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도선사(道詵寺)
이청담 스님 기념관이 있는 절
도선사 대웅전. 마당 가득히 연등이 커다란 차일처럼 걸려있다.
도선사라고 하니까 주로 도사들이나 신선들이 살고 있는 절인줄 아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름만 보아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않을수 없다. 과연! 도선사는 도사들이나 신선들이 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려한 산중에 있다. 아랫마을로부터 도선사로 올라가는 길은 숲이 우거진 계곡을 따라 이어져 있어서 경치가 그럴듯하다. 게다가 도선사 뒤편은 삼각산 석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서 장관인 것도 인상적이다. 서울의 행정구역에 속하여 있는 사찰로서 도선사만큼 아직도 산중에 도사리고 있는 절도 없을 것이다. 실로 ‘삼각산도선사’라는 명칭에 어울리게 산중에 파묻혀 있다. 물론, 경내의 이곳저곳은 항시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고 자동차들은 바로 절 앞까지 비집고 들어와서 주차하는 바람에 속세를 떠나 적막한 곳이라는 느낌은 정말이지 별로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선사는 산중사찰이다. 근자에 작정하고 도선사를 다시 찾아보았다. 다시 찾아보았다고 말한 것은 금번 도선사 방문이 필자의 세 번째 방문이기 때문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천왕문
돌이켜보건대 첫 번째 방문은 기억도 아물아물한 1950년대 말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에 모처럼 우이동으로 소풍을 가는 바람에 생전처음으로 우이동이란 곳에 왔었고 도선사 옆을 지나쳤던 일이 있다. 아무튼 교통이 어려웠던 시기여서 오늘날의 120번 버스종점까지 오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더구나 도선사 인근에서는 학생들이 점심을 먹을 공간이 없으므로 마땅한 장소를 찾아다니느라고 정작 도선사는 지나쳤기 때문에 절구경은 하지도 못했다. 다만, 인솔 선생님으로부터 도선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들었을 뿐이었다. 두 번째는 사회생활을 하던 1971년이었다. 소풍갔을 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때였으니 세월이 엔간히 흐르긴 흘렀다. 1971년이라는 것을 굳게 기억하는 것은 청담 스님의 다비식에 참석했기 때문이었다. 1971년 11월 며칠인지는 15일에 입적하신 청담 스님에 대한 다비식(화장식)이 거행된 날이었다. 다비식을 보러 가서 그날 하루를 도선사에서 지내고 다음날 하산하였다. 지금의 도선사 사찰버스가 도착하는 곳에 있는 하숙집 같이 생긴 안양암(安養庵)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은 주지 스님의 초청으로 동료들과 함께 경내의 적묵당(寂黙堂)에서 아침식사를 마친후 잠시 절 구경을 하고 내려왔다. 그로부터 이번에 거의 40년만에 뜻한바 있어서 도선사를 다시 구경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한마디 더! 안양암 앞의 광장을 ‘마음의 광장’이라고 부른다.
'마음의 광장'에 자리 잡고 있는 불상
도선사는 강북구 우이동에 있다. 수유역에서 120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광화문이나 안국동 종로경찰서 앞에서 109번을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마을버스 1166번도 있다. 그러면 시내버스 종점의 길건너편 공터에서 도선사 올라가는 전용버스가 있다. 전용버스에는 도선사 신도 이외의 등산객 등의 승차를 거부한다는 안내판이 있지만 시내버스 종점에서부터 절까지 걸어가려면 한식경이나 걸릴지 모르므로 미안한 마음으로 전용버스를 이용하지 않을수 없다. 매 30분마다 운행한다. 도선사 전용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가는 것도 미상불 운치가 있다. 이윽고 ‘마음의 광장’에서 전용버스를 내리면 또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가는 도중에 천왕문(天王門)을 거치며 포대화상 석상과 일본에서 기증했다는 지장보살 동상 등을 관람 할수 있어서 대웅전에 도착하기 전부터 불교문화 탐방이 시작된다.
