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스웨덴의 빅토리아

참고자료 2 실비아 왕비

정준극 2010. 1. 16. 06:37

참고자료 2

실비아 왕비(Queen Silvia of Sweden)

빅토리아공주의 어머니

 

실비아왕비 

 

실비아 왕비는 1943년 12월 23일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결혼전 이름은 실비아 레나테 좀멀라트(Silvia Renate Sommerlath)였다. 아버지 발터 좀멀라트(Walther Sommerlath)는 독일인이었고 어머니 알리스(Alice)는 브라질인이었다. 실비아에게는 위로 오빠가 세명 있었다. 그중 막내 오빠는 20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실비아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1947년부터 1957년까지 10년 동안 브라질의 상파울로에서 살았다. 실비아는 브라질에서 상파울로의 독일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우데홀름(Uddeholm)이라는 스웨덴회사의 브라질 지점에 근무하였다. 발터의 가족들은 1957년에 서독으로 돌아와서 철강회사에 종사했다. 실비아 왕비는 국적이 세 개다. 브라질, 독일, 스웨덴이다. 실비아는 결혼 전에 뮌헨에 있는 아르헨티나 영사관에서 일했다. 그리고 1972년에는 뮌헨올림픽의 교육프로그램 담당자로 활동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는 의전부책임자로 일했다. 실비아는 한때 항공기 승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실비아는 수준 높은 통역인이었다. 그는 6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스웨덴어, 독일어, 포르투갈어(브라질에서 살았기 때문에), 프랑스어, 스페인어(아르헨티나 영사관에 근무했었다), 영어이다. 실비아는 청각장애자를 위한 수화(手話)에도 능숙하다.

 

1976년 결혼식에서의 실비아왕비

                 

실비아는 1972년 뮌헨올림픽 때에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였던 칼 구스타브를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73년 9월 15일, 칼 구스타브는 구스타브16세로서 스웨덴 국왕이 되었다. 구스타브16세와 실비아는 1976년 3월 12일 약혼을 발표하고 3개월 후인 6월 19일에 스톡홀름 대성당(Storkyrkan Cathedral)에서 예식을 올렸다. 구스타브16세의 결혼은 스웨덴 역사에서 현직의 국왕이 결혼한 첫 번째 경우이다. 만일 구스타브16세가 할아버지인 구스타브6세의 재임 기간 중에 결혼을 했다면 아마 황태자로서의 지위를 잃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할아버지인 구스타브6세는 황태자인 칼 구스타브가 반드시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칼 구스타브의 삼촌인 베르틸(Bertil) 공자도 그런 제약 때문에 구스타브6세가 작고할 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베르틸 공자는 웨일스의 평민인 릴리안을 사랑하여 결혼코자 했으나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구스타브6세의 완강한 주장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결혼을 늦추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구스타브6세가 세상을 떠나자 거의 20년에 걸친 사랑을 마무리하고 역시 1976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마찬가지로 구스타브16세도 사랑하는 실비아와 결혼하기 위해 서로 교제를 시작한 후 4년을 기다렸다. 실비아는 구스타브16세보다 4년 연상이다. 이들의 결혼식이 거행되는 6월 19일 전날 밤에 스웨덴의 유명한 보컬그룹인 아바(ABBA)가 TV를 통해 Dancing Queen(춤추는 왕비)을 발표했다. 아바가 실비아를 위해 ‘댄싱 퀸’을 작곡한 것은 아니지만 스웨덴 국민들은 ‘댄싱 퀸’을 구스타브16세와 실비아의 결혼을 축하하는 곡으로 알고 열광했었다.

 

실비아왕비 결혼후

  

실비아 왕비는 한때 언론에서 그의 친정아버지가 나치의 협조자라는 뉴스가 나와서 곤혹을 치룬 일이 있다. 2002년에 스웨덴의 기업신문인 아르베타렌(Arbetaren)은 실비아 왕비의 친정아버지인 발터 좀멀라트가 1934년에 나치당의 대외연락부서인 NSDAP/AO의 멤버로 활약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브라질에 살 때와 그후에 서독으로 돌아와서 철강회사를 경영할 때에도 나치였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전했다. 신문은 발터가 심지어 자기의 딸인 실비아가 스웨덴 황태자인 칼 구스타브와 교제하고 있을 때에도 나치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발터 좀멀라트는 1990년에 세상을 떠났다. 스카츠맨(Scotsman)이라는 잡지는 2002년 7월호에서 발터 좀멀라트가 2차대전 중에 독일에서 장갑차 부품과 가스마스크의 부품을 생산하여 군납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내용들이 스웨덴 신문에 보도되자 스웨덴 왕실의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왕비의 친정아버지인 발터 좀멀라트는 스웨덴 왕실의 일원이 아니므로 코멘트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또 최근의 어느 때는 독일의 Frau mit Herz(프라우 미트 헤르츠)라는 잡지가 빅토리아 공주와 마델레이느 공주가 비밀리에 사생아를 낳아 모처에서 남이 모르게 기르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한 일이 있다. 실비아 왕비는 스웨덴 TV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남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다니 기가 막히다. 우리 아이들은 그런 아이들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국민과 매스컴에 비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하여 가십을 종식시켰다.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구스타브16세 국왕, 실비아 왕비(왼쪽), 가운데는 마델레이느공주

             

[자선활동]

실비아 왕비는 수많은 자선기구와 관계하고 있다. 특히 지체부자유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적극적이다. 실비아 왕비는 인권과 어린이에 대한 성폭행 방지운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실비아 왕비는 1999년에 창설된 세계어린이재단의 공동 설립인이다. 왕비는 ‘로열 웨딩 재단’(Royal Wedding Foundation) 및 ‘실비아 왕비 주빌리 기금’(Queen Silvia Jubilee Fund)을 통해 지체부자유 어린이들을 돕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왕비는 청소년 마약금지 국제재단의 명예이사이다. Queen Silvia Fund(실비아왕비기금)는 스카웃 멤버 중에서 장애대원들을 돕는 기금이다. 실비아 왕비는 노인문제에 대하여도 적극적이다. 노인들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보살피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스톡홀름에는 치매노인들을 간병하는 간호사들을 훈련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실비아 왕비가 주도한 것이다. 실비아 왕비는 치매예방에 대한 연구도 지원하고 있다. 왕비라고 해서 우아하게 파티나 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정신없이 바뻐서 제때에 식사를 하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다른나라의 영부인 및 왕비들은 모두 사회와 소외된 계층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데 우리나라의 일부 영부인이란 여인들은 부정으로 축재하고 못된 짓을 하기에만 바빴다. 창피한 일이다. 무릇 대우를 받으려면 대우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한다.  

 

구스타브 16세 국왕과 실비아 왕비 결혼식. 1976년

 

빅토리아 공주가 태어났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