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장례식

정준극 2009. 9. 3. 16:09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장례]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친구들이 준비했다. 평소의 후원자인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이 많이 애써주었다. 모차르트는 당시 비엔나의 관습에 따라 공동묘지의 평범한 묘지에 다른 시신들과 함께 매장되었다. 비엔나 성문 밖에서 남쪽으로 있는 장크트 마르크스(St Marx) 공동묘지였다. 1791년 12월 7일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당시의 비엔나 관습에 따라 조객들이 아무도 따라가지 않았다고 되어 있지만 살리에리, 쥐쓰마이르, 반 슈비텐 남작, 그리고 두어명의 음악가들이 끝까지 참석했다고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처럼 날씨가 나빠서 진눈깨비가 내리는 질척한 날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은 겨울 날씨답지 않게 비교적 포근하고 맑은 날씨였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관은 당시 요셉2세의 칙령에 따라 재활용관인 슈파르자르크(Sparsarg)관을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모차르트의 임종.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레퀴렘을 리허설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모차르트의 아들.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의 모차르트를 매장했다고 하는 곳에 세운 기념비. 땅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1801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째 되는 해에 장크트 마르크스(St Marx) 공동묘지는 일정지역의 묘지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벌였다. 모차르트가 묻혔다고 하는 묘지도 정리되었다. 일반적으로 비엔나의 공동묘지들은 10년마다 묘지의 재활용을 위해 파헤쳐서 다시 묘지로 사용할수 있게 만든다. 주로 무연고 묘지들이 대상이었다. 이때 다시 파낸 유골들 중에서 돈있는 사람들의 유골은 적당한 경비를 받고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의 한 쪽에 새로 지은 납골당에 보관했다. 묘지 재활용 작업 때에 누구의 유골인지 파악이 되는 것들은 해골에 당사자의 이름을 페인트로 적어 누구의 것인지를 밝혀 놓았다. 무연고 및 가난한 사람들의 유골은 분쇄하여 부피를 줄인후 짐머링(Simmering)에 있는 중앙공동묘지에 다시 매장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당히 폐기한다. 모차르트가 묻혀 있었다고 생각되는 묘지에는 15-20개의 다른 시신들도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일꾼들은 모차르트를 중류층 사람으로 간주하여 4-5구의 다른 유골들과 함께 다른 장소에 다시 묻었다고도 한다. 1784년에 문을 연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는 7천 여기의 묘지가 들어설 자리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묘지자리를 하나 구하는 일은 언제나 프리미엄이었다. 모차르트가 매장된 묘지는 요제프 로트마이어(Joseph Rothmayer)라는 사람이 다시 파헤치는 작업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10년전 모차르트를 다른 시신들과 함께 바로 그 자리에 매장한 인부였다고 한다. 당시 로트마이어는 모차르트가 누군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장할 때에 모차르트 시신의 목부분을 철사로 묶어놓아 나중에 구별하기 쉽도록 해놓았다고 한다. 유골들을 다시 파내어 분쇄할 때에 모차르트의 것은 보관될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트마이어는 모차르트의 유해를 찾아낼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모차르트 묘비. 그 안에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서 추스린 모차르트의 유골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과연, 로트마이어는 자기가 철사로 묶어 놓았던 모차르트의 유해를 찾아냈다.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모두 백골이 되어 있었다. 이날 찾아낸 모차르트의 두개골(해골)은 모차르트의 친구인 요제프 라트쇼프(Joseph Radschopf)가 간직하기로 했다. 1842년 모차르트의 두개골은 라트쇼프의 친구인 야콥 히르틀(Jakob Hyrtl)이라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1868년, 히르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동생인 요제프 히르틀이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인수받았다. 요제프 히르틀은 골상학자였다. 요제프 히르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이 맡아가지고 있었다. 1901년 요제프 히르틀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의 두개골은 잘츠부르크의 국제모차르테움재단에 양도되었다. 모차르트의 두개골은 1902년부터 1955년까지 재단박물관에 전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하지만 1955년 이후에는 공개전시하지 않고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 직원에 의하면 전시되어 있는 두개골에서 밤중에 이상하게 음산한 소리가 자주 났기 때문에 무서워서 전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노래부르는 소리가 들렸는가하면 또 어떤 때에는 비명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그 전에 두개골을 소요하고 있었던 사람들도 그런 섬뜩한 경험을 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전시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잘츠부르크의 국제모차르테움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는 모차르트의 두개골? 아랫쪽 턱이 사라졌다. 위에 있는 치아는 충치를 합하여 11개이다.

