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0구 화보리텐

[참고자료 2] 테레지아눔(Theresianum)

정준극 2010. 3. 1. 06:53

[참고자료 2]

테레지아눔(Theresianum) - Theresian Academy

Öffentliche Stiftung der Theresianischen Akademie in Wien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세운 명문 사립학교 - 외교아카데미와 건물 공유 

 

화보리텐슈트라쎄에 있는 테레지아눔. U4 타우브슈툼멘가쎄에서 내리면 지척이다.

 

비엔나 4구 뷔덴에 있는 U1 지하철역인 타우브 슈툼멘가쎄(Taub-Stummengasse)에서 내리면 화보리텐슈트라쎄의 대로에 면하여 테레지아눔이라는 아름다운 건물이 있다. 타우브 슈툼멘가쎄와 테레지아눔가쎄의 사이에 있는 건물이다. 칼스플라츠에서 비엔나공과대학을 지나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도 만난다. 테레지아눔은 특별사립학교이다. 일찍이 1754년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설립했기 때문에 테레지아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특별사립학교라고 말한 것은 이 학교가 비엔나에 있는 중고등학교로서는 여러 가지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우수학교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학비부담도 적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교과운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더구나 테레지아눔은 아름다운 바로크 궁전을 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니 자랑스럽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같은 건물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교아카데미가 들어서 있어서 테레지아눔 학교와 시설들을 함께 쓰고 있다. 외교아카데미는 대학원과정의 국제문제 전문교육기관이다. 테레지아눔은 일반 김나지움(고등학교)과는 달리 아름답고 넓은 운동장이 있어서 각종 행사를 치룰수 있다.

  

테레지아눔의 도서실 

 

테레지아눔 건물의 연혁은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14년에 페르디난트3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부인인 안나가 이곳의 넓은 초원과 커다란 농가를 사서 그 자리에 아름다운 작은 궁전을 지었다. 화보리타(Favorita)라는 이름의 궁전이었다. 10구 화보리타의 이름은 이 궁전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보리타 궁전은 유흥과 연회를 위해 지은 것이었다. 콘서트, 오페라가 공연되었으며 편안한 환경에서 리셉션(파티)이 열렸다. 당시 비엔나 성벽 바로 밖에 있는 궁전이어서 마치 시골에 온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화보리타 궁전은 1683년 터키가 두 번째로 비엔나를 포위하고 공격할 때에 포격을 받아 크게 파손되었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1690년, 레오폴드 황제 때에 새로 저택을 지었다. 먼저 있었던 화보리타 궁전보다 더 규모가 크고 다 화려한 궁전이었다. 후기 바로크 스타일의 가르텐팔레(Gartenpalais: 정원궁전)이었다. 당시 비엔나에서는 후기 바로크 스타일이 붐을 이루고 있었다. 새로 지은 화보리타는 지나치게 격식을 따지는 궁정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즐기려는 왕족이나 귀족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테레지아눔 뱃지

 

세월은 흘러 아버지인 샤를르6세로부터 화보리타 궁전을 물려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화보리타를 예수회(Jesuits) 교단에게 3만 굴덴에 팔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예수회가 로마가톨릭을 등에 업고 지나치게 세력을 넓히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예수회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예를 들어 마리아 테레지아는 예수회가 비엔나대학교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한 입장인데 평소의 마리아 테레지아답지 않게 화보리타를 예수회에 팔았다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예수회는 화보리타 궁전을 Collegium nobile(콜레기움 노빌레)라는 이름의 일종의 귀족들을 위한 신학교로 만들었다. 콜레기움 노빌레는 장차 정부의 주요 공직자가 될 귀족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교였다.

