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카테리나 여제

올로프 사건

정준극 2009. 12. 16. 11:45

[올로프 사건]

 

그리고리 올로프

 

그리고리 올로프(Grigory Orlov)는 캐서린이 페터와 결혼하여 살고 있는 중에 가깝게 지낸 정부였다. 페터가 아직 짜르에 오르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캐서린도 여제가 되기 전이었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남편 페터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베일을 벗었기 때문이다. 올로프는 캐서린의 남편 페터가 황제(짜르)가 된지 얼마후 페터가 친프러시아적인 정책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근위병(라이브 가드)을 동원하여 쿠테타를 일으켜 페터를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아낸 장본인이다. 불쌍한 페터는 결국 부인의 정부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에 인생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수 없다.

 

생페테스부르트의 콘스탄틴 궁전에서 벌어진 라이브 가드(Leib Guard)의 리셉션. 라이브는 독일어의 '몸'이라는 뜻으로 라이브 가드는 몸을 바쳐 황제를 보필하겠다고 서약한 근위대이다. 라이브 가드가 되는 것은 황제를 측근에서 경호하기 때문에 대단한 명예였다.

 

페터를 축출한 장본인인 올로프는 집안 내력이 훌륭하여서 그의 할아버지로 말하자면 일찍이 1698년에 페터 대제(페터 1세)에 항거하여 이른바 스트렐치(Streltsy) 봉기를 일으킨 반군의 사령관이었다. 군인이 된 올로프는 1758년 프러시아와의 초른도르프(Zorndorf)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당시 섭정이었던 엘리자베트 여제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올로프는 초른도르프 전투에서 세군데나 부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프러시아군을 물리치는데 기여했다. 엘리자베트 여제가 세상을 떠나고 캐서린의 남편인 페터가 짜르가 되었다. 그런데 페터는 어찌된 일인지 바로 얼마전만해도 프러시아와 죽기 살기로 전쟁을 치룬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친프러시아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페터는 유별나게도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 국왕을 매우 존경했다. 페터는 프레데릭 2세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했다. 제정러시아의 귀족들은 당연히 그런 페터가 못마땅했다. 심지어 캐서린까지도 남편이 하는 일이 못마땅했다. 그래서인지 올로프와 캐서린은 1759년부터 갑자기 가까워졌으며 이윽고 애인관계로 발전하였다. 캐서린은 올로프가 앞으로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올로프는 1761년 7월의 쿠테타에서 선봉을 맡았다. 얼마후 캐서린은 여제(Empress)가 되었다. 올로프와 캐서린의 관계는 공공연하게 되었다. 남편 페터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은 기왕에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니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종용했지만 캐서린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러시아의 여제로서 생애를 보냈다.

 

캐서린에 저항하여 봉기했다가 실패하여 모스크바의 크렘린 광장에서 처형당한 스텔치

 

페터를 몰아낸 쿠테타의 주역 올로프와 그의 세 형제들은 무도 백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상금도 두둑하게 받았다. 그후 캐서린이 여제가 되자 올로프는 생페터스부르크에 어떤 궁전을 하사 받았다. 여제가 된 캐서린에게는 측근의 자문관이 필요했다. 하지만 올로프는 그럴 만한 재능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라면 잘 싸우겠지만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캐서린은 점점 올로프를 멀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캐서린이 여제가 되던 해에 태어났다. 알렉세이 그리고리오비치 보브린스키(1762-1813)였다. 올로프는 1783년 세상을 떠났다.

 

올로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세이 보브린스키 

'왕실 이야기 > 제정러시아 카테리나 여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 파울이 짜르 계승  (0) 2009.12.16
포템킨 사건  (0) 2009.12.16
포니아토브스키 사건  (0) 2009.12.16
스캔들 제조기  (0) 2009.12.16
관대한 종교정책  (0) 2009.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