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엘리자베스 2세

결혼과 대관식

정준극 2009. 12. 23. 22:01

엘 여왕의 족보 (Family Tree)와 결혼과 대관식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조지6세는 1895년에 태어나 1952년에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재직 기간 15년.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안젤라 마르게라이트’가 오리지날 이름이며 나중에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고 나서는 보통 ‘여왕의 어머니’(Queen Elizabeth Queen's Mother)라고 했다. 이 할머니로 말씀 드리자면, 어찌나 명이 기신지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고 나서 꼭 50년 만인 지난 2002년 3월 세상을 떠났다. 102세였다. 대단한 할머니였다. 남편보다 무려 거의 50년을 더 살았다. 기네스 신기록에 오를 정도였다. 엘리자베스의 할아버지는 조지5세이다. 엘리자베스가 열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 조지5세의 아버지는 에드워드7세였다. 에드워드7세의 어머니가 바로 저 유명한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란츠 요셉과 씨씨(Sisi)의 시절이었다. 대영제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다스렸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항가리제국은 프란츠 요셉황제가 다스렸다. 이 두 나라의 황태자들은 서로 친구였다. 영국에는 나중에 에드워드7세라고 불린 에드워드 황태자,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가에는 씨씨의 아들 루돌프가 이들 이었다.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에 친구로 지내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부모에 대한 감정이 유별나서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무슨 사연인가?

 

1925년의 엘리자베스 안젤라 마르게라이트(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 퀸 마더)

 

에드워드 황태자는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죽지도 않고 너무 오래오래 왕 노릇을 하는 바람에 언제 왕이 될지 모르는 한심한 입장이었다. 루돌프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가 너무 오래오래 황제 노릇을 하는 바람에 명색만 다음 황제가 될 황태자였지 바라 볼 것이 없는 한심한 입장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63년을 여왕으로 근속했고 프란츠 요셉은 68년이나 황제로 근무했다.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두 황태자의 경우, 사정이 비슷했지만 결과는 영판 달랐다. 에드워드는 끈기 빼면 쓰러지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빅토리아가 언젠가는 죽겠지 하면서 기다렸다. 결국 끈기 싸움에 이겨서 40이 훨씬 넘은 노황태자였지만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루돌프는 참을성이 부족했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살했다. 자살 이유로는 어떤 아기씨(Maria)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은 아버지가 너무 오래 집권하는 바람에 지친 나머지 자살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위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얘기를 하자면 한이 없어서 여기서 그치지로 한다. 다만 신통한 것은 현재의 철수가 옛날 에드워드 황태자와 거의 같은 신세이긴 한데 다른 점이 있다면 에드워드는 40대 중반에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왕위에 올랐지만 철수는 오늘날 50대 중반을 넘어서서 거의 60을 바라보는 입장이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최근에는 다이아나 황태자비와 이혼하고 웬 말같이 생긴 여자와 재혼하였다. 아무튼 세상에 60먹은 노인네 황태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아무튼 엘리자베스 여왕은 빅토리아 여왕의 고손녀딸이 되며 에드워드7세 왕의 증손녀가 된다. 그리고 프란츠 요셉 황제의 부인으로 일명 씨씨라는 애칭의 왕비 이름 역시 엘리자베스이다. 각설하고, 세상에서 가장 미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한다. 하지만 씨씨인 엘리자베스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다. 현재의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어떠한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미인으로 친사를 받을 정도였다. 위엄과 기품에 있어서 세상 어느 미인도 따를 수 없다고 한다. 이젠 완전히 할머니이지만. 그리고 이마 세상을 떠났지만 퀸 마더인 엘리자베스 왕비도 젊은 시절 아주 관찮은 미인이었다. 그러고보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미인의 대명사와 같다.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봐르츠코프도 대단한 미인이었다.

 

1934년 윈저성에서 아버지 조지6세, 어머니 엘리자베스 왕비, 동생 마거릿과 함께. 윈저성 안에 있는 이 집은 웨일즈 백성들이 기증한 것이다. 왕족들은 대체로 개들을 좋아한다.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동물보호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결혼 (Wedding)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립이라고 하는 젊은 해군 장교를 만났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에 키가 크고 서글서글하며 유머 감각도  상당히 있는 멋진 청년이었다. 버킹검 궁전에 놀러온 그 청년을 만난 엘리자베스는 사춘기 소녀로서 호감을 갖게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어머니도 그 청년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사귀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구나 왕족으로서 먼 친척이 아니던가? 엘리자베스가 13살 때였고 필립은 18세였다. 두 사람은 이미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하기야 줄리엣은 14세에 로미오와 죽자사자 했으니 13세라고 해서 사랑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렸다. 필립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 해군 장교로 참전했었고 발틱해의 유트랜드라는 곳에서 독일과 해전을 치르다가  전사한 양반이다. 필립의 혈통은 덴마크지만 어릴 적부터 그리스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리스의 필립 공자라고 불렸다. 그리스에 주민등록을 했지만 교육은 스코틀랜드에서 받았다. 유럽의 왕족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경우가 많다. 필립의 경우에도 영국의 왕족인 마운트배튼 경(Lord Mountbatten)이 삼촌이었다. 그래서 영국 왕실 사람들과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윈스턴 쳐칠 수상 내외의 영접을 받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 (1953)

 

