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죽음

정준극 2009. 9. 3. 16:00

모차르트의 죽음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 1시에 숨을 거두었다. 세상에 평생 무병인 사람은 없겠지만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병을 달고 살았다. 어릴 때는 천연두로 고생을 했고 이어 편도선염, 기관지염, 폐렴, 성홍열, 관절염, 여기에 미안하지만 눈곱이 끼는 병까지 걸려서 고생을 했다. 마지막으로 병마와 싸우기 시작한 때는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 8월 25일부터였다. 모차르트가 신작 오페라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의 프라하 공연을 살펴보기 위해 비엔나를 떠난 날부터였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지만 모차르트는 프라하에 있으면서 점점 병세가 악화되었다. 나중에 모차르트의 자서전을 쓴 프란츠 사버 니메체크(Franz Xaver Niemetseck)는 ‘프라하에 온 그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말하는 중에는 비탄의 심정이 담겨 있었다. 간혹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는 했으나 그건 그의 천성이 반짝 비칠 때 뿐이었다.’라고 쓴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캐른트너슈트라쎄에 있는 슈테플 백화점의 뒷길이 라우엔슈타인가쎄이다. 모차르트는 라우엔슈타인가쎄 8번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집은 사라지고 새로 건물이 들어섰으나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장소라는 명판이은 붙어 있다.

 

프라하 방문을 마치고 비엔나에 돌아온 모차르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것 같은 상태였지만 용하게 버티면서 며칠을 지냈다. 상태가 심히 어려우면서도 밀린 작곡에 전념할수 밖에 없었다. 유명한 클라리넷 협주곡은 바로 이러한 때에 완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란츠 폰 발제크(Franz von Walsegg)백작의 요청에 의한 진혼곡을 작곡하고 있었다. 폰 발제크 백작이 작곡을 청탁했다는 것은 모차르트의 사후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한 때에 오페라 ‘마술피리’의 초연이 뷔덴극장에서 있었다. 9월 30일이었다. 모차르트가 지휘했다. 일설에는 모차르트가 ‘마술피리’를 지휘하다가 기진하여 쓰러졌고 누가 집으로 옮겼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마술피리’ 이후 모차르트의 건강상태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어떤 때는 헛소리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부인 콘스탄체가 모차르트의 자서전을 쓴 니메체크에게 당시의 모차르트에 대하여 밝힌 얘기는 다음과 같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와 파파게나.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가 어떤 것이냐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다. '티토의 자비'라는 주장도 있다. '티토의 자비'는 '마술피리'보다 나중에 작곡이 시작되었지만 초연은 먼저되었다.)

 

“프라하에서 비엔나로 돌아오자마자 그이는 몸살기운이 있다고 하면서 몸이 찌뿌드드하다고 말했어요. 한눈에 보기에도 얼굴에 병색이 돌았지요. 몸이 좋지 않으니까 마음도 우울해진것 같았어요. 평소에는 우스운 얘기도 잘했는데 비엔나로 돌아온 이후에는 우울하기만 했어요. 며칠후에는 기분전환으로 프라터(Prater)에 저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갔어요. 마차를 타고 가면서 그이는 저에게 죽음에 대하여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리고는 지금 작곡하고 있는 진혼곡은 바로 자기를 위해 작곡하는 것이라고 말하더라구요. 그이는 예민한 분이예요. 그런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그이는 ‘나는 분명한 얼마 살지 못할것 같아’라고 말했어요. 그리고는 낮으막한 소리로 ‘독이 몸에 퍼진것 같다. 그런 생각을 떨칠수가 없다’라고 말했지요.”

 

콘스탄체가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중에 병상에서 진혼곡을 작곡하고 있는 모차르트.

 

콘스탄체는 마음이 약해진 남편 모차르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우선 지금 작곡하고 있는 진혼곡을 잠시 미루어 두라고 간청했다. 모차르트는 진혼곡 때문에 몹시 힘들어 했으며 자기의 죽음과 결부시켜 자기의 진혼곡을 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더욱 우울해 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작곡을 하지 않으면 더욱 병세가 심각해 질것으로 생각하여 모차르트가 속한 프리메이슨 지부의 집회실 오프닝을 축하하기 위한 곡인 Freimauerkantate(K 623: 프리메이슨 칸타타)를 미무리하라고 권유했다. 콘스탄체의 전략은 일단은 성공한것 같았다. 프리메이슨 칸타타는 얼마후 완성되어 11월 18일 초연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모차르트는 기분이 좋아서 콘스탄체에게 ‘독이 몸에 퍼졌다는 생각 때문에 공연히 병세만 키웠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했다. 그니저나 어서 진혼곡을 완성해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그런데 독에 대한 생각이 망상이었다고 생각하던 것도 잠시뿐, 얼마후 모차르트는 독이 몸에 퍼져 죽음을 앞두게 되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프리메이슨 칸타타가 초연된지 2일후인 11월 20일, 모차르트는 드디어 아예 몸져눕게 되었다. 몸이 붓고 통증이 심하여 구토를 하기까지 했다. 열이 높았으며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가 작곡에 열중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병세에 대하여는 모차르트 전기를 쓴 게오르그 니쎈(Georg Nissen: 1761-1826)이 비교적 자세히 적어 놓았다. 덴마크인인 니쎈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미망인인 콘스탄체와 결혼한 사람으로 모차르트를 존경하여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모차르트 자서전을 쓴 사람이다. 니쎈은 실제로 모차르트의 옆에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콘스탄체와 그의 여동생 조피(Sophie)로부터 많은 얘기를 듣고 정리하였다. 니쎈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11월 하순부터 손과 발이 급격히 붓기 시작하였고 마치 탈진한듯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자주 구토를 하며 몹시 힘들어 했다고 한다. 검은 색깔의 토해낸 물질은 냄새가 대단히 고약했다고 한다. 마치 내장이 썩어서 토해내는 것 같았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숨을 거두자 시신의 형상이 너무 끔찍하여서 의사들도 감히 접근하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12월 4일 밤 11시경부터 이튿날 새벽 1시, 모차르트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두어 시간 동안은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몸이 너무 많이 부었기 때문에 침대에서 일어나 앉을수도 없었고 움직일수도 없었다고 한다. 장모인 세실리아 베버(Cacilia Weber)와 처제인 조피가 잠옷같은 것을 입히려고 했지만 몸을 움직일수가 없어서 그대로 몸에 덮어만 놓았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레퀴엠 자필 스코어 일부

  

모차르트가 숨을 거둘 때에 옆에는 부인 콘스탄체와 처제 조피, 그리고 한두명의 가까운 친구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는 콘스탄체가 약간 바람이 나서 가출했다가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아들 하나와 함께 병든 남편을 위해 다시 돌아와 마침 진혼곡의 작곡을 도와주던 살리에리와 임종을 지켜보았다는 식으로 얘기가 전개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다. 나중에 조피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언니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침상 옆에 꿇어 엎드려 전능하신 하나님께 제발 볼피(모차르트의 애칭)를 살려 달라고 눈물로서 기도했어요. 옆에 있던 우리들도 함께 기도했습니다.”


모차르트의 임종. 러시아에서 태어난 영국 역사화가인 헨리 넬슨 오닐(Henry Nelson O'Neil": 1817-1880)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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