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계곡의 도심사찰 화계사(華溪寺)
화계사의 자랑 대적광전의 위용. 사람들은 무언지 모르지만 바쁘고 활발하다.
모처럼 수유리 쪽에 갔다가 내친 김에 화계사를 둘러보았다. 강북구 수유1동 소재. 도심사찰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예전에는 분명히 심심산중이었겠지만 지금은 주택가에 발목까지 잡혀 있다. 당장 일주문 옆에는 화계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일주문을 지나서도 무슨무슨 빌라들이 연이어 들어서 있다. 화계사는 초행이었다. 기회있을 때마다 무던히도 절 구경을 다녔는데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고작 수유리에 있는데 화계사는 초면이었다. 어떤 절일까? 삼각산화계사(三角山華溪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은 장대했다. 두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의 서수(해태?) 조각부터 위풍이 당당했다. 예사 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문을 지나 잠시 올라가면 삼각산화계사 사적비(事蹟碑)라는 커다란 비석을 만난다. 비석 상단의 용트림 조각이 화려하다. 하지만 글씨는 깨알 같아서 읽을 염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지나쳐 올라가니 계곡의 물소리가 지척이다. 비가 온 후여서 그런지 계곡을 굽이치며 내려오는 물줄기의 세도가 무척 당당하다. 곧이어 눈앞에 나타나는 웅장한 법당! 무려 3층이다(윗사진).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3층에 있는 대법당의 마루가 마치 아흔아홉칸이나 되는 듯 넓어 보였다. 아무튼 3층 법당은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흔치 않은 경우여서 한참이나 감탄과 함께 이곳저곳을 눈여겨 보고 나왔다.
삼각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화계사. 아담하지만 웅대하다.
대적광전의 아래층은 사무실도 사무실이려니와 주방 및 식당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침 점심공양시간이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재에 참가한 신도들만 점심을 드시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불청객은 절밖에 나가서 점심을 사먹을 여유가 없어서 ‘설마 재에 참가하는 신도가 아니라고 해서 내쫒지는 않겠지!’라는 갸륵한 생각에 배식처를 향해 줄을 섰다. 뷔페스타일이었다. 가지나물, 콩나물, 무생채 나물, 밀가루 부침개, 김치, 된장 국, 그리고 떡이 있었고 후식으로는 수박과 참외가 있었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너무 늦게 당도하였던지 반찬들은 바닥이었고 과일들은 끝물이었다. 이윽고 식객의 차례가 되자 앞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께서 나의 행색을 긍휼히 여기어 주방 안을 보고 ‘여기 수박 새것 좀 가져와요. 이 분 좀 드리게!’라고 소리쳤다. 곧이어 주방 안으로부터 화답의 소리가 있었으니 ‘남은게 없어요!’였다. 식객은 그 아주머니에게 다만 목례로서 감사의 뜻을 표한후 주변이 모두 생면부지의 인물들이어서 한쪽 구석의 빈자리 식탁에 다소곳이 앉아 감사기도를 드린후 열심을 다해 점심을 해결하였다. 식사 중에 중견으로 보이는 몇몇 스님들이 식탁들을 순방하며 신도들에게 ‘많이 드셨어요?’라든지 ‘오랜만입니다!’라는 인사를 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불청객은 혹시 그 스님이 ‘실례지만 뉘신지요? 어떤 재에 참가하시나요?’라고 물으면 어쩌나하고 내심 마음이 쓰였다. 만일 그렇다면 솔직한 심정으로 ‘예, 본인으로 말씀드리자면 평소 화계사를 흠모하여서 평생에 한번은 방문코자 소원하였는데 마침 오늘에야 그 소원을 이룰수 있어서 왔던 차에 어느덧 공양시간이어서 염치불구하고 공양에 참가하는 바이니 부디 양해하여 주시라’라고 말할 참이었다. 물론 아무런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다. 식객은 식사후 본격적인 절 구경에 나섰다.
화계사가 불청의 식객에세 보시해준 점심 공양
대적광전 1층에 있는 식당의 일부분. 참으로 모두들 조용하게 식사에 여념이 없다.
