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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3] 1848년 3월 혁명

정준극 2010. 3. 6. 08:18

[참고자료 3]

1848년 3월 혁명

1848년 혁명 - 유럽의 봄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퉁치아래에 있었던 갈리시아(폴란드)에서는 제국의 병사들이 혁명에 가담했던 농민들을 즉석재판으로 처형하였고 그들의 재산을 모두 압수하였다.

 

혁명이라고 하면 가깝게는 1961년의 5. 16 군사혁명, 멀게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나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생각하기가 일수인데 1848년 혁명은 또 무슨 혁명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유럽의 근대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있다면 모름지기 1848년의 유럽혁명에 대하여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년도 훨씬 전인 1848년에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 났었는가? 또 무슨 혁명이라는 것인가? 이러한 궁금증을 잠시 풀어보자. 다시 강조하지만 유럽의 근대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1848년에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이었는가? 강화도령 철종이 임금이 되기 1년전이다.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해가 막심하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1848년 유럽대륙의 여러 나라에서는 때아닌 혁명의 불길에 요연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연쇄 방화에 휩싸인것 같은 불길이었다.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이 마치 혁명전염병에 걸린 것처럼 너도 나도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여러 나라가 일시에 정치적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던 일은 유럽의 근대역사상 처음 있는 대사건이었다. 유럽대륙에서는 16세기 초반에 종교개혁이 있었고 18세기 초반에 산업혁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종교적 및 산업적 개혁이었을 뿐이며 국가의 체제를 바꾸는 혁명은 아니었다. 1848년의 혁명은 전제주의적인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제를 갈망하는 정치적 봉기였다. 사학자들은 이같은 현상을 ‘국가들의 봄’(Spring of Nations)이라고 불렀다. 민주화를 위한 백성들의 투쟁이었기 때문이었다. 혁명의 불길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제2공화국을 출범시킨 1848년의 프랑스혁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혁명의 불길은 유럽의 거의 전역으로 번졌다. 대부분 나라에서는 백성들의 혁명이 당국의 경찰력에 의해 얼마가지 않아서 진압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만명의 백성들이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결과적으로 1848년의 혁명은 상상외로 커다란 희생을 치루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왕정이 계속되었다. 다만, 프랑스만이 민주화를 쟁취한 나라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장 전반적인 체제의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사회문화적인 변화는 서서히 나타났다. 새로운 20세기를 바라보는 새로운 유럽의 질서의 등장을 의미했다.

 

파리에서의 1848년 혁명

 

[혁명의 불길이 번진 나라들]

프랑스에서 시작한 1848년 혁명의 불길은 곧 이어 독일의 여러 국가, 오스트리아제국,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 덴마크, 왈라키아(현재 루마니아의 지방), 폴란드 등으로 번졌다. 유럽 전대륙이 민주화의 물결로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다만, 영국과 네덜란드왕국과 제정러시아, 그리고 오토만제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국가들에서는 혁명의 외침이 없이 잠잠했다. 스캔디나비아 국가들은 영향을 받기는 받았지만 그다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러시아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제정러시아는 통치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혁명 그룹들이 서로 연락하여 무슨 일을 꾸미기에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그래도 1848년의 혁명기운은 나중에 1917년의 혁명을 예비한 것으로 생각되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공국에서는 1848년의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전인 1830-31년에 봉기가 있었다. 이를 ‘11월 봉기’라고 부른다. 폴란드에서는 1846년에도 봉기가 있었다. 이를 ‘크라코우 봉기’라고 부른다. 폴란드에서의 마지막 봉기는 1863-65년에 있었다. 이를 ‘1월 봉기’라고 부른다. 봉기를 밥먹듯이 하는 폴란드였지만 정작 1848년에는 잠자코 있었다. 1830년에는 제정러시아의 강압적 장악에 항거하여 거의 1년 동안 봉기를 했지만 결국은 제정러시아의 군사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한편, 오토만 제국에서는 정치적 봉기가 직접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산하의 세습국가들에서 정치적으로 불안한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영국에서는 백성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대책이 미리 나왔다. 1832년의 개혁법(Reform Act)이었다. 그리고 1846년에는 농민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이른바 ‘옥수수 법’(Corn Laws)이 발효되었다. 영국이 통치하던 아일랜드에서는 대기근이 들어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였고 영국의 식민탄압에서 벗어나려는 아일랜드 젊은이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났지만 영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좌절되었다. 스위스는 이미 내전에 가까운 진통을 겪었기 때문에 정작 1848년에는 다음 기회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다만, 1848년에 채택한 스위스연방헌법은 스위스의 역사에 있어서 일종의 혁명적 조치로서 근대 스위스의 초석을 놓는 중대사건이었다.

