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신동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사인(死因) 논란

정준극 2009. 9. 3. 16:44

[사후의 사인진단]

 

18세기 후반, 모차르트 시대의 의술은 아직도 초기단계였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사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가 어려웠다. 교구교회인 슈테판성당의 기록에 의하면 모차르트의 사인은 속립열(粟粒熱: Miliary fever)이라고 되어 있다. 속립증은 마치 좁쌀과 같은 작은 돌기가 피부에 퍼져서 생기는 증세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증상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사인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의학이 진보되었지만 모차르트의 사인을 밝혀내는 일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다. 그리하여 다만 과거의 기록에 의존하여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모차르트의 시신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DNA 검사도 할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린시절의 모차르트. 아버지 레오폴드는 바이오린을 연주하고 누나 난네를은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 가장 넓게 퍼진 소문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가 독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소문은 그야말로 소문일 뿐이다. 모차르트가 임종할 당싱츼 증상은 독극물에 의한 증상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살리에리는 물론이고 살리에리와 친분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을 강력히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독살한 주범으로서 많은 눈총을 받았다. 결국 살리에리는 말년에 정신이상이 되어 병원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보다 6년 일찍 태어나서 모차르트보다 34년을 더 살았다.

  

 

모차르트를 독살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수난을 받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요셉 빌리브로트 그림.

 

기왕에 살리에리 얘기가 나온 김에 조금만 더 한다면 다음과 같다. 살리에리는 항간에 그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자 당연히 이를 강력히 부인했다. 그런데 살리에리는 말년에 정신질환이 생겨서 가끔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는데 병원에 있으면서 마침 찾아온 신부에게 자기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생각컨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체가 자기를 대단히 모함하여 온 동리를 돌아다니며 모차르트 독살설을 퍼트리자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고 지내다가 정신병원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강박관념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말한 것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진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렇게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정신이 멀쩡해지면 자기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몹시 후회하였으며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수 없다고 죽어라고 부인했다는 것이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은 여러 사람들이 극본의 주제로 삼았으며 근자에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기둥줄거리가 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푸쉬킨의 단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만들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루머를 무대로 옮겼다. 그나저나 모차르트 자신은 살리에리를 적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에게 보낸 서한들에서 살리에리를 대단히 존경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으며 심지어 자기 아들 칼(Karl)이 살리에리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도록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오페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한 장면. 살리에리의 역할은 베이스 표도르 샬리아핀(Fyodor Shalyafin)이었고 모차르트 역할은 테너 바실리 쉬카퍼(Vasily Shkafer)였다. 이 오페라는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거행된 12월 7일을 기념해서 1989년 12월 7일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이 모차르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차르트가 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통하여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노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28세 때인 1784년에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였다. 이후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을 위해 여러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을 위해 몇 곡을 작곡중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그가 속해 있는 프리메이슨 지부의 새로운 건물이 오픈되는 것을 축하하여서 칸타타 '프리메이슨'(Freimauer)을 작곡 중이었다. 그런중에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에게 돈이 생기는 작곡을 하라고 다그쳤으며 특히 이미 착수금까지 받은 진혼곡의 작곡을 서두르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메이슨을 위한 작곡도 해야 했고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의뢰한 진혼곡도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강박관념을 이기지 못했고 여기에 지병이 악화되어 결국 죽음의 길로 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프리메이슨은 새로운 지부 오픈을 축하하는 칸타타의 작곡이 미루어지는 것은 두고 볼수 있었지만 '마술피리'에서 프리메이슨의 의식에 대한 비밀을 표현한 것은 도저히 참을수 없었다고 한다. 프리메니슨의 규약에 따르면 누구든지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외부로 발설할 것 같으면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당시에 프리메이슨 형제들로부터 도박자금을 위해 많은 돈을 빌렸지만 갚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박 때문에 프리메이슨 동료로부터 빚을 얻었지만 갚지 않는 것은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 처벌이 결국 누적되어서 암살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라우엔슈타인가쎄 3번지 집의 프리메이슨 표시장식.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은 라우엔슈타인가쎄 8번지이다. 그 집은 1849년에 철거되었고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주소는 변경되어서 라우엔슈타인가쎄 5번지이다. 모차르트가 멤버로 가입한 프리메이슨 지부는 바로 앞집인 3번지였다고 한다. 현관에 프리메이슨을 상징하는 도구가 부착되어 있다. 현재 라우엔슈타인가쎄 3번지는 알렉산더라고 하는 의상실이다.


