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리 포템킨. 캐서린의 정부이면서 훌륭한 자문관이었다.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Potemkin)도 1762년 페터를 몰아내는 쿠테타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당시 캐서린은 올로프와 깊은 관계에 있어서 아들까지 하나를 둔 처지였다. 때문에 포템킨은 캐서린의 관심 밖에 있었다. 몇 년후인 1772년 캐서린과 막역한 어떤 친구가 캐서린에게 ‘올로프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질투에 눈이 먼 캐서린은 당장 올로프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였다. 다음해인 1773년 겨울에는 이른바 푸가체프(Pugachev) 봉기가 일어나 캐서린을 위협하였다. 푸카체프는 독일 출신인 캐서린은 러시아 여제의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캐서린이 전에 잠시 짜르로 있었던 이반 6세를 살해했다는 주장을 했다. 푸카체크는 페터3세의 아들인 파울을 짜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실제로 파울에 대한 인기가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캐서린은 포템킨을 불러 도움을 청했다. 포템킨은 훌륭한 전략가였다. 포템킨은 볼가 지역에서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그리하여 캐서린과 포템킨은 어느덧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다. 포템킨은 캐서린의 배우자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요셉 2세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에도 영접사절의 대표로 활약했다. 캐서린에게 대학을 육성하여 훌륭한 과학자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포템킨은 내치와 외교에 있어서 캐서린의 훌륭한 자문관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케르손에 있는 포템킨 기념상
포템킨은 1783년 중병에 걸려 자리에 누웠다. 캐서린은 포템킨이 러시아 남부지역 개발사업을 착수해 놓고서 완성하지 못하게 될것 같아 걱정이었다. 몇 년 후인 1791년 포템킨은 52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91년은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해였다. 캐서린은 포템킨의 죽음에 크게 상심하였다. 캐서린은 포템킨이 세상을 떠난지 5년 후인 1796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1월 16일 의식을 잃었으며 다음날 저녁 9시 20분에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캐서린은 생페터스부르크의 ‘페드로-바울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우크라이나 남부 케르손에 있는 캐서린 여제 기념 교회. 포템킨이 건설했다. 캐서린은 포템킨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안치토록 하였다. 케르손은 포템킨이 캐서린을 기념하여 건설한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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