 

세르비아의 독립선언

 

[혁명의 원인]

1848년의 유럽혁명은 실로 여러 원인이 복합되어 일어났다. 때문에 어떤 하나의 현상만을 가지고 혁명이 일어났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돌이켜보건대 19세기 초반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사실상 여러 개혁적인 변화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보주의자들과 급진적인 개혁파들의 주장에 의하여 많은 나라에서 정치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진보주의자들은 Yes, We can change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계몽주의의 영향도 컸다. 이에 따라 사회적으로 진보주의, 국민주의, 사회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상을 보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유 때문에 전쟁을 일삼는 바람에 국가마다 경제가 위축되었으며 여기에 흉년이 겹쳐서 농작물의 생산이 저하되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846년은 특히 그러했다. 백성들은 기근으로 죽어갔고 농민들의 생활은 지주들의 횡포로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게 되었다. 농촌을 떠나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온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마침 산업혁명의 물결은 도시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도시빈곤층도 급격히 불어났다.

 

베를린에서의 혁명

 

그러한 상황에서 상당수 귀족들마저 왕족들의 전제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846년 오스트리아의 갈리시아(Galicia)에서 폴란드 귀족들의 봉기가 있었다. 그러나 왕정을 타파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제국에서 귀족들의 봉기가 있자 농민들은 ‘아니, 잘 먹고 잘 사는 귀족들도 봉기를 하는데 못 먹고 못사는 우리가 혁명을 일으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는 당장 먹을 것도 없으니 봉기는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귀족계급을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이와 관련하여 얼마 후에는 대폴란드에서 프러시아에 반대하는 민중세력의 봉기가 있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봉기가 심상치 않자 중산층은 어느 편에 붙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와중에서 1848년 1월, 프러시아에서 칼 막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The Communist Manifesto(공산주의 선언문)를 발표했다. 글자그대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부족하여 실제적으로 어떠한 기구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개혁에 대한 범국민적인 의지만은 강력했다. 그러한 개혁의지는 중산층 보다는 오히려 하층계급과 노동자들에게서 더 강했다. 1848년의 혁명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노동자, 농민들의 해묵은 감정이 폭발한 것이었다. 그러자 중산층도 어쩔수 없이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섰다. 그들도 귀족계급이 밉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농민층은 중산충의 후원을 받으면서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도시빈곤층] 

1848년 혁명의 근저에는 도시빈곤층이 새로운 사회를 희망하여 항거한 것이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먹고 살기 위해 농촌에서 무작정 도시로 떠나는 농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도시에 살고 있는 귀족계급인 부르조아들은 이러한 농민들이 두려웠다. 부르조아들은 이미 1789년에 바스티유를 파괴하고 혁명을 일으켰던 시민계급들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귀족계급은 일반 노동자, 농민 계층과 거리를 두고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면 지냈다. 귀족들은 하층계급이 배우지 못하여 무식할 뿐만 아니라 떼를 지어 다니면서 말썽이나 일으키는 범죄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도시노동자들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하루에 13-15시간씩 죽어라고 노동을 하지만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며 힘든 생활을 했다. 이들은 불결한 슬럼에서 살았다. 공산주의를 주창한 칼 맑스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다. 지하에 비밀단체들이 생겨났다. 사회는 이미 1846년으로부터 실업으로 불안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혁명의 불길이 지펴진 1848년에는 경제위기가 밀어닥쳤던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라가기만 했다. 노동자들은 정부에게 생존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독일에서의 사정도 비슷했다. 프러시아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산업화가 빨리 진행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생활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악화되었다. 예를 들어서 방직기계의 개발로 옷감이 대량생산되자 그러지 않아도 영세한 옷감 생산자들과 그들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살길이 막막해졌다. 1840년대에 들어서서 독일의 알콜 소비가 크게 증가되었다. 살기가 힘들어진 도시 노동자들은 그저 돈푼만 생기면 술을 사서 마시며 세상을 원망하고 자기의 팔자를 푸념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선 농촌을 살리기 위해 전통적인 농노제도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도시노동자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로 옮겨가고 있었지만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지는 않았다.

