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공동묘지 문화

비엔나 공동묘지 변천사

정준극 2010. 3. 12. 22:25

교회묘지에서 주식회사로 변천

 

18세기 초의 슈테판성당과 주위의 교구교회 공동묘지

 

중세에는 교회 주변에 묘지를 마련하고 매장하였다. 슈테판성당의 경우에도 1700년대에 주위에 이미 교회묘지가 있었다. 교회 주변의 공터는 묘지일 뿐만 아니라 종교 축제나 마을행사를 거행하는 장소였다. 다만, 묘지가 있는 곳은 담장을 둘러 잡인의 출입을 금하였다. 요즘에는 공동묘지를 Friedhof(프리드호프)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Freithof(프라이트호프)라고 불렀다. 프라이트호프의 프라이트는 Eingefriedeter Platz(아인게프리데터 플라츠), 즉 ‘담장으로 둘러친 광장’이라는 뜻에서 나온 단어이다. 비엔나에서 프라이트호프가 처음 생긴 것은 루프레헤츠교회(Ruprechts Kirche)와 페터교회(Peters Kirche)에서였다. 그후에 슈테판성당, 미하엘교회(Michaeler Kirche), 쇼펜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의 '강변의 마리아교회'(마리아 암 게슈타데)에도 묘지가 조성되었다. 그리고 프리트호프(Friedhof)는 '자유의 궁전'이라고나 할까? 세속에서 자유스러워진 사람들의 장소이다. 호프라는 단어는 궁전이라는 뜻도 있지만 정원, 안뜰 이라는 의미도 있다.

 

1823년 상크트 맑스 공동묘지로 가는 장례행렬

 

그러다가 16세기 후반에 위생상의 문제 등으로 시내에 있는 교회묘지를 교외로 옮기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때를 같이하여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증가하자 이들을 비엔나의 성곽 밖에 매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쇼텐토르(Schottentor) 성문 밖에 페스트묘지를 마련한 것이다. 구 AKH(일반병원)이 있던 자리였다. 쇼텐토르 성문 밖 묘지는 1561년부터 1576년까지 주로 전염병 사망자들을 매장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한편, 비엔나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회묘지를 사용할수 없기 때문에 마땅한 묘지를 찾다가 바로 쇼텐토르 성문 밖의 페스트묘지의 한 파트를 할애 받아 사용할수 있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은 1629년에야 비로서 로싸우(Rossau)에 묘지를 사용할수 있었다.

 

중앙공동묘지의 아치형 묘소

 

시내의 교회묘지는 되도록 교외로 이전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하 카타콤의 납골당(그루프트)은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요셉2세 황제가 비엔나 시내에 있는 모든 공동묘지를 시외로 옮기도록 지시하자 거의 모든 교회묘지는 문을 닫기 시작했다. 비엔나 시내라는 것은 링(Ring)의 안쪽이 아니라 그보다 더 바깥 쪽인 귀어텔(Gürtel)의 안쪽을 의미했다. 그리고 종전에 시내에서 공동묘지로 사용했던 곳은 대부분 공원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예를 들면 배링공동묘지였다. 현재 배링공동묘지는 슈베르트공원이 되어 있다. 아무튼 요셉2세의 지시로 인하여 교회지하의 납골당은 황실 사람들을 위한 카푸친교회의 카이저그루프트(황실납골당)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비엔나 귀어텔(외곽순환도로) 이내에는 공동묘지가 사라지게 되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로싸우에 있는 유태인 공동묘지뿐이었다.

 

공동묘지에는 이처럼 애통하는 모습의 조각이 의외로 많다. 비엔나의 공동묘지는 뛰어난 조각예술의 전시장이다. 조각만 감상하더라도 시간을 들여서 온 보람이 있다.

