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9
베르디가 설립한 음악가 안식의 집(Casa di riposo per musicisti Giuseppe Verdi)
1899년 설립한 카사 베르디(Casa Verdi) - A Home for Elder Musicians
밀라노에 있는 카사 디 리포소 페르 무지치스티
보통 카사 베르디(베르디의 집)이라고 불리는 카사 디 리포소 페르 무지치스티(음악가들을 위한 안식의 집)은 베르디의 정성으로 1899년 12월 16일에 오픈한 일종의 실버 아파트이다. 밀라노 시내의 피아짜 부오나로티(Piazza Buonaroti) 29번지에 있는 4층짜리 건물이다. 주로 은퇴한 오페라 성악가들로서 거처가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노년을 안식하는 곳으로 약 100명이 입주해 있다. 베르디는 이 집을1896년에 설립하였다. 베르디는 그 해에 밀라노의 비아 만초니 29번지에 있는 어떤 집에서 '음악인 안식관을 위한 주세페 베르디 재단'(Casa di Riposo per Musicisti Fondazione Giuseppe Verdi)을 설립하였다. 베르디는 이 안식관의 건축과 운영을 위해 재산의 거의 전부를 기증하였고 아울러 앞으로 들어오는 저작료도 모두 이 안식관이 사용토록 유언했다. 그러나 음악인 안식관은 수많은 후원자들의 후원금과 자체 수입으로 충분히 운영해 오고 있다. 자체 수입 중에는 이 안식관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의 임대료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카사 베르디의 내정(안뜰). 앞에 보이는 건물에 베르디와 주세피나의 묘소가 있다.
2007년 6월 22일, 주세페 베르디 재단은 '음악인의 집 재단'(Fondazione Casa dei Musicisti)를 별도로 설립하였다. 비영리단체인 이 재단은 이탈리아의 다은 지역에도 음악인 안식관을 설립하여 운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 건설되는 음악인 안식관의 모든 운영 규칙은 밀라노의 카사 베르디의 것을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2008년 1월 1일부터 '주세페 베르디 재단'의 모든 사회활동 및 자선활동은 '음악인 집 재단'으로 이관되었다. '음악인의 집 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재단은 La Voce(라 보체: The Voice)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고 있다. 1984년에는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음악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Il Bacio di Tosca(토스카의 키스)라는 영화가 촬영되었다. 스위스의 영화감독인 다니엘 슈미트가 만든 영화이다.
카사 베르디 건물 앞 광장의 한쪽에 세워진 베르디 기념상.
베르디는 말년에 그의 친구인 줄리오 몬테베르데(Giulio Monteverde)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일이 있다. "나의 모든 작품 중에서 내가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밀라노에 마련한 은퇴 음악인들을 위한 집이다. 재능이 있는 성악가이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노년에 이른 사람들, 또는 젊었을 때 많은 활약을 했지만 노년을 위한 재산을 충분히 저축하지 못한 음악가들을 위한 집이다. 이들은 가난하지만 내 인생에서 사랑하는 동료들이다."라고 썼다. '네오 고틱 스타일의 이 건물의 설계는 대본가인 아리고 보이토의 동생으로 건축가인 카밀로 보이토(Camillo Boito)가 맡았다. 베르디와 그의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묘소는 카사 베르디의 영묘에 조성되어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저택은 베르디가 아이다 작곡으로부터 받은 작곡료의 상당부분을 기부하여 마련했다고 한다. 1902년 10월 10일, 베르디의 탄생일을 기념해서 9명이 첫 입주한 이래 지금까지 1천명 이상이 이 집에서 살았었다.
밀라노의 피아짜 부오나로티에 있는 카사 베르디. 이곳에 베르디와 주세피나의 영묘가 있다.
베르디는 이미 1888년에 그의 저택인 빌라 베르디가 있는 '론콜레 베르디'의 인근인 빌라노바 술라르다(Villanova sull'Arda)에 원로 음악가들을 위한 병원을 지은 일이 있다. 베르디의 인간애에 넘친 사업은 계속되었다. 베르디는 이듬해인 1889년에 원로 오페라 성악가 또는 반드시 성악가가 아니더라도 원로 음악가들로서 생활이 어려워서 노년을 보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로 결심했다. 그해에 베르디는 다행히 밀라노의 포르타 가리발디(Porta Garibaldi) 지역에 상당히 넓은 대지를 구할수가 있었다. 베르디는 이곳에 원로 음악인들을 위한 Casa di Riposa(양로원)를 짓기로 했다. 베르디는 1891년에 밀라노 음악지(Gazetta musicale di Milano)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은 계획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실제로 건설이 시작된 것은 1896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베르디의 그의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는 건축가인 카밀로 보이토(Camillo Boito: 1836-1914)를 자주 만나서 카사 디 리포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했다. 카밀로 보이토는 베르디의 친구로서 대본가인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의 동생이었다. 아리고 보이토는 베르디를 위해 '오텔로'와 '활슈타프'의 대본을 쓴 작곡가 겸 대본가이다. 1895년에 베드리는 유언장을 만들면서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자기 재산의 상당부분을 카사 디 리포사의 건축과 운영에 사용할 것을 명시하였다. 이와 함께 베르디는 앞으로 들어온 자기 오페라의 로열티도 카사 디 리포사를 위해 사용하도록 했다. 카사 디 리포사는 1899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베르디는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입주자가 들어오게 되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첫 입주자는 베르디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02년, 베르디의 생일인 10월 10일에 입주한 것이다.