 

아일랜드에서의 기근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주는 더블린 시가지의 기근기념 조형물(Famine monument)

 

[농촌 지역]

농촌에서는 몇 년 동안 계속된 흉년으로 농작물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농사가 안되므로 경작지도 줄어들었다. 반면에 귀족들의 사냥터는 넓어지기만 했다. 농민들은 1년동안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보았자 입에 풀칠도 하기가 어렵게 되자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이민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신세계라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실제로 19세기 후반에 유럽에서의 미국 이민 열풍은 대단했다. 한집 건너 두 집이 미국이나 남미로 이민을 떠났다. 한편, 농촌 인구가 도시교외로 밀집되다보니 위생이 큰 문제였다. 콜레라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에는 위생적인 식수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1845-46년에는 감자마름병(Potato blight)이 북부 유럽을 강타했다. 원래 벨기에에서 비롯된 감자마름병은 바다 건너 아일랜드에서 가장 심했다. 아일랜드에서 나오는 곡식들은 대부분 영국이 가져갔기 때문에 먹을 것이라고는 그나마 감자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마름병에 걸려 먹지 못하게 되자 심각한 식량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를 Great Irish Famine(아일랜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이 때에 수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나갔으며 운이 좋으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영국 섬의 북쪽인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에서도 마찬가지의 기근사태가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의 기근사태는 중부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귀족들이 잘 먹고 잘 살수 있었던 것은 농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농지가 있다는 것은 결국 농노를 거느리고 있다는 얘기이다. 귀족들은 농노들을 가차 없이 착취했다. 농민들의 분노와 슬픔은 1848년의 혁명으로 폭발되었다.

 

[초기의 불만표출]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군주제에 반대하는 봉기가 없었다. 만일 있다고 한다면 유럽 대륙에서 떨어진 영국에서와 저 멀리 미국에서일 뿐이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에 항거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1774년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유럽에서는 1814년 나폴레옹이 실각후 열강들이 비엔나 회의를 통하여 왕정 절대주의를 계속 유지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의 왕정에 대한 반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한번 혁명의 맛을 들인 프랑스는 계속 혁명의 기운을 불지피고 있었으며 1789년의 아일랜드는 영국의 압정에 항거하는 봉기를, 그리고 1810년과 1821년 멕시코에서는 오스트리아제국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저항운동을 펼쳤다. 또한 1830년에는 오스트리아 산하의 네덜란드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봉기가 있었으며 이같은 봉기는 인근 벨기에로도 전파되었다. 1830년에는 프랑스에서 또 다른 봉기기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1800년대 초반의 유럽은 혁명과 봉기라는 어두운 구름에 가려 있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봉기로 인하여 유럽 사회에는 민주주의, 자유주의(진보주의), 국민주의, 사회주의의 파도가 점차 높아졌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민주주의가 발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적으로 남성 참정권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 밖에는 뱔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는 여성참정권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1848년의 혁명으로 자유진보주의가 태동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부와의 타협, 그리고 교회와 국가권력의 활동에 제동을 거는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자유진보주의는 공화제의 정부를 이끌어 냈고 언론과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래의 자유진보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국민주의의 물결이 쳤다. 국민주의(Nationalsim)란 무엇인가? 같은 언어, 문화, 종교, 역사, 그리고 지리적으로 같은 울타리 안에 사는 사람들을 똘똘 결속시키는 의미밖에 없다고 할수 있다.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는 여러 개의 작은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수주의는 군소국가들의 통일을 가로막는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결국 1840년대의 사회주의는 서로 다른 백성들 간의 서로 다른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노동자 세력의 집단주의적 시스템을 말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프랑스의 혁명]

프랑스의 2월 혁명은 Campagne des banquets(연회운동)에 대한 억압으로 불이 당겨졌다. 프랑스의 2월 혁명은 민족주의자들과 공화주의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혁명을 주도하였다. 일반 국민들은 국가를 국민들 스스로 통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루이 필립 왕조를 종식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탄생하게 했다. 프랑스만이 1848년의 혁명으로 직접전인 결실을 맺은 국가였다. '연회운동'이라는 것은 1847년 7월부터 1848년 2월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사회운동으로 당시 당국의 집회의 자유를 억압하자 연회의 형태로 정치적인 모임을 가지고 공화국 탄생을 위해 투쟁한 운동을 말한다. 이때 오늘날 프랑스 정치의 기본이 되는 Liberté(자유), Egalité(평등), Fraternité(박애)라는 철학이 또다시 수면으로 올라왔다.

