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전쟁기념관 - 피난시절

정준극 2009. 10. 18. 21:28

전쟁기념관 - 피난시절

 

전쟁기념관의 6.25사변 전시실에는 1950년부터 1953년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주로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했던 장면들이 실감있게 전시되어 있다. 사진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이건 아프리카가 아니다. 바로 몇십년전 우리의 실정이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사과를 받아다가 좌판을 벌인 어떤 소녀. 지금 이 소녀는 70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동생이 사과가 먹고 싶어서 하나만 달라고 해도 누나는 절대로 주지 않았다. 먼지를 뒤집어 쓴 사과들. 우리네 신세였다.   

판자촌의 가게. 그나마 가게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밥이라도 먹었다. 겨우 지게를 하나 만들어서 지게꾼 노릇을 하는 사람은 일꺼리가 없어서 지게에 길게 누워있다. 아마 몇끼를 굶었을 것이다. 그래도 허기진 걸음으로 짐만 있으면 죽을 힘을 다하여 지게를 졌다.  

국밥집. 김이 무럭무럭 나는 국밥 한 그릇만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밥을 사 먹고 난 후 조금이라도 남긴 것이 있으면 얻어 가려고 군대 반합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항상 있었다. 애기엄마는 군대간 남편을 대신해서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외상들이 많아서 헛장사하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간혹 미군들이 판자촌을 찾아와서 아이들에게 허쉐이 초콜릿과 리글리 껌을 나누어 주었다. 미군들이 오면 아이들은 말로만 듣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온 것 같이 반겼다. 어떤 미군은 고향에 두고 온 자기 아이들을 생각해서 부대에서 배급나오는 것을 먹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달동네를 찾아와 아이들에게 주었다. 미국은 우리를 살려준 은인이었다.  

피난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화장실 사용이었다. 한마디로 위생 제로지대.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먹은 것도 없는데 왜 그리 화장실에는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할머니들의 말씀. 오늘날 이런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하면 죽으면 죽었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우리나라의 공중화장실이 깨끗하고 문화적이라고 해서 다른 나라에서 배우러 오는 시대가 됐다. 

참으로 기막힌 장면이다. 천신만고 끝에 딸 아이와 함께 부산에 내려와 판자집에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군대에 간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았다. 이제는 더 살아나갈 기운도 없어 보인다. 아이는 아빠가 전사한 것도 모르고 배고프다면서 울기만 한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엄마는 할 말을 잊었다. 누구 때문에 이런 비극이 생겼는가? 김일성이다.

사진으로 보는 부산 광복동의 번화가. 지금의 신창동 일원. 국제시장 또는 도떼기 시장이 있었다. 부산은 그야말로 콩나물 시루였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오지 않았다면 모두들 부산 앞 바다로 쫒겨가서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국제시장을 그린 그림. 그림에는 사람들이 그마나 옷들을 깨끗히 입은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때국물이 조르르 흐르는 넝마들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화색이 도는 것처럼 그렸지만 실은 웃을 일이 하나도 없는데 화색이 돌 리가 없었다.

천막교실. 책도 부족하고 공책도 부족하며 연필도 없었다. 천막이 부족하여 나무 그늘 아래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의 초등학교 교실과 비교해 보시라. 핸드폰이 있었는가, MP3가 있었는가? 학교급식이 있었는가? 이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70이 넘었을 것이다. 여선생님은 벌써 세상을 떠나셨을테고... 

판자촌의 가게. 사탕 한알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한푼 줍쇼'하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아이들은 군인들이 입던 옷을 걸쳤기 때문에 마치 할로윈 데이에 나오는 아이들 같이 보였다.  

그나마 미국에서 보낸 구제품인 분유로 끓인 우유죽이 허기를 달래 주었다. 하지만 우유 죽을 먹고 배탈난 사람들이 많았다. 

지게꾼 아버지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아이들. 아버지가 돈이라도 벌어 과자라도 사오는 날은 그날이 생일이었다. 아버지는 점심도 못 잡수신채 일꺼리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지쳐서 집이라고 찾아 들어오시는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내용을 모른다. 엄마는 방안에 몸져 누워계시다.

야간학교. 우리는 보통 야간이라고 줄여서 불렀다. '너 야간 다니냐?'이라고 말하면 다 알아 들었다. 낮에는 아이들이 돈벌러 나가기 때문에 야간을 다닐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천막안에 칠판이 있는 학교는 고급이었다. 아무리 어려운 피난살이지만 교복은 구해서 입고 다녀야 했다. 야간에 다닌다는 서름을 면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 교복만 가지고는 주간과 야간을 구별할수 없었다. 하지만 주간 학생들은 야간 학생들을 용하게 구별하여 꼴에 얕잡아보았다.  

천막집. 아버지는 새끼를 꼬아 파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새끼를 사겠다는 사람들이 어디 그리 많은가? 어머니는 할 일이 없어서 아픈 아이만을 바라볼 뿐이다. 약이라는 것은 구경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부산의 제5육군병원에서도 약이 없어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많이 죽어 나갔다.

그래도 희망을 갖자. 언젠가는 이 생활에서 벗어나겠지! 그런 희망도 없었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 나 오늘 학교에서 희망에 대해서 배웠어!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우리 모두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대, 그치 엄마?'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견스럽지만 엄마는 속으로 '그래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근데 희망이 밥 먹여 주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풀빵. 할아버지가 어디서 났는지 꼬기꼬기한 지전 한장을 아끼고 아끼다가 결국 손자녀석이 그토록 먹고 싶어하는 풀빵을 사기로 결심했다. 할아버지는 국수집에 들어가서 고추가루를 펄펄 뿌린 얼큰한 국수 한 그릇을 사먹고 싶어도 꾹 참아왔다.

판자촌의 한때. 모두들 핏기가 없다. 못먹어서이다. 팔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다. 하지만 살 사람이 없었다. 늙은 호박 두 덩어리를 며칠 째 팔려고 가지고 나왔지만 팔리지 않았다. 옆에 있는 소녀는 그나마 장작을 팔았다.

피난가는 행렬.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지만 무작정 남쪽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누구때문에? 김일성 때문이다.

지게부대. 그 무거운 대포알과 탄약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그래야 적군과 싸우는 군인들에게 탄약을 공급해 줄수 있다. 이들을 지게부대라고 불렀다.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 전선의 위치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부상병을 산 아래의 야전병원으로 운반하는 것도 지게부대원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