여기서 잠시, 화계사의 이력에 대하여 일고코자 한다. 조계종인 화계사는 1522년 조선 중종(中宗) 시절 신월선사(信月禪師)라는 분이 뜻한바 있어서 삼각산 기슭인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다. 백운대, 만경봉, 동장대가 있는 삼각산의 기슭이었다. 광해군 시절인 1618년에는 대화재로 인하여 사찰의 건물들이 상당히 잿더미가 되었으나 조선 왕실 종친들의 도움으로 갸륵하게 중건할수 있었다. 숭유배불의 조선이었지만 왕실에서는 불교를 모른채 하지 않았던 덕택이었고 더구나 종친 중에서는 독실한 불자들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 36년을 지내고 김일성에 의한 참혹한 6.25사변도 겪으니 사찰은 어느덧 피폐해졌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1970년대가 되었다. 1972년에는 다른 어느 사찰에서도 보기 힘든 우람한 범종각을 건립하였으며 이듬해인 1973년에는 대웅전에 삼존불을 안치하였다. 그런데 1974년 또다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관음전이 소실되는 아픔을 경험하였다. 1975년 삼성각을 건립하였고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1991년에는 아름답고 웅장한 3층짜리 대적광전의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1998년에는 유명한 화계사 일주문을 완공하였다.
화계사 경내. 도심사찰이지만 한적한 경내이다.
화계사는 우선 이름부터가 난만하다. 어떤 사람은 화계사라고 하니까 자꾸만 화개장터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묻지만 화개장터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화계라는 뜻은 화엄경을 받드는 삼각산 계곡의 아름다운 사찰이 아니겠느냐고 짐작해본다. 그래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을 그토록 웅장하게 건립하였던 것 같다. 만일 화계사를 다른 대찰들에 비하여 신통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화계사는 주변의 계곡으로 인하여 찬사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서울에서 한여름에 이만치 시원한 계곡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 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이다. 경내는 한마디로 아담하다. 대웅전도 아담하고 삼성각도 아담하며 명부전도 아담하다. 화계사의 또 다른 자랑인 천불오백성전(千佛五百聖殿)도 아담하다. 다만, 2층의 범종각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화려하고 장엄하다. 화계사에서는 여러 형태의 건축물을 감상할수 있다. 보화루(寶華樓)는 마치 창덕궁의 낙선재를 보는듯 날렵하다.
날아갈듯 자리 잡고 있는 보화루
여러 사찰들을 심방해 보았지만 화계사만큼 모든 것이 활발하고 열심인 곳도 없는 듯 싶었다. 아마 삼성동의 봉은사 정도가 화계사만큼 활발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왜냐하면 필자는 어느 해 초파일에 봉은사에 가서 점심시간에 잔치국수를 두 그릇이나 소비했던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적광전에서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기도회가 열린다. 수요일 저녁 7시부터는 참선정진이 있다. 일요일에는 오전 9시 반에 일요법회가 있으며 오후에는 참선법회를 봉행한다. 토요일에는 국제선원에서 철야 용맹정진을 봉행한다. 1주일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법회가 진행되는 셈이다. 화계사의 신도회 조직을 보면 신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고 공부하는지 잘 알수 있다. 화계사는 전국에서 몇 안되는 템플 스테이(Temple Stay)의 장소이며 외국인 불교 팬들을 위한 국제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만큼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의 자랑스러운 사찰이다. 그래서 그런지 스님들이 거의 모두 인자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절들의 스님들이 인자하지 않다는 것은 정말 아니다. 화계사를 가려면 지하철 수유역에서 내려 3번이나 4번 출구로 나와서 마을버스 2번을 타고 조금 가다가 화계사 입구 네거리에서 내려 5분정도 걸어 올라가면 금방이다.
일주문의 현판. 단청이 화려하다 못해 현란하다. 이만큼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일주문도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범종각. 아랫층에는 범종이, 위층에는 법고가 있다.
화계사 바로 옆의 계곡
고봉 큰스님 추모비
사택 대문의 금강역사
대웅전 전경. 아담하다.
명부전(가운데)
일주문. 바로 옆의 건물은 화계중학교이다.
천불전. 세어보지는 못했다.
삼성각에 있으면 대웅전의 풍경소리까지 들린다.
화계사 사적비. 글씨를 새기느라고 고생했을 터인데 정작 적혀 있는 글들을 읽어볼 사람은 없을것 같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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