 

[독일 국가들]

독일 국가들에서의 3월 혁명은 독일의 남서부에서 주로 일어났다. 군중들은 대규모 시위를 통하여 독일 통합을 요구하였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독일의회의 설립을 주장했다. 젊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드레스덴에서 바바리아의 전제 왕정타파를 주장하다가 당국의 수배를 받자 스위스로 도피한 것은 독일 3월 혁명의 여파이다.

 

[덴마크]

덴마크에서의 시위로 프레데릭7세 국왕은 헌법 개정을 약속하였다. 이로써 1949년 덴마크 민주헌법이 탄생하였다.

 

[슐레스비히]

슐레스비히는 독일인과 덴마크인으로 구성된 지역이다. 원래는 덴마크 왕국에 속하여 있었으나 덴마크왕국으로부터 분리한 공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슐레스비히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덴마크의 진보적인 정부가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의 통치아래에 둔다는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자 무기를 들고 반대하였다. 프러시아가 독일계 주민들의 반대운동을 후원하였다. 이로 인하여 덴마크와 프러시아간의 3년전쟁이 일어났다. 결과는 덴마크의 승리였다.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합스부르크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1848년 3월부터 1849년 7월까지 혁명운동으로 위협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제국으로 대표되는 합스부르크제국은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슬로박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혁명을 통하여 각자의 자치권과 독립을 얻고자 했다. 심지어는 제국 내에서의 헤게모니를 쟁탈코자 하는 노력도 있었다. 한편, 일각에서는 오스트리아제국의 통합을 계속 주장하였다.

 

[헝가리]

1848년 3월 15일 일단의 마쟈르 국수주의자들이 부다와 페스트에서 시위를 갖고 오스트리아로부터 헝가리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오스트리아제국의 외무상이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사임하였다. 페르디난트1세 황제는 헝가리에 독자적인 헌법과 의회를 가지도록 하고 검열을 중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코수트(Kossuth)와 체체니(Szenchenyi)가 공동수반이 된 새로운 헝가리정부는 헝가리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은 헝가리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헝가리인이 아닌 다른 민족들은 이같은 조치에 대하여 분노하여 봉기했다. 제정러시아의 니콜라스1세가 30만 대군을 앞세워 헝가리에 진격하자 오스트리아가 곧이어 헝가리를 완전 장악하였다. 이후로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 대한 검열과 통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헝가리는 원래대로 오스트리아의 지배아래에 들어갔다.

 

[스위스]

스위스에서의 1848년 혁명은 오히려 스위스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되었다. 스위스는 각 지방(칸톤)이 독립을 주장하였다. 특히 존더분트(Sonderbund: 특별연맹)가 결성되자 1847년 11월 이를 저지하려는 측과 비록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내전이 일어났다. 1848년에 들어서서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어 각주의 독립을 중지하고 하나의 연합국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대폴란드]

폴란드 국민들은 대폴란드(또는 Grand Duchy of Poznan)에서 군사적인 봉기를 하여 프러시아의 점령에 항거하였다.

 

[왈라키아](Wallachia)

왈라키아(발라키아)공국에서는 루마니아 민족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1848년 6월에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제정러시아의 통치에 항거하였으며 결과 게오르게 비베스쿠(Georghe Bibescu)를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발표되었다.

 

[브라질]

브라질에서의 혁명은 1848년 11월부터 1852년까지 끈 것이었다. 1822년에 브라질제국이 선포되었을 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이 결국 백성들의 봉기로 일어나게 되었다.

 

[후기]

독일과 이탈리아는 혁명이후 20여년을 지나면서 군소국가들이 통합하여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이질적인 그룹들이 제국에서 분리하여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1850년대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농노제도가 폐지되었다. 농민들의 생활이 향상되었다. 유럽의 중류층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상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계속 남친계(男親系)를 유지하였다. 러시아에서의 농노해방은 186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합스부르크는 마침내 헝가리를 1867년 Ausgleich(조정-타협)을 통하여 자치국가가 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