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곤의 캐서린이 도화선
영국성공회를 시작한 헨리8세
어떻게 해서 영국이 가톨릭을 배척하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대로이다. 16세기 초반, 헨리8세의 초창기 시대까지만 해도 영국의 왕실은 유럽의 다른 모든 왕실과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이었다. 먼 역사를 보면 영국도 로마의 변방 영토이지 않았던가? 로마 가톨릭과의 분열은 1529년, 헨리8세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스페인 ‘아라곤의 캐서린’에 대한 이혼 요구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헨리 자신도 영국 종교를 새롭게 구조 변경해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 품고 있기는 했다. 헨리는 국가를 통치하는데 있어서 국왕이 있으면 되었지 왜 로마 가톨릭 교황의 간섭을 받아야 하느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교황이 국왕보다 더 높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교황은 왕을 파문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 당한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아비뇽의 일화를 생각해 보면 잘 알수 있는 일이다. 프랑스의 왕이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맨발로 교황의 집 현관 앞에 꿇어 엎드려 잘못했으니 제발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한 사건이다.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런데 다행이라고나 할까? 헨리 치하의 영국에는 교황의 권세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있다는 이점도 작용했다. 헨리로서는 교황의 직접 간섭이 없는 가톨릭 교회제도라면 상당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1517년에 마틴 루터(Ma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개신교(Protestant)라는 새로운 조류에 휩싸이고 있던 때였다. 영국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도 로마 가톨릭의 횡포에 반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개신교에 은근히 동조하고 있었다. 헨리8세의 가톨릭 배척은 결혼을 위한 방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개신교 신앙의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헨리가 가톨릭을 배척한 것이 영국 근대 역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던가? 헨리가 탈가톨릭의 선구자처럼 생각될수 있지만 꼭 그런것 만은 아니었다. 그 보다 오래전에도 영국의 왕이 가톨릭을 거부한 전례가 있었다. 영국 국민들의 정서 또한 무심히 보아 넘길 사항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국인들은 외국인들이 영국의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했다. 영국 출신이 교황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외국인이었다. 독일 출신 교황, 이탈리아 출신 교황. 지난번에는 폴란드 출신... 영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거부반응은 교황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헨리8세의 첫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1485-1536). 아버지는 아라곤의 페르디난트2세, 어머니는 카스틸레의 이사벨라 여왕. 캐서린의 딸이 유명한 메리여왕. 1509년부터 1553년까지 영국의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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