성숙한 소녀 엘리자베스를 만난후 필립은 전쟁중 함선에 근무하면서도 자주 러브레터를 보냈다. 휴가를 얻어 왕궁을 방문하여 엘리자베스를 만나기도 했다. 아버지인 조지5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필립을 좋아했다. 사람이 아주 진중하고 관찮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리스인지 덴마크인지 하여튼 왕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하기야 따지고 보면 빅토리아 여왕과도 인척 관계가 된다고 했다. 아버지 조지5세로서는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자기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어서 속히 손주를 보고 싶어 했다. 예나 이제나 왕실 사람들의 관념은 어서 속히 후사를 정하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와 필립이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을 무렵 부모들은 두 사람이 어서 결혼해서 떡두꺼비와 같은 손주 하나 덤썩 안겨 달라고 고사를 지낼 지경이었다. 그리나 이들의 결혼은 기정사실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백성들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왕실이라고 해서 결혼이니 뭐니 하며 멸치 국물에 지단을 얹어 잔치국수를 말아 먹는 수선을 떨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두 사람은 함께 지내고 싶었다. 1946년, 결혼 발표가 있었고 이듬해 초에 두 사람은 버킹검 궁전에서 약혼식을 가졌다. 전쟁 당시 대영제국의 수상을 맡았던 윈스턴 처칠은 이 약혼으로 회색빛 우울한 세상이 밝은 장미 빛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젊고 매력적인 두 사람의 결혼 발표는 온 영국을 들끓게 한 빅뉴스였다.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고 생활필수품은 바닥이 났으며 나일론 스타킹을 신으려면 한달 봉급을 털어 넣어야 하는 시대였다. 모든 것이 통제되고 배급받던 시절이었다. 그러한 때에 왕실의 결혼은 온 국민에게 기쁨과 희망, 그리고 옛 영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켜 주는 것이었다. 영국의 젊은 아가씨들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결혼 선물을 보냈다. 젊은 아가씨들이 제일 귀중하게 여기는 품목은 나이론 스타킹이었다. 전영국의 아가씨들은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너도 나도 나이론 스타킹을 사서 도합 수천 켤레를 버킹검 궁전에 보냈다. 자기들은 면양말을 신으면서...아마 공주는 양말도 없이 맨발로 지내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1947년 11월 2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매일 날씨가 흐리고 비도 오더니 이날은 오랫만에 화창한 날씨. 온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환호로 들떠 있었다. 결혼식은 TV로 생중계 되었다. 수많은 영국 국민들은 이 세기적 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해 너도나도 TV를 샀다. TV가 처음 선보이던 시절이어서 값이 대단히 비쌌지만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TV를 샀다. 화려한 백장미 웨딩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가 왕실의 전통적인 황금 마차를 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하자 연도의 시민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목이 터져 라고 만세를 불렀다. 실제로 많은 시민들은 목청을 너무 과도하고 사용하여 이비인후과에 가야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영국 국가의 가사를 ‘신이시어, 우리 공주를 보살펴 주소서...’라고 바꾸어서 합창했다. 시골에서는 동네마다 잔치가 벌어졌다. 양 한 마리를 통 채로 구워 먹는 바베큐가 인기였다. 양이 없으면 돼지라도 잡아서 통 바베큐를 만들어 먹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술집은 초만원이었다. '오늘 안 먹으면 언제 또 먹어보나?'라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신랑 필립공은 매우 의젓했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인물도 아주 관찮았다. 해군 장교의 정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천정배필이라고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다. 이날 영국에는 또 다른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영연방 팀(뉴질랜드의 힐라리경)이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였다는 뉴스였다. 사람들은 영국 만세, 엘리자베스 만세, 힐라리경 만세를 외쳤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대관식. 당시 대한민국은 북괴 김일성 도당의 침략으로 전쟁중.

 

대관식 (Coronation)

 

 1953년 6월 2일, 대관식 이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 엘리자베스2세는 2012년으로 즉위 60주년을 맞이하였다. 영국은 6월 1일부터 4일간 공휴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5년후인 1953년 6월 2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인 조지 6세가 1952년 2월 6일에 세상을 떠나자 그날로부터 영국의 새로운 군주로서 인정을 받았지만 대관식은 장례식을 모두 마친 후에나 가질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캐나나, 호주, 뉴질랜드, 사우스 아프리카(남아공), 실론(스리랑카), 파키스탄의 여왕 겸 영연방의 수장으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전 세계가 이 대관식을 지켜보았다. 당시만 해도 영연방 인구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카나다, 자마이카, 홍콩, 케냐....영연방국가는 모두 공휴일이었다. 오래전에 왕정에서 벗어난 프랑스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대관식을 보러 런던에 왔다. 대관식 행렬을 보기 위해 며칠 전부터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고 감기약 먹으면서 자리를 지켜왔던 사람도 수 천 명이었다. 미국의 관심도 무척 컸다. 이날 대관식 중계를 지켜보기 위해 거의 모든 상가가 철시했다. 그 때문에 장사가 안돼 손해 본 사람도 여럿 있었다. 그나저나 아마도 생각컨대 역사상 한 사람의 취임식을 이처럼 많은 인구가 지켜본 경우는 세상에서 처음일 것이다. 대관식에는 어린 철수(Charles) 왕자와 웬(Ann) 공주도 참석하였다. 필립공은 아내 엘리자베스의 뒤에 서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아내의 앞에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서했다. 아내 엘리자베스는 의자에 천연덕스럽게 앉아 남편 필립의 충성 서약을 받으면서 ‘당신말야, 앞으로 나한테 잘해야 해!!!’라고 속으로 소리쳤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여왕 대관으로 철수는 ‘웨일스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남편 필립공은 ‘에딘버러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여왕이기도 하지만 영국 성공회의 수장(首長)이기도 하다. 헨리8세 이래로 내려오는 전통이다.

 

 대관식을 마치고 버킹검궁전 발코니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답례하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공(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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