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엘리자베스 2세

영국과 여왕

정준극 2009. 12. 23. 22:01

영국 역사와 여왕 (The Queens in English History)

 

돌이켜 보건대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 영국에서 역사적으로 남성을 제치고 여성이 통치했던 시기가 실로 여러 번 있었다. 참으로 거룩한 것은 모두 대단한 여왕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름까지 모두 알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몇 명만 실명을 거명하자면, 전설적인 부디카(Boudicca)여왕, 그 후 헨리8세의 딸로서 여왕의 자리에 오른 메리. 그 다음에 역시 헨리8세의 딸로서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1세(앤 볼레인의 딸)는 세계가 알아주는 대단한 인물이었고 이어서 18세기의 앤 여왕도 알아 모시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19세기의 빅토리아 여왕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대단한 여왕이구나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할 입장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여왕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시대에 대영제국의 깃발아래 지구상에 해 질 날이 없다는 얘기가 생겨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직도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에서는 5월 24일을 ‘빅토리아 데이’(Victoria Day)라고 해서 긴 공휴를 맥주나 마시며 지낸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에서 빅토리아 여왕 이래, 여왕들이 통치한 기간의 합이 일반 왕들이 통치한 기간보다 길다는 사실이다. 보라! 현재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만 하더라도 혼자서 반세기가 넘게 여왕으로 재직하고 있지 아니한가. 엘리자베스2세 여왕은 어떻게 여왕이 되었는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공식 사진.

 

케냐의 나이로비로부터 수천 킬로의 거리를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급히 달려온 엘리자베스는 런던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군주로서의 활동에 들어갔다. 국장을 주도해야 했다. 남편을 잃은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이렇듯 왕실에는 대단한 왕비들이 있었지만 모든 행사의 주역은 딸인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는 아직 대관식은 치루지 않았지만 엄연히 대영제국의 국왕으로서 수상으로부터 국정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방송에 출연하여 국민들이 보내주는 애도에 회답해야 했다.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다른 친척들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세 살밖에 안된 어린 철수(Charles)의 엄마 노릇도 해야 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조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원래부터 왕이 될것은 꿈도 꾸지 않은 양반이었다. 그래서 군주로서의 필수 교육은 받지 않았다. 장남인 에드워드가 어려서부터 군주교육을 받았다. 그나저나 조지는 병약한 편이었다. 기관지가 나빴다. 말을 더듬는 습관도 있었다. 연설 솜씨는 거의 제로였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무척 피곤해 했다. 좋게 말해서 수줍음이 많았고 나쁘게 말해서 한심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지가 일단 왕이 되고 나서는 여러모로 변했다. 변했다기보다는 왕으로서 적응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일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치료하는 처방이기도 했다.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터득해 나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더듬기는 했지만 대신 뚜렷이 말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사실 겉으로의 말솜씨나 예의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지는 진실했다. 사람들을 만났을 때 마음으로 대화하였다.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더 듣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을 들어주는 왕이 고마웠다. 조지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만났을 때 진심으로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위로했다. 국민들은 조지 왕을 사랑하게 되었다. 더구나 히틀러와의 전쟁 때가 아니던가? 연일 공습에 시달리던 런던 시민들로서 왕의 위로는 크나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국민들은 조지왕과 메리 왕비가 나치 독일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서 손수 벽돌을 집어 들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았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젊은이의 어머니를 눈물로서 위로하는 모습을 보았다. 조지 왕은 스스로 검소하였다. 자동차를 타는 대신 걸어 다니는 편이 더 많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만사를 무릅쓰고 찾아갔다. 전쟁으로 불안해진 국민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기 위해 왕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조지 왕은 몸을 돌보지 않았다. 오히려 시종들이 왕의 건강을 생각해서 일부러 공식 스케줄을 취소할 정도였다.

 

대관식후의 조지 6세. 어린아이들은 엘리자베스와 마거릿 공주


형이 왕관을 버리고 심프슨 부인에게로 가는 바람에 왕이 된 조지였지만 그렇다고 그 큰 딸인 엘리자베스가 다음 왕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만 후보일 뿐이었다. 조지 왕은 아직도 젊은 편이었다. 왕비인 엘리자베스 안젤라 마가라이트(Elizabeth Angela Margarite)는 통통하고 튼튼했다. 만일 남동생이 태어난다면 왕위는 당연히 그 남동생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남동생은 태어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여동생 마가렛(Margaret)이 있을 뿐이다. 진주와 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아이였다. 마가렛은 영국 왕실에 이런 미인이 있을 수 있나 라고 할 정도로 참으로 복스럽게 생긴 여자였다. 하지만 그의 인생행로의 화려한 이면에는 비련의 아픔도 있었다. 세기적 로맨스라고 하는 피터 타운센드 대위와의 로맨스...하지만 왕실은 마가렛 공주와 일반인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가렛공주에 대한 사연은 별도로 정리하였으니 필히 독하시라.

 

그건 그렇고, 엘리자베스의 세례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더 메리’였다. 저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은 자기의 이름을 무척이나 귀중하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자기 후손 중에서 여왕이 탄생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앞으로 태어나는 왕가의 공주들로서 만일 왕위 계승 서열에 등록되어 있게 된다면 이름 안에 반드시 빅토리아를 넣도록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애초에 넣지 않았다. 그런 그가 여왕이 된 것이다. 어릴 때 엘리자베스의 애칭은 릴리벳(Lilibeth)이었다. 귀여운 이름이었다. 동생 마가렛의 애칭은 버드(Bud)였다. 꽃봉오리처럼 사랑스러웠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조지 6세 

 

[부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5년 9월 9일을 기하여 영국 역사에 있어서 가장 오랜기간 통치한 여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고조모가 되는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기록을 이날 갱신한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1837-1901)은 64년간 통치했다. 정확히 말하면 2만 3천 2벡 26일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1952년에 여왕으로 등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2015년 9월로서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기록을 넘어서게 되었다. 한편,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랜기간 군주로서 재임한 경우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이다. 무려 68년간 황제로서 재임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앞으로 4년간 더 여왕의 자리에 있게 된다면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세운 기록도 갱신할수 있다.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랜기간 군주로서 재임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68년간을 재임하였다.


빅토리아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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