안쪽에서 바라본 천왕문
천왕문에는 ‘삼각산도선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안쪽에는 천왕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천왕문에는 사천왕이 위엄 있는 포즈로 서 있다. 예전에 왔을 때에는 천왕문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설명판을 보니 천왕문은 1987년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천왕문은 봉황문(鳳凰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봉과 황이 문설주의 어디인가에 그려져 있을법한데 찾지는 못했다. 천왕문은 글자그대로 천왕들이 거룩한 삼보(三寶)를 지키며 절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은연중 체크하는 곳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는 불(佛), 법(法), 승(僧)을 말한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사천왕이 어떤 분이신지 성함이라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설명하자면, 사천은 동서남북의 사방을 뜻하기도 하는데 동쪽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자리 잡고 있다. 천왕문에서는 두 사람씩 팀을 이루어 수위하고 있다. 지국-증장이 한 팀이고 광목과 다문이 한 팀이다.
사천왕중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비파와 보검을 들고 있다.
각자의 모습은 서로 비슷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쉽게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각자의 앞에 작은 설명판이 있으므로 읽어보면 된다. 설명판이 없다는 것을 가정하면, 지국천왕은 비파를, 증장천왕은 보검을, 광목천왕은 용관과 여의주 또는 견색(새끼줄)을, 다문천왕은 보탑을 받쳐 들고 있다. 그러므로 장식물들을 보고서 ‘아하, 이 양반은 증장천왕이구나, 오라, 저 양반은 지국천왕이구나!’라고 감탄할수 있다. 또 한가지 궁금증이 생길수 있는 것은 ‘도대체 사천왕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시무시하게 생기셨는가?’이다. 대체로 사천왕들은 당초에 인도 재래의 전통 신(神)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 사방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사천왕을 점잖은 왕족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심성이 나쁜 백성들 및 철밥통의 복지부동 공무원들 및 날만 새면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정치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인지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광목천왕과 다문천왕. 견색과 보탑을 들고 있다.
천왕문에서 잠시 뜸을 들인후 다시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청동으로 만든 불상이 서있다. 지장보살이다. 도선사의 자매 사찰인 일본 고야산(高野山) 안양원(安養院)에서 1983년 11월 15일 청담스님 12주기 열반재(涅槃齋)를 기념하여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나 저러나 일본의 안양원과 절 초입에 있는 안양암은 아무래도 무슨 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특별히 궁금한 사항이 아니라서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에 파악키로 했다. 지장보살은 누구인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옥-아귀-축생-수라-사람-하늘의 6도(道) 윤회 때문에 끝없이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해 주고 지옥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극락세계로 안내해 주는 보살이라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한 뒤로부터 미륵보살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는 분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미륵보살은 솔직히 언제 올지 모르는 존재이다. 유태교의 메시아와 같은 존재이다. 기독교에서는 메시아가 이미 2천여년 전에 오셨는데 유태교에서는 아직 안오셨다고 주장하고 있고 불교에서는 미륵불이 오신다는데 아마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다는 것이 중론이다. 후고구려 시대에 궁예가 자기야말로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륵보살이라고 주장하여 심상치 않은 행동을 했음은 역사의 한 단면이다.
일본 안양원에서 기증한 청동 지장보살상. 역시!
조금 더 올라가 보자. 대웅전은 아직 멀었는데 역시 오른편에 달마선사처럼 생긴 석상이 빙그레 웃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다. 포대화상(包袋和尙)이다. 불교에도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바로 이 양반일 것이다. 포대화상이라는 이름은 항상 포대를 짊어지고 다니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때의 걸승이었다고 한다. 걸승이란 걸식을 하며 지내는 스님이란 뜻이다. 포대화상은 생존 당시에 정관계에 명함을 열심히 돌리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 못했으나 사후에 차츰 그의 공덕이 알려지게 되어 일반 백성들로부터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포대화상의 일화에 대한 것을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으므로 생략키로 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탁발하여 받은 물건이 포대에 가득차면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특히 불쌍한 어린아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선사가 선전하고 있는 포대화상의 신통일화 한가지를 소개하자면, 포대화상은 비가 올것 같으면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는데 때문에 느닷없이 나막신을 신은 포대화상이 마을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아하, 오늘은 비가 오겠구나!'라고 예상하여 비설거지를 했다고 한다. 이렇듯 포대화상은 신통한 양반이었다고 한다. 실로 대단한 신통력이었다.