 

테레지아눔의 학생들은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무척 열심히 공부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콜레기움 노빌레의 취지를 가상히 여겨 콜레기움 노빌레를 제국아카데미로 인정하고 보조금까지 지급하였다. 얼마후 콜레기움 노빌레는 콜레기움 테레지아눔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이렇게 되자 제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더 확대되었으며 학생들도 따라서 여러 특권을 받았다. 예를 들어 콜레기움 테레지아눔을 졸업하면 정부의 고위 공직자로 임용되기가 쉬웠다. 이와 함께 1754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동양(오리엔탈)에 대한 관심의 확대에 따라 외교관들이 동양문화와 언어를 공부할수 있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당시에는 오리엔탈 아카데미(Orientalische Akademie)라고 불러으나 오늘날에는 외교아카데미(Diplomatic Academy)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이다. 오늘날 테레지아눔 건물에 공동으로 입주하여 있는 외교아카데미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긴 국제관계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외교아카데미는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Konsularakademie(영사아카데미)라는 이름을 가진 일이 있다.

 

테레지아눔은 비교적 시내에 있으면서도 넓은 운동장을 가지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 아들인 요셉2세는 비록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으나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65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나자 명실 공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 권세를 잡게 되었다. 요셉2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예수회를 더 싫어하였다. 1773년, 요셉2세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콜레기움 테레지아눔에 대한 특별대우를 모두 무효로 만들었다. 콜레기움 테레지아눔은 문을 닿았다. 화보리타 궁전은 새로운 공업학교의 건물이 되었다.

 

체력단련도 열심히

 

요셉2세의 뒤를 이어 레오폴드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즉위했으나 불행하게도 2년 동안만을 재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프란츠2세(재위: 1792-1806)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업적을 더욱 기리기 위해 콜레기움 테레지아눔을 재개관하였다. 프란츠2세(프란시스2세)는 나폴레옹이 유럽의 제패하자 신성로마제국의 장래가 심히 불안하여 미리 신성로마제국의 종말을 선언하고 대신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프란츠1세(프란스시1세: 재위: 1804-1835)로서 오스트리아제국의 첫 황제가 된 인물이다. 이것은 나중의 일이고 아무튼 역시 예수회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프란츠2세는 예수회가 관장하던 콜레기움 테레지아눔을 피아리스트(Piarist) 교단이 관리하도록 넘겨주었다. 피아리스트 교단은 화보리타 궁전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건물의 정면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바꾸었다.

 

학생들은 취미생활에도 적극적이다.

  

세월은 또 흘러서 젊은 프란츠 요셉이 1848년에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848년은 유럽의 전역에서 혁명이 시작되었던 해이다. 테레지아눔은 더 이상 귀족 자제들의 특권적인 학교가 될수 없었다. 의무적인 기숙학교였던 테레지아눔은 자유스런 통학학교가 되었다. 테레지아눔은 그로부터 거의 1백년을 비엔나의 명성 높은 고등교육기관으러서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나치는 테레지아눔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테레지아눔을 일종의 정치교육학교로 사용하였다. 2차 대전중 테레지아눔은 히틀러의 제3제국을 이끌어갈 젊은 정치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나치는 함께 있던 외교아카데미도 퍠쇄하였다. 외교아카데미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64년 당시 수상이던 브루너 크라이스키의 적극적인 주도에 의해서였다. 외교아카데미는 1996년까지 외무성 산하기관이었으나 현재는 교육부 소관의 기관이 되었다. 외교아카데미는 전체 학생수가 140여명에 이르는 소수정예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학생들의 자유스런 체육시간

 

2차 대전후 점령국으로서 제4구인 뷔덴을 통치하게 된 소련은 화보리타 궁전을 접수하고 군사용으로 사용하였다. 1955년 오스트리아의 독립이 이루어진 후 화보리타는 새 단장을 하여 1957년 테레지아눔으로 다시 태어났다. 오늘날 테레지아눔에는 각국 외교사절들의 자제들이 상당수가 다니는 학교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같은 건물에 외교아카데미가 있기 때문에 외교사절들의 자제들이 테레지아눔에 다니고 있음은 편리한 일이 아닐수 없다.

 

테레지아눔을 설립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