 

그동안 법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여러번 면밀히 조사했다. 우선 그것이 모차르트의 두개골인지의 여부를 확인하고 이어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학자들은 지금까지 나온 모차르트의 초상화를 근거로 두개골의 사이즈와 초상화에서의 머리 사이즈를 비교하는 등 여러 연구를 수행하였다. 가장 중요한 조사는 치아와 두개골의 형태였다. 학자들은 로트마이어라는 사람이 파낸 두개골이 모차르트의 것임에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프랑스 골상학자들은 두개골을 통하여 모차르트의 병명을 밝혀내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모차르트가 평소에 두통이 심하였고 현기증이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어떤 병에 걸려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당시로서는 여러 첨단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했다. 그러는데 모차르테움으로부터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사용하여 더 이상 사인이든지 병명이든지를 밝혀서 발표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공연한 논쟁 꺼리를 제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또한 가톨릭으로서 윤리적인 문제도 있었다. 가톨릭은 신의 섭리를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사후 28년이 지난 1819년 바르바라 크라프트(Barbara Krafft)가 그린 모차르트 초상화.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 관광상품에 모델로 등장하는 그림이다.

 

오스트리아역사기록보관소의 발터 브라우나이스(Walter Brauneis)라는 서지학자는 모차르트의 죽음과 관련한 모든 의학적 자료를 조사키로 결심했다. 우선 치아에 대한 자료부터 조사했다. 시신을 부검했던 의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온전한 치아가 일곱 개 뿐이고 나머지는 떨어져 나갔거나 썩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트의 두개골을 살펴보았더니 치아가 11개였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인가? 부검의사가 잘못 계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11개의 치아 중에는 충치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801년 다시 파낸 두개골에는 불행하게도 아래턱이 실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아래턱이 실종되었을 때에 아래쪽의 치아도 손상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해주었다. 치아에 대한 기록이 정확치 않자 학자들은 DNA 검사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DNA를 비교할수 있는 자녀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두 아들(칼과 볼프강)은 모두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에게는 후손이 없다. 다만, DNA 검사를 위한 한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모차르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해를 파내어 그들의 DNA와 모차르트 두개골의 DNA가 일치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당국이 이를 허락할 리가 없다.

 

링슈트라쎄의 부르크가르텐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상

 

두개골을 숭상하는 것은 유럽에서 중세 때부터의 전통이었다. 가톨릭의 영향도 컸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성자들의 뼈, 유물들을 숭배하였다. 교회마다, 수도원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자들의 유물을 하나라도 간직하기를 원했다. 성자의 손가락을 보관하고 있는 곳도 있으며 치아와 머리칼도 좋은 숭배대상이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자의 시신을 미이라가 되도록 그대로 전시해 놓고 숭배하는 곳도 있다. 두개골은 모든 숭배 대상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유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는 승천했기 때문에 두개골을 비롯한 어떠한 유해도 남아 있을리 없지만 만일 승천하지 않고 매장되었다면 아마도 이분들의 유해를 놓고 대단한 논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한편, 두개골은 콜렉션의 대상이었다. 특히 저명한 학자들의 서재에는 누구 것인지 모르지만 두개골이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학자의 학문적인 신비감을 더해주었다. 그런 이유에서 천재나 영웅들의 두개골은 대단한 수집품이었다. 특히 골상학자들은 천재나 영웅들의 두개골을 연구하는 것을 하늘이 부여한 사명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모차르트의 두개골이 관심을 끌게 된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모차르트뿐만 아니라 베토벤, 슈베르트, 하이든, 리스트의 두개골도 항상 콜렉션의 표적이었다.

 

슈테판성당의 프린츠 오이겐 카펠레이 있는 모차르트 영결미사 기념 명판. 1791년 12월 6일 이곳에서 모차르트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모차르트 서거 240주년을 기념해서 1931년에 비엔나의 슈베르트연맹이 설치했다. 명판의 글씨는 AM DIESER STATTE WURDE DES UNSTERBLICHEN W A MOZART LEICHNAM AM 6. DEZ. 1791 EINGESEGNET WR SCHUBERTBUND 1931이라고 되어 있다. 영결미사가 거행된 카펠레(성당내의 작은 예배처)를 Totenkapelle라고 부른다. 현재는 사보이의 프린츠 오이겐의 영묘를 겸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수염이 자라는 카펠레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1750년부터 영결미사 용도로 사용되었던 장소라고 한다.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는 모차르트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1791년에 모차르트를 매장했던 자리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자리라는 근거는 없다. 아무튼 묘비는 세워지고 무덤 모양은 있지만 땅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묘(假墓)이다. 새로 만든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모차르트 묘지에는 장크트 마르크스 묘지에서 파낸 모차르트의 뼈들을 일부 추슬러서 매장했다고 하지만 그 뼈들이 정말로 모차르트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세계의 모차르트 애호가들은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 있는 모차르트의 두개골이 만일 진짜라면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모차르트 묘지에 안장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모차르테움은 '무슨 말씀들을 그렇게 하시냐'면서 거절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임종장면을 그린 그림. 앞에 있는 여인은 부인 콘스탄체인지 처제 조피인지 분명치 않다. 그냥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그려 넣었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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