포대화상. 이 분은 중국에서 오신 분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초파일도 아닌데 연등이 커다란 차일을 친것처럼 마당을 덮고 있다. 일단은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대웅전 정면의 모습까지 가리고 있어서 아쉬웠다. 대웅전에서는 때가 때인지라 대학수능시험을 앞둔 학부모들의 간절한 기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부모들은 이렇듯 자녀들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자녀들은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있으니 걱정이 되어 한탄하다가 한탄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는 생각에 한탄을 접고 대웅전 뒤편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상당히 넓은 장소가 나오며 한쪽에 마애석불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평일인데도 여러 신도들이 아예 작정이나 한듯 석불을 향하여 수없이 절을 하거나 또는 방석 위에 경전을 올려놓고 독경을 하고 있었다. 역시 자기 자녀들이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기를 무조건 비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도선사 석불은 유명하다. 통일신라의 경문왕 시대에 도선국사(827-898)가 친히 제작하였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이 나라의 명산승지를 두루 답사하다가 삼각산 기슭에 이르러 눈을 들어 보니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하여 발길을 돌리지 못하다가 문득 이곳이야 말로 천년후 말세 불법이 재흥할 곳이라고 예견하고 일종의 기념품을 남기기 위해 믿거나 말거나 신통력을 발휘하여 옆에 떡 버티고 있는 높이 약 20미터의 큰 바위를 단숨에 반으로 잘라 그 한쪽 면에 약 8미터 높이의 관세음보살상을 새겼다고 한다. 과연 가만히 보니 큰 바위를 반으로 쪼개어 짐짓 석불을 새긴 것처럼 보였다. 도선사 석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34호이다.
도선사 석불. 옛날에 도선국사가 신통력으로 커다란 바위를 단번에 반쪽으로 가르고 관세음보살을 조각했다고 한다.
도선사에서 또 하나 눈여겨 볼 건물은 명부전(冥府殿)이다. 명부전은 해방 후에 범종각, 천왕문, 적묵당(寂黙堂) 등과 함께 완성된 비교적 근자의 건물이다. 신라시대부터의 대웅전은 1903년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보수하였으나 다시 쇠락하여져서 역시 해방 후에 복원되었다. 본란에서 도선사 명부전 등의 완공 일지를 섭렵하자는 것은 아니다. 명부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영정을 모셔놓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또 정주영 현대회장의 영정도 건너편에 봉안되어 있다. 목하 한나라당의 대권 주자들인 박근혜 및 정몽준의 부모님들의 영정이 명부전 한방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것도 무슨 인연 같았다. 돌이켜 보건대 도선사는 박정희 대통령 및 육영수여사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당시 청담스님은 참회를 통한 호국을 제창하였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도 호국불교의 정신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대웅전 앞의 호국참회원은 청담스님의 수완에 두 분의 정성이 첨가되어 1968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을 구원코자 노력하는 보살이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과 함께 불가에서 말하는 10왕이 봉안되어 있다. 10왕은 인간의 선악을 살펴 상벌을 다스리는 대왕들이다. 염라대왕도 그중의 1인이다.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 건너편에는 정주영 회장의 영정이 있다.
1975년 봄에는 현재 120번 버스 종점으로부터 절까지의 길이 포장되었다. 역시 박정희대통령 내외분의 지원으로 완성되었다. 그 어려운 시절에 4km가 넘는 산악관광도로를 순식간에 포장한 것이다. 지금은 청담로(靑潭路)라고 부르는 길이다. 압구정동의 청담로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길이다. 육영수 여사의 불명(佛名)은 대덕화(大德華)이다. 도선사 주지였던 청담스님이 지어준 불명이다. 육영수 대덕화 보살은 도선사에서 37일 기도를 올리는 등 불심을 돈독히 하는데 게으르지 아니하여 다른 신도들의 추앙을 받았다. 명부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인도 가야산이 원산지라고 한다. 보리수는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 때문에 염주나무라고도 부른다. 도선사의 보리수는 수령 2백년이 넘는다. 말로만 듣던 보리수가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를 알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도선사 명부전 앞에 가면 된다. 보리수 나뭇닢 하나라도 주워서 책갈피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꺼내어 보고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라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불러보아도 좋을 것이다. 보리수라고 해서 쌀, 보리의 보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명부전 앞의 보리수. 인도 가야산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청담스님 얘기가 나온 김에 잠시 부연하자면, 청담스님은 1902년 경상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이순호(李淳浩)였다. 청담스님은 한국불교 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불교정화이후 조계종 산하가 된 도선사의 초대주지가 되었다. 그는 1971년 11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도선사에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그를 기려서 도선사 경내에는 청담스님 기념상이 장엄하게 서 있으며 청담기념관도 설립되었다. 기념관에는 청담스님의 유품, 유작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미상불 관심을 끌고 있다. 미얀마에서 가져왔다는 커다란 옥불(玉佛)도 있고 인도에서 가져온 것 같은 11면 관음상도 볼만하다. 청담스님의 호국불교 사상을 단련하고 발전시키는 도량이 호국참회원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바 있으나 호국참회원의 아래층은 공양장소이다. 즉, 신도들을 위한 구내식당이다.