카사 베르디(카사 디 리포사 페르 무지치스티)
카사 디 리포사 페르 무지치스티(원래의 뜻은 음악가 안식의 집)에서 여생을 보낸 오페라 성악가들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다음 세 사람을 소개코자 한다. 첫째는 테너 카를로 브로카르디(Carlo Broccardi: 1886-1953)이다. 그는 1915년 리골레토의 첫 풀 레코딩에서 만토바 공작을 맡아았고 1919년에는 토스카의 첫 풀 레코딩에서 카바라도시를 불렀다. 그는 1951년부터 카사 베르디에 입주하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냈다. 두번째는 소프라노 사라 스쿠데리(Sara Scuderi: 1906-1987)이다. 그는 라 스칼라를 중심으로 많은 활동을 하여 갈채를 받았다. 라 스칼라에서는 베냐미노 질리, 갈리아노 마시니와 같은 당대의 테너와 파트너를 이루어 공연했다. 그는 특히 토스카의 해석으로 뛰어났었다. 스위스의 영화감독인 다니엘 슈미트가 만든 '토스카의 키스'(Il Bacio di Tosca)는 실상 사라 스쿠데리의 생애를 그린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대단한 인기를 받으며 오페라 무대를 장식했었다. 그렇지만 노년에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걱정을 하던 중에 베르디의 카사 디 리포사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하나의 카사 베르디 입주자는 테너 주세페 코스타(Giuseppe Costa)였다. 라 스칼라에서 활동한 테너였다. 하지만 노년에 생활이 어려워 카사 베르디의 입주자가 되었다. 카사 베르디에 입주해 있는 원로 음악인들은 간혹 연주회를 갖는다. 독창회도 가지며 합창발표회도 갖는다.
카사 디 리포소 페르 무지치스티(카사 베르디)에서의 원로 성악가의 독창회
카사 디 리포소 페르 무지치스티의 원로 성악가들로 구성된 남성합창단은 다른 장소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한다.
[교통편]
카사 디 리포사는 밀라노의 7구역에 있다. 대박람회장인 피에라 디 밀라노(Fiera di Milano)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카사 디 리포사는 밀라노 시내에서 대중교통 편으로 쉽게 갈수 있다. 지하철(메트로폴리탄)은 빨간 색의 1호선으로 부오나로티(Buonarroti) 또는 와그너(Wagner) 역에서 내리면 된다. 전차는 24번인 피아짜 악숨(Piazza Axum)-살바네스코(Salvanesco) 선을 타고 비아 라비짜(Via Ravizza)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버스는 18번인 피아짜 코르두시오(Piazza Cordusio)-바지오(Baggio)선을 타고 코르소 베르첼리(Corso Vercello) 또는 비아 마르게라(Mia Marghera) 정류장에서 내리면 된다.
[방문]
카사 베르디는 언제라도 방문할수 있다. 친지가 입주자이면 더구나 그렇다. 하지만 관광 목적의 방문은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카사 베르디에서는 두 곳이 필견의 장소로 되어 있다. 하나는 구내 교회의 지하에 있는 납골소(Crypt: 영묘)이다. 베르디의 묘지가 있으며 그의 두번째 부인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의 묘지가 있다. 천정의 모자이크 장식이 아름답다. 묘지는 오전 8시반부터 오후 6시까지 방문할수 있다. 베르디는 밀라노 호텔(Hotel de Milan)에서 1901년 1월 27일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3일 후인 1월 30일에 밀라노에 있는 기념묘지(Cimitero Monumentale)에 임시로 매장되었다. 그 기간 중에 카사 베르디의 교회 지하에 납골소(영묘)를 만들어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꼭 한 달 후인 2월 27일에 엄숙하게 이장하였다. 밀라노의 기념묘지로부터 카사 베르디로 유해가 운구될 때에는 연도에 밀라노 시민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운집하여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하며 지켜보았다. 밀라노시는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더 많은 시민들이 볼수 있도록 일부러 넓은 길을 택하여 돌아갔다.
카사 베르디 앞에 운집한 추도시민들. 1901년 2월 27일.
또 한 곳은 박물관(Museum: 기념관)이다. 여러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의 한 방은 명예의 방(Great Room of Honor)라고 불리는 곳으로 별도로 관리되고 있다. 전시실에는 베르디가 지휘할 때 입었던 의상, 베르디가 파리에서 살 때의 식당 가구, 베르디가 작곡할 때에 사용한 스피넷(피아노와 비슷한 악기)등이 있고 명예의 방에는 베르디의 데드 마스크와 베르디의 손을 석고로 뜬 것들이 보관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카사 베르디 박물관'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전시실과 명예의 방은 사전 예약으로만 방문할수 있으며 반드시 그룹이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방문하기가 어렵다. 입장료는 없다. 다만, 노후의 음악가들을 위한 약간의 기부금을 내면 고맙게 여긴다. 위대한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를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수 있는 곳이므로 만천하 음악인들, 특히 베르디를 존경하는 성악가들에게는 필견의 장소이다.
카사 베르디의 기념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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