프리메이슨과 관련한 또 하나의 암살설이 있다. 모차르트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여성편력자였다. 하다못해 돈 후안(돈 조반니)이라는 비공식적인 별명까지 갖고 있었다. 살리에리와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도 실은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여친을 중간에서 가로채어서 그렇고 그런 사이로 지냈기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분을 참지 못한 살리에리가 결국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그런 삼각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또 다른 얘기도 있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스의 같은 지부에 있는 어떤 멤버의 23세되는 아리따운 부인을 유혹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도저히 분을 참지 못해서 모차르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뒷받침이나 하듯 그 사람의 이름까지 알려졌다. 프란츠 호프데멜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내용은 당시 모차르트가 속해 있던 프리메이슨 지부의 멤버들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신빙성을 얻기도 했다. 프란츠 호프데멜의 부인인 막달레나와 모차르트의 관계는 비엔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는데 심지어 막달레나가 모차르트의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까지 그럴듯하게 떠 돌았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 막달레나는 남편 프란츠와 대판으로 다투었다고 한다. 이웃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모차르트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언쟁 중에 가끔 모차르트라는 이름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부부싸움을 비극으로 끝났다. 남편 프란츠는 면도칼로 막달레나의 목을 그어 죽이고 이어 자기의 목에도 면도칼을 대어 자살했다. 일설에 의하면 얼마전부터 막달레나와 모차르트의 관계를 알게된 남편 프란츠는 모차르트의 집을 몰래 방문하여 음료수에 독을 넣어 결국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차르트의 장례식 날에야 알게된 막달레나가 크게 항의하자 남편 프란츠가 홧김에 막달레나를 죽이고 자기도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심지어 콘스탄체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소문까지 나왔었다. 모차르트가 주색에 골아서 너무 방탕하기만 하고 가족들은 밥을 먹는지 잠을 자는지 관심없이 지내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수가 없어서 용단을 내려 처치했다는 것이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도 부인이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콘스탄체의 케이스도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라고 내칠수 만은 없을 것같다.

모차르트는 비엔나 궁정에서 많은 적들을 가지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질투를 받았던 것이다. 살리에리가 가장 큰 라이발이라는 소문이었다. 사진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애써서 작곡한 피아노 소품을 모차르트가 즉흥적으로 변주곡을 만들어 요셉 2세 황제를 감탄하게 만들고 있는 장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이 모차르트이며 그 뒤에서 악보를 보고 있는 사람이 요셉 2세 황제이다. 마리아 테레자 여제의 큰 아들이다. 살리에리도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옆에 있었다.

 

살리에리의 독살설과 프리메이슨의 독살설이 흘러나오자 이와 비슷한 내용의 소문들이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그중에서 몇가지 소문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모차르트가 살해되었다면 용의자는 여러 명이 있을수 있다. 모차르트는 비엔나의 사회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으로부터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했다. 그중에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태인 고리대금업자는 모차르트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게 되지 앙심을 품고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얘기다. 모차르트는 궁정에도 적이 많았다. 모차르트는 다른 작곡가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사실 그들의 작품이 유치하기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하여 비판을 퍼부었다. 그리고 천성이 고관대작들을 보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적이 많았다. 지체 높은 귀족들로서 배경없는 평민인 모차르트 한 사람을 어떻게 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자기를 도와줄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 대단히 존경하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영화에서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라이발인 것처럼 묘사되었으나 실제로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 콘스탄체와 두 아들을 돌보아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약삭빠른 콘스탄체는 궁정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가 남편 모차르트를 독살했다고 주장함으로서 자기가 남편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일각의 소문을 일축하였다. 실로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서 살리에리가 몰래 독을 먹도록 해서 남편 모차르트가 죽었다고 선전했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임종하기 전에 자기에게 ‘누군가 나에게 독을 먹여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사람들은 가장 신빙성 있는 사람으로부터의 주장이기 때문에 콘스탄체의 말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모차르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콘스탄체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콘스탄체가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기 위해, 특히 황제로부터 연금을 받아내기 위해 일부러 비극적인 스토리를 부풀려서 조작했다고 보았다. 사실, 콘스탄체와 모차르트의 결혼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두 사람의 결혼을 극력 반대했었다. 하늘의 기적인 모차르트의 앞날을 망칠 여자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의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첫번째 가묘. 아기천사가 지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콘스탄체를 아는 사람들은 콘스탄체가 대단히 이기적이고 동정심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으며 모차르트에게 돈이라도 생기면 노랑동전 한 닢까지 빼앗아 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모차르트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재혼한 것까지도 문제로 삼았다. 모차르트가 요단강을 건너간지 얼마후 콘스탄체는 니쎈(Nissen)이라는 사람과 재혼했다. 그런데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성(姓)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인기전술이었을 것이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열심히 개최하였다. 그레서 수입을 올렸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나가서는 모차르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살을 잔뜩 붙여서 얘기하기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에 대한 숨겨진 얘기를 듣고 싶어서 콘스탄체에게 사례비를 주면서까지 초청하여 일종의 교양강좌를 가졌다. 과연 콘스탄체가 모차르트를 이용해 먹기만 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여서 뜻있는 사업들을 추진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무려 51년이나 더 살았다는 것이다.