도선사의 호국 참회원. 벌써 오래되어 단청이 지워지고 있다.
일전에 화계사에 갔을 때에 그곳 3층짜리 대적광전의 아래층에 있는 신도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바 있기에 금번에도 화계사에서의 경험을 되살려 도선사 호국참회원 아래층의 공양간에서 점심을 경험키로 하였다. 물론 일정액의 점심값은 배식대 앞의 보시함에 헌금하였다. 두 절 중에 어떤 절의 점심이 더 훌륭한지를 비교한다는 것은 각 절의 명예가 약간 걸린 일일수도 있으므로 생략코자 한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부식은 화계사가 훨씬 우수하며 식사후 식판 설거지시설은 도선사가 우수하다. 도선사에서는 접시 대신에 군대식 식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도선사에서는 식사 때에 숟가락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도선사에도 참기름, 된장 등을 파는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 것을 보니 맛이 관찮은 모양이다. 판매대 앞에 서성거리며 무심코 엿들은 몇몇 보살님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도선사표 된장이나 미수가루와 장아찌를 사기 위해 일부러 발품을 팔아 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호국 참회원 아래층에 있는 공양간(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주방일. 짬밥처리가 제일 골치.
지면상 마무리해야하므로 마지막으로 도선사의 연혁에 대하여 아주 짧게 고찰해보고자 한다. 도선사는 826년 신라 흥덕왕 시대에 유명한 도승이었던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불법과 천문, 지리의 오묘한 이치를 터득한 도선국사가 전국을 두루 유람하다가 현재의 강북구 우이동 산 67번지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니 산세가 절묘하고 풍경이 청수하여 훗날을 위해 이곳에 절을 건립하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바 있으며 다시 강조하자면 그 절이 바로 도선사이다. 당시는 신라의 국운이 쇠락해지는 안타까운 시기여서 절을 지어 불력으로 국운을 상승시키고자 염원했을 것이다. 도선국사가 도술에도 능통한 유명한 도승이라는 것은 단 한번의 격파로 20미터가 되는 큰 바위를 둘로 잘랐고 단 한번의 손놀림으로 바위에 관세음상을 그려 넣었다는 신통력만 보아도 알수 있다. 과연 도선사의 석불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정을 사용하여 쪼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도선사는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방문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훌륭한 사찰이다.
청담기념관. 청담스님의 유품 등이 훌륭하게 전시되어 있다. 아름다운 불단도 별도로 있다.
대웅전 앞마당의 연등. 매일이 초파일같다. 여름엔 그늘을 만들어 주어서 좋다.
대웅전의 삼존불. 게으른 탓에 어떤 부처들인지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잘 만들어 놓았다.
대웅전과 그 옆의 반야굴. 말이 굴이지 그냥 벽에 부처들의 조각이 있다.
어떤 스님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너무 배를 만져 손때가 흘렀다. 대웅전 올라가는 길목의 작은 연못에 자리 잡고 있다.
엘리베이터 타는 곳의 옆에 있는 어떤 스님. 배가 보시함이어서 배속으로 돈들을 넣는다. 어떻게 꺼내나?
목어가 특히 화려한 범종각
커다란 발우(그릇)에는 돈들을 던져 넣는다. 뒷면 담장 쪽의 부처님 설법 조각이 화려하다. 발우안을 잠시 들여다보니 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청담스님 기념상. 뒷모습이 더 보기에 좋아서...
불탑과 배경의 수많은 불상들. 불상 하나하나에 시주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꼭대기의 불상들은 너무 높아서 누가 기증했는지 도무지 이름을 볼수 없다.
불탑 하단의 화려한 용두 장식. 그리고 벽면을 자세히 보시라. 수많은 작은 불상들...
대웅전 안에도 수많은 작은 불상들
마애석불과 석탑. 서울시유형문화재이다. 아래쪽의 작은 지붕과 비요하면 석탑과 석불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수 있다.
엘리베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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