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공동묘지 문화

짐머링 공동묘지(Simmeringer Friedhof)

정준극 2010. 3. 12. 21:30

짐머링 공동묘지(Simmeringer Friedhof)

 

짐머링 공동묘지 입구의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적혀 있다.

 

짐머링 공동묘지는 비엔나의 11구 짐머링에 있다. 정문은 Unter der Kirche(운터 데어 키르헤) 5번지에 있다. 짐머링 공동묘지의 역사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짐머링에 알트짐머링 교구교회(Altsimmertinger Pfarrkirche)를 설립할 당시에 교회묘지로 사용했던 것이 시작이다. 요셉2세는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비엔나 도심에 공동묘지를 두지 못하도록 하고 모두 교외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이에 의하면 짐머링 교구교회의 공동묘지도 교외로 땅을 구해 나가야했다. 하지만 당장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주민들은 황제에게 짐머링 공동묘지를 당분간이나마 계속 유지하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포화상태에 이른 짐머링 공동묘지는 1799년 처음으로 확장되었으며 그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장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짐머링 공동묘지에는 약 8천기의 묘지가 있다. 짐머링 공동묘지는 운터 데어 키르헤 5번에 있는 정문을 통해서 들어갈수 있지만 짐머링 교구교회의 계단을 통해서도 들어갈수 있다.

 

아름다운 묘지 풍경. 뒤에 있는 교회가 알트 짐머링교회

 

1896년 짐머링에 대규모의 중앙공동묘지(첸드랄프리드호프)가 조성되었다. 짐머링 교구교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공동묘지는 Altsimmerger Friedhof(알트짐머링 공동묘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짐머링에 새로 대규모의 공동묘지가 생기자 알트짐머링 공동묘지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속 유지되었다. 작은 공동묘지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짐머링 공동묘지는 2차 대전 중에 전투가 벌어져 상당부분이 파손되었다. 전쟁후 대대적인 보수작업에 들어가 담장을 만들었으며 부지도 더 확장하였다. 1979년에는 납골당과 영결식장이 완성되었다. 역시 에리히 볼텐슈테른의 작품이었다. 볼텐슈테른은 비엔나 최초의 마천루인 Ringturm(링투름: 링타워)을 완성한 건축가이다.

 

묘역에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은 Rinnböck(린뵈크) 가족의 영묘이다. 요셉 린뵈크는 19세기에 짐머링 시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이른바 Rinnböckhäuser(린뵈크하우스)를 만든 사람이다. 린뵈크하우스는 짐머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와 린뵈크가쎄 사이에 있다. 교회 담장에 면하여서는 1차, 2차 대전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짐머링 공동묘지는 4명의 명예묘지를 운영하고 있다.

 

- Josef Braunhuber(요셉 브라운후버: 1811-1862): 짐머링 시장(1856-1862)

- Alois Fröschl(알로이스 프뢰슐: 1830-1886): 짐머링 시장

- Gregor Grill(그레도르 그릴: 1834-1894): 짐머링 시장(1886-1889)

- Karl Lory(칼 로리: 1794-1867): 외과의사 겸 자선가

 

이밖에 짐머링 출신의 유명 인사로는 음악교사 겸 합창지위자 겸 작곡가인 Anton Dawidowicz(안톤 다비도비츠: 1910-1993), 자유형 레슬링 국가대표인 Greorge Schurl Blemenschütz(게오르게 슈를 블레멘쉬츠: 1931-2007), 작가이며 다큐멘타리 영화 제작자인 Erich Feigl(에리히 화이글: 1931-2007) 등이 있다. 그러므로 혹시 이들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동방예의지국의 사람으로서 할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