모차르트가 쥐쓰마이르에게 진혼곡과 관련하여 무슨 지시를 했다고 증언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에게 진혼곡의 마지막 파트를 받아 적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살리에리가 진혼곡을 완성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그건 영화이다.

 

모차르트와 제자인 프란츠 쥐쓰마이르가 완성한 진혼곡 음반. '모차르트 레퀴엠, 쥐쓰마이르 레퀴엠'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작곡가인 이그나즈 폰 자이프리트(Ignaz von Seyfried)는 1840년 말하기를 “모차르트는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마술피리’에 무척 집착하였지요. ‘마술피리’는 9월 30일에 초연된 이래 계속 인기를 끌고 공연되고 있었습니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콘스탄체의 언니인 요세파 호퍼(Josepha Hofer)가 ‘밤의 여왕’을 맡았지요. 모차르트는 침대에서 ‘조용히 해요, 조용히! 호퍼(밤의 여왕)가 지금 막 F음을 내려고 해요. 우리 처형이 이제 두 번째 아리아인 Der Hölle Rache!를 부르고 있네요. B 플랫을 참으로 기가 막히게 내는군요. 회르트! 회르트! 회르트! 데어 무터 슈부르!(Hört! hört! hört! der Mutter Schwur)라고 소리쳤답니다".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에서 누가 언제 어떤 노래를 부르는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들인 칼(Karl)은 당시 일곱 살이었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 모차르트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며칠전부터 몸이 굉장히 부우셨어요. 그래서 도무지 움직이지를 못하셨죠. 게다가 몸에서 무슨 악취가 대단했어요. 아마 배속에서 생겨난 악취인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의사가 부검하는데 대단히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도 설명하겠지만 모차르트의 두 아들, 즉 칼과 프란츠는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다. 모차르트의 후대는 그렇게 하여 끊어졌다.

 

링슈트라쎄의 모차르트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