 

잘츠부르크의 세바스티안 공동묘지에 있는 콘스탄체의 묘비. 콘스탄티나 폰 니쎈, 모차르트의 미망인. 1842년 3월 6일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다. 그 옆의 묘비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 모차르트.

 

어떤 주장에 의하면 모차르트가 죽은 것은 담당의사인 니콜라우스 클로세트(Nikolaus Closset) 박사의 실수 때문이라고 한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이자 동생 조피에게 주치의인 클로세트 박사를 어서 찾아서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조피는 직접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클로세트 박사의 집에 보내서 모셔오라고 했으나 박사가 부재중이어서 허탕치고 왔다. 조피는 다시 수소문하여 결국 클로세트 박사를 극장에서 찾았다. 심부름 간 사람이 클로세트 박사에게 어서 가자고 말했으나 박사는 역시 박사인지라 당장 위중한 환자보다는 마지막 막의 내용이 중요하니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클로세트 박사는 상당히 늦게 모차르트의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클로세트 박사는 모차르트의 열이 대단히 높은 것을 보고 이마에 차가운 콤프레서(공기압축기)를 얹어 놓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차가운 콤프레서의 쇼크 때문인지 더 이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히포콘드리(우울증)가 심각한 수준이었고 여기에 안티모니를 함유한 약을 너무 자주 먹어서 결국 약물중독이 겹쳐 죽었다고 한다. 당시 안티모니 알약은 해열제로서 상당히 애용되었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가정이 사실이라면 모차르트는 안티모니를 복용함으로서 스스로 독약에 중독되었다고 볼수 있다. 안티모니는 오늘날 자동차 바테리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이다. 또 하나의 주장은 모차르트가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을 복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수은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의 다른 연구에 의하면 모차르트는 자연사했다는 것이다. 미국 볼티모어의 매릴랜드대학교 의학자들은 모차르트가 류마티즘열 때문에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류마티즘열(Rheumatic fever)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류마티즘열이 아니라면 다른 인위적인 이유로 사망해야 하는데 그런 요인을 찾을수가 없으므로 결국은 자연사라고 본 것이다.

 

2009년에 영국, 비엔나, 화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연구진은 모차르트의 사망과 관련하여 역학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역학조사란 18세기 말 당시에 비엔나 사회에서는 어떤 질병이 가장 많은 사망원인이었는지를 살펴보고 모차르트도 통계적으로 그런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연구원들은 모차르트가 연쇄구균에 감염되어 후유증으로 심각한 신장염 증세를 보이다가 사망했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 질병은 오스트리아에서 봐써주흐트(Wassersucht: 수종)라고 부른다. 가장 신빈성 있는 사인이다. 그러나 물론 추측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무덤이 어디인지만 확실하게 알수 있다면 시신을 파내어서 최근의 분석기술로서 사인을 규명할수도 있을 것이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모차르트의 머리칼로 생각되는 한줌의 머리칼이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생가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면 머리칼로서 사인 분석을 할수 있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머리칼이 어릴 때의 것이어서 아무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장면. 오시리스 신전에서 고승 자라스트로와 타미노왕자의 만남.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를 통하여 프리메이슨의 비밀을 폭로했기 때문에 프리메이슨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소문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