 

당시 비엔나 성밖에 조성된 공동묘지 중에서 오늘날까지 계속 관리되고 있는 곳은 다섯 곳이다. 훈트슈투름 공동묘지(Hundstrumer Friedhof), 마츨라인스도르프 공동묘지(Matzleinsdorfer Friedhof), 배링 공동묘지(Währinger Friedhof: 현재의 슈베르트공원 일각), 슈멜츠 공동묘지(Schmelzer Friedhof), 그리고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St Marx Friedhof)이다. 19세기에 들어서서 비엔나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자 이들 교외에 조성된 공동묘지는 더 이상 여유롭지 못했다. 좀 멀더라도 새로 대규모의 공동묘지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비엔나 시장은 칼 뤼거(Karl Lueger)였다. 뤼거 시장은 짐머링 남쪽의 넓은 지역에 새로 공동묘지를 조성하고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라고 불렀다.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아름답고 웅장한 아르누보 양식의 교회는 ‘칼 뤼거 기념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앙공동묘지는 1874년에 오픈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동묘지였다. 이와 함께 시내에 남아 있는 공동묘지에서 주로 저명인사들의 묘지는 계획에 따라 중앙공동묘지로 옮겨졌다. 음악가 묘역은 대표적인 예이다. 1888년에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의 묘지를 이장하였다. 물론 아직도 폐쇄된 공동묘지에는 저명인사들의 묘지가 다수 남아 있어서 뭇 사람들의 참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저명인사들의 묘소를 중앙공동묘지로 완전 이전하지 않은 것은 남아 있는 공동묘지들도 체면유지는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공동묘지들이 명예를 위해 명예묘지를 선정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

 

중앙공동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묘비의 한 부분. 슈트라우스를 대신하여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세라핌. 이를 기쁜 마음으로 듣고 있는 음악의 여신 뮤즈. 아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하고 있다는 짐작이다.

 

1922년은 비엔나 공동묘지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기록하는 해였다. 당시 비엔나 시장이던 야콥 로이만(Jakob Reumann)은 가톨릭교회와 기사당(基社黨) 연방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짐머링에 화장장을 건립하였다. 짐머링 화장장은 중앙공동묘지와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편리했다. 1953년에 이르러서 비엔나 시당국은 현재의 교외에 있는 공동묘지들을 폐쇄하고 새로 부지를 마련하여 이전키로 결정했다. 단, 10년의 준비기간을 주었다. 대상은 알트만스도르프, 에어라아, 게르스트호프, 하더스도르프, 라인츠, 레오폴다우, 마이들링, 푀츨라인스도르프, 지벤히르텐, 슈타들라우, 슈탐머스도르프 등이었다. 1980년에 들어서서 비엔나 시민들은 이들 이전대상의 공동묘지들을 적당한 대안이 나오지 않는한 이전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오늘날 대부분 비엔나의 공동묘지는 Wiener Friedhof GmbH(비엔나 공동묘지 유한책임회사)의 관리 아래에 있다. 이 회사는 2008년에 비엔나시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산하의 공동묘지에 있는 약 60만기의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

 

중앙공동묘지의 구내 순환버스(Rundkurs). 너무 넓어서 기운이 없는 노인들은 버스를 타야 갈곳을 간다. 

 

[참고사항] AG와 GmbH

길거리의 회사 간판이나 인쇄물에서 자주 볼수 있는 약어가 AG와 GmbH 이다. 무슨 뜻인가?

AG는 Akitengesellschaft(악치엔게젤샤프트)의 약자이다. Aktie(복수는 Aktien)는 주식을 말한다. 게젤샤프트는 물론 회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AG는 주식회사를 말한다. 

GmbH는 Gesellschart mit beschraenkter Haftung(게젤샤프트 미트 베슈팬크터 하프퉁)의 약자이다. 베슈랜켄이라는 단어는 '한정하다'는 뜻이고 하프퉁은 '보증, 책임'이라는 뜻이다. GmbH 는 그러므로 유한